◈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깨닫다 요3:16 설교 녹취
나(최일도 목사님)는 15세에 사랑하고 존경하던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때 나는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에 반기를 들었다.
그 반기는 25살까지 약 10년간이나 계속되었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신앙을 회복했고, 하나님 은혜로 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33세에 신학교 졸업하고 청량리에서 사역을 시작한지 5년이 지나서
내 나이 38세에 밥 퍼 사역/내 사역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인정하게 되었을 때,
다시 한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말씀에 반기를 들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그래서 사역을 접고 용문산 계곡에서 사흘 동안 신음하며 기도하다가
어느 약초 캐는 노인과 대화를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최일도를) 이처럼 사랑하사...’를 철저히 깨닫게 된 사연,
그래서 밥 퍼 사역을 새롭게 시작하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5년 만에 탈진하다.
제가 청량리에서 사역을 시작한지 만 5년 만에, 나는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는, 사역 실패에 따른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을까?’ 생각했다.
제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이제 그만하게!” 그렇게 충고하셨다.
저는 나름대로 하나님이 제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해서
청량리 뒷골목에서 냄비 하나 들고 ‘도시빈민선교’를 시작했는데,
5년이 지나니까, 나 자신이 완전히 탈진한 것burn out을 느꼈다.
그 당시 제가 사역하면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었는데,
‘한 사람이 와도 괜찮소.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의자가 되어드리리다.’
그런데 허리가 휘청거리면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다.
얼마나 탈진했는지, 아이고, 한 사람도 버거워 견딜 수 없었다.
저는 하나님을 너무 너무 사랑했다.
그러나 하나님만 사랑했다면 저는 수도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큼, 사람을 섬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목사가 된 사람이다.
사람들 사이에 던져진 하나님의 종이 되기 원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청량리 시장 뒷골목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더군다나 가족들도 모두 탈진해 버렸다.
가장 힘이 되어야할 제 홀어머니도, 너무 힘들어하시면서 제 곁을 떠나버리셨다.
어디로 가신다는 말도 없이, 저를 꼴도 보기 싫다며, 집을 떠나 사라져 버리셨다.
아내는 이혼을 정식으로 요구하며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처갓집으로 가 버렸다.
제가 사역에 미쳐서, 집에도 안 들어오면서 분주하게 돌아다니지만,
제 어머니나 아내는 ‘제 정신이 아니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5년이 지나면 뭐가 사역의 기초라도 닦여져 있어야 했는데,
우리 공동체는 여전히 난장판이 날마다 계속되고 있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제 자신도 제 사명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해 보게 되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혹시 아닌 것은 아닐까?’
아니 제가 가장 사랑했던 두 여인(어머니와 아내)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한 술 더 떠서 큰 아들이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빠, 창피해 죽겠어!”
“뭐가 창피하냐?”
“아빠, 동네사람들이 아빠보고 실직자래”
“아빠 목사라고 말하지 그랬어?”
“아냐, 아빠가 목사라고 믿어주는 동네 사람, 아무도 없어!”
무슨 목사가 예배당도 없고, 교인도 없고,
어쩌다가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어와서, 옷만 갈아입고 가는 남자,
동네 사람들이 보기엔, 영락없는 실직자였다.
그 당시 수유리 연립주택 지하실에 살고 있었는데
아들 녀석이 “아빠, 나 지하실 곰팡이 냄새 너무너무 싫어!
이제 청량리 그만 가고, 좋은 데 알아 봐!” 라고 했다.
저는 심각한 고민과 딜레마에 빠졌다.
‘이러면서까지 (사역을 계속) 해야 하나?’
우리 사역은 아무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노숙자 사람들은 변화될 기미조차 없었다.
▲제가 이틀 비운 사이에 쑥대밭으로 변하다.
더군다나 우리가 돕는 노숙자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만 모인 것 같았다.
저도 갈등하며, 정처 없이 이틀 동안 걷고 헤매다가,
그래도 교회당에서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아서, 교회로 돌아왔다.
그 때 우리는, 청량리 로타리 주변 어느 빌딩,
4층 옥상 가건물 창고를 개조한 곳에서 모이고 있었다.
그런데 1층 계단에 보니까, 어느 노숙자 한 분이 똥을 싸고 누워있었다.
그런 모습을 건물주인이 행여나 보면,
당장 저를 찾아와 멱살을 잡고 고함지른다. “제발 나가!” (이사 가!)
지금 다일공동체는 덕소 입구 한강고수부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여기에 오기까지 7~9번을 이사 다녔다.
노숙자, 행려자들이 너무 냄새나고 술주정부리니까,
주인들이 기겁을 하고, 가는 곳마다 우리를 내쫓았던 것이다.
그러나 길바닥에서 자다가 겨울에 얼어 죽는 사람이
1년에 1천명이 생기는 이 서울 도시 상황에서
어떻게 못 보면 몰라도,
지금 저 사람이 길에서 저렇게 자다가는.. 분명히 얼어 죽는데,
본 이상, 그 사람을 데려와서 재우고, 얼어 죽지 않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행려자, 노숙자들을 데려와서 재우다보면,
우리 공동체는 무료급식 외에도, 무료진료소, 무료숙박까지 제공하게 된다.
그러니까 빌딩주인이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아이쿠, 큰일 났다. 저 똥 싼 사람을 건물주인이 보면 또 한바탕 난리칠 건데..’
그때 제가 38살이었다.
청량리에 들어와서 지난 5년 동안,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황금기를
이 사람들 밥 시중들고, 길에 쓰레기 치우고, 사람들 오물 치우다가 다 보냈네...
제가 탈진한 상태에서 똥 싸고 드러누운 사람을 쳐다보니, 더욱 탈진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층에 올라가니,
다른 노숙자가 계단에 토해 놓고, 거기에 쓰러져 있었다.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저걸 다 치우려면 두 바께스는 될 듯 보였다.
탈진해서 올라가는데, 3층 계단에는 바닥에 피가 고여 있었다.
두 사람의 노숙자가 소줏병을 깨어 서로 싸웠는데,
한 명은 소줏병에 찔려서 피 흘리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자기 몸을 그어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제가 이틀을 비운 사이에, 공동체가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하나님, 아니요!”
이 장면을 보고, 저는 그 자리에서 순간적으로 하면서 냅다 비명을 질렀다.
“하나님,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요? 아니요!”
저는 통곡을 하며, 하나님께 고함을 지르며 대들었다.
이제 4층이 궁금해졌다. 4층 옥탑이 우리 예배당/공동체 본부였다.
4층에 올라가니, 아예 출입문이 떨어져 나가서 안 보였다.
십자가는 떼서 패싸움에 흉기로 휘둘렀는지 안 보이고,
제 친구가 기증한 풍금도 다 부서져 있었다.
우리 집사람이, 그래도 예배당이라고 설치했던 커튼도 다 찢어져 있었고,
성한 커튼은 하나도 안 보였다.
제가 이틀 비운 사이에, 15명의 노숙자들이 패싸움을 해서
실내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싸움이 그친 후에 그들은 서로 고발하지 말자고,
서로 화해하는 의미로 소주 파티를 거기서 했다.
3층에 피 흘리던 사람들은, 그 중에 끝내 화해를 못한 사람들이었다.
▲사역을 접기로 결심하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신 이 세상이, 어째서 이 모양입니까?’
‘이들이 인간다움을 회복하기는커녕,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다가 죽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거기에다 겹친 가정사가 있었다.
‘하나님, 왜 어머니는 떠나시고, 왜 아내는 친정으로 가 버렸죠?
왜 저는 하는 일이 하나도 되는 게 없죠?
어딜 가나 멸시, 천대, 비웃음입니다... 엉엉엉’
그 때 제 나이 38세였다.
완전 밑바닥 잿더미 위에 앉아서
‘아~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며 낙심의 밑바닥에 떨어졌다.
‘나의 처녀 목회, 다일공동체는 깨끗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그만 떠나자!’
그래서 청량리 경찰서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저, 여기 떠납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뒷수습을 부탁드립니다.”
“잘했어요.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뭐 그렇게까지 오래 버티다가...
당신, 밭을 보고 씨를 뿌려야죠! 그런데 어디로 가실 겁니까?”
“아직 못 정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조건 기차를 집어탔다.
지긋지긋한 청량리를 가급적 10분이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용문산 계곡에서 약초 캐는 노인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다
‘그때 선교사로 떠날 걸 그랬나?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해야 하나?’ 마음속이 착잡했다.
지금 막 떠나는 기차를, 표도 안 사고 막 뛰어가서 집어탔는데,
태백 쪽으로 가는 기차였다.
차장이 검표하러 왔는데, 돈을 내려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한 푼도 없었다.
차장 아저씨는 “따라와!” 하시더니, 나를 데리고 칸칸마다 다니면서
“멀쩡하게 생긴 놈이 무임승차하고 지랄이에요!”
“무임승차, 이런 인간들이 있어서 되겠습니까?” 하며 엄청 창피를 주었다.
그러더니 양평 지나 용문 역에 나를 떠밀어 내쳤다. “내려!”
‘하나님, 이렇게 쪽팔리게 해도 되는 겁니까?’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용문 역에 내린 것도, 모두 하나님의 기가 막힌 섭리였다.
그래서 용문산 계곡에서 사흘 동안 밤낮으로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 저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왜요?” (왜 저를 부르셨나요?)
“왜요?” (왜 시작하게 하셨나요?)
“왜요?” (왜 안 도와 주셨나요, 왜 실패하게 하셨나요?)
그렇게 계곡에서 사흘을 금식하며 지냈는데,
사흘째 되는 날, 어디서 밥 냄새가 솔솔 풍겼다.
냄새를 따라 가보니, 노인 한 분이 텐트를 쳐 놓고, 밥을 짓고 있었다.
노인은 이 산 저 산 다니시면서 약초 캐서 내다 파시는 분이셨는데,
아예 거기서 여름을 지내시려고, 텐트 앞에다 상추밭까지 가꾸고 계셨다.
밥이 끓어서 뜸을 들이려고 냄비뚜껑을 살짝 열어놓은 것이
저쪽 바위 위에서 기도하고 있던 내게까지 냄새가 날아온 것이다.
제가 그래도 넉살은 좋으니까, 노인께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너 도둑놈이지? 젊은 놈이 이렇게 밥 거저먹으려고 하는 놈은, 밥도둑놈이야!”
“아니, 멀쩡한 놈이 왜 밥을 거저먹으려고 그러냐?
봐라,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내가 해서 먹잖아?”
“죄송합니다.”
나는 밥 얻어먹는 것을 포기하고 얼른 자리를 떴다.
그랬더니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젊은이 이리 와 봐!
야, 내가 그렇게 인정 없는 놈은 아니다. 앉아라.
세상에 공짜 없다.
너 이 밥 먹고 내 부탁하나 들어줘야 해, 알았지?”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지난 5년 동안이나 무의탁 노인들에게 밥을 거저 대접했는데,
이렇게 내가 거저 얻어먹으려니, 한 끼가 정말 힘드네!’
“그래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해야죠. 밥 얻어먹는 주제에... 부탁이 뭔데요?”
“너, 이 밥 먹고 청량리 가라!”
“(화들짝 놀라서) 어디로 가라고요?”
“청량리! 거기 최일도가 밥 거저 준다더라! 너 모르냐?”
순간 제가 머리카락이 쭈뼛 서더니 덜덜덜 몸에 진동이 오는 것 같았다.
제가 너무 놀라서 떨면서 말했다.
“할아버지, 최일도 만난 적 있나요?”
“봤지, 내가 약초 내다 팔려고 청량리 경동시장에 갔다가
노인들이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줄 서 있더라고.
‘이게 무슨 줄이요?’ 물었더니
최일도 목사가 밥 거저 주는 줄이래.
그래서 나도 밥 먹으려고 줄을 섰지.
그런데 한 시간 기다렸다가 그냥 왔다, 임마”
“왜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얻어먹으면,
날마다 와서 먹는 사람이 못 먹을 것 아니냐?
그래서 그냥 돌아와서 내 손으로 해 먹었다.
그런데 듣자하니, 밥만 주는 게 아니라,
부탁하면 리어카도 사 준다고 하더라.
가서 리어카 하나 사 달라고 그래!
그래서 인생 새롭게 시작해 봐!
청량리 가서 최일도 만나라, 알았지?”
“네에에에”
나는 그 용문산 계곡에서 신비한 주님의 섭리를 체험했다.
그 약초 캐는 노인과의 대화에서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몸이 덜덜덜 떨리는 진동 가운데서 체험했기 때문이다.
청량리 ‘밥 퍼’를 떠나 멀리 도망가려는 나를
하나님은 한 노인을 통해, 제게 ‘청량리로 되돌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그래서 노인의 부탁대로, 최일도가 ‘최일도를 만나러’ 청량리로 향했다.
주님은 한 노인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제게 들려주신 것이다.
약초 캐는 노인과 만남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청량리로 부르셨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울었는데,
지금은 감사하고 감격해서 나는 울고 있었다.
나는 얼굴은 웃으면서, 눈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용문산을 내려왔다.
▲용문 역에서 직원을 통해 재차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은, 바로가 꿈을 두 번 꾼 것처럼,
두 번 연거푸 말씀해 주셔서, 그것이 주님의 음성임을 확신confirm시켜 주신다.)
나는 청량리로 돌아가는 용문 역에서,
기차표 파는 직원을 통해서, 또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고, 그래서 역 직원에게 미소로, 차표 한 장 부탁했다.
직원은 너무 쉽게 선뜻 표를 내 주었다.
“그런데 말이죠, 어디서 많이 본 분 같은데,
혹시 청량리 역 근처에서 좋은 일 하시는 목사님 아니십니까?”
“네에에에~”
그때까지만 해도, TV에 딱 두 번만 나왔기 때문에,
청량리를 벗어나서, 다른 곳에서 저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너무 잘 알려져서,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제 얼굴을 알아본다.)
그 직원은 기차표 말고도,
고맙게도 김밥에 사이다까지 사 주었다.
(사흘 전에 기차표 없다고 당한 모욕에 비하면, 사흘 만에 대반전이었다.)
“목사님, 사역하시느라 힘드시죠? 제가 TV보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 김밥 드시고 힘 내셔서, 좋은 일 하셔야죠?”
나는 그 직원의 음성 역시, 그 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하나님이 그 직원을 통해서, 제게 청량리에서 밥 퍼 사역을 계속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시는 음성으로 재차 알아들었다.
▲청량리 역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다
그 직원이 건네 준 김밥을 다 먹고 나니, 열차는 어느 새 청량리에 도착했다.
놀라운 것은, 역광장 임시매표소 앞에
늘 나를 힘들게 하고, 거짓말을 일삼던 그 노숙자들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밥 퍼!, 어디 갔다 오냐?”
“야,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던데, 무슨 소리야?”
“야, 우리 사흘 밥 못 먹었다!”
나는 그 분들 한 분, 한 분을 품에 안아드리면서 울먹거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참,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제가 완전히 변했으므로, 제가 그들을 전에 없이 친절하게 대한 것이다.
▲환경은 바뀐 것이 없는데, 나 자신이 완전히 바뀌었다.
용문산에 갔다 온 이후,
청량리가 내 눈에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애먹이던 노숙자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사흘 만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환경도 그대로, 사람들도 그대로였다.
한 가지 변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내 마음이 변했고, 내 시각이 변했다.
(앞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아름다운 눈과 마음으로 보니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진리를 터득하고서도,
그것이 내 삶에 뼈저리게 체험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었다.)
사흘 전, 청량리가 무시무시하게 보였던 것은, 내 마음이 무시무시해서 그랬었고,
사흘 후, 청량리가 아름답게 보인 것은, 내 마음이 아름다워졌기 때문이었다.
환경이 변한 것은 없지만, 내 마음과 눈이 변한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철저히 깨달았다.
우리 사회가 복지사회로 가려면,
제도를 뜯어고치고, 인사를 쇄신하고, 그래서 환경을 바꾸어야 되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깨달아져야,
‘내 눈앞에 하늘나라가 열린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깨달았다.
(→ 천국의 기쁨과 환희를 경험하며 사역하게 된다는 뜻인 듯, 불평불만이 아니라...)
길가의 가로수도 나를 보고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최일도 씨, 잘 돌아왔어요. 환영합니다!’
그래서 저도 가로수처럼 팔을 벌리고, 춤을 추며
청량리역 광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끝-
☆다일 천사병원 동영상 보기 (클릭) [주제별 분류] 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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