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소리 높여 외칠 고백 행2:14~36 설교 스크랩
◑성령이 임하시면 <말>이 달라집니다.
▲어려운 시기, 인생의 고비는.. 간증의 시간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니까)
모두들 경제위기다, 살기 힘들다,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면 어려운 때란 항상 기적의 때요 간증의 기간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모든 어려웠던 기간은 다 간증의 기간이었습니다.
저는 짧은 생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아주 힘들고 어려운 고비들이
다 한결같이 간증의 때였고 기적을 경험하는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닥쳐온다고 할 때는
사실 믿음 안에서는 가슴 설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는 때가 되었구나.’
여러분, 그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입술로 <믿음의 고백>을 드리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반드시 믿음으로 하나님께 먼저 올려드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들다고, 또 어렵다고,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왜 하나님이 역사를 안 해주시는가?’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특히 어려울 때, 여러분이 먼저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을 보여드리는 것 중에 놀라운 것이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있어서.. 살 길은 항상 너무나 간단합니다.
‘왜 그것을 몰랐을까?’ 탄식할 만큼 간단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축복, 십자가의 복음을
당당히 고백하고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제일 먼저 <말>이 달라집니다. *위의 <고백>과 같은 맥락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한결같이 말문이 열려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행2:5~13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저들이 어떻게 우리 방언으로 말을 하는가?”
그리고 행2:14~36절까지도 보면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설교를 할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겁쟁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겁이 나서 멀찌감치 따라가다가
결국 가야바의 궁전에 가서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력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이 달라집니다. 믿음의 말을 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너무 수다스러운 것도 좋지 않지만,
말없이 점잖은 것도 결코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말없이 점잖다는 말은 그가 속이 뜨겁지 않다는 뜻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속이 뜨거운데도 조용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 충만하면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여러분 속에서부터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터져 나오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고백, 외침>이 능력과 역사를 일으킵니다.
▲성령 받은 베드로..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말’은 ‘설교’의 뜻
베드로가 성령 받았음을 그의 설교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설교를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설교를 하고 있는데,
시편 16편과 110편의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그 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실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로서는 도무지 스스로 깨우칠 수 없는 것을 지금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25
이것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이 천년 후에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뵈었다고
시편 16편을 읽고 해석할 수 있을 정도면... 보통 지식이 아닙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역사하시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설교를.. 그가 했습니다.
베드로가 계속 설교합니다.
다윗은 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하였다고 증거했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시16:10, 행2:27~28
이것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지 않았다면, 무식한 어부가 결코 알 수 없는 말입니다.
▲그의 <말>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놀라운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단순히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만을
무기력하게 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여도
세상 사람들은 논쟁을 걸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런 일도 다 있었니?’ 하고 끝내 버립니다.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그 설교를 통하여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어떻게 이런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다. 함께 하신다!’고 당당히 외쳤던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지 않느냐?’ 고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2~33
‘예수님이 부활하셨다/아니다’며, 베드로는 신학적인 논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증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가 직접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그러냐?” 이렇게 넘어갈 만도 한데,
사람들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 지금 우리 안에 와계시다.
그것을 여러분이 보고 듣는 것이 아니냐?’고 증거할 때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여러분도, 베드로처럼 당당히 증거 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살고 세상을 살리는 길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만 그렇습니까?
베드로에게만 예수님이 오셨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당당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언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우리가 돈을 많이 벌고, 공부를 많이 하고, 큰 건물을 짓고 성공하면
관심을 가져주겠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세상을 주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당당하게 예수님의 부활과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을 담대하게 증거할 때입니다.
▲안 외치니까, 역사가 안 나타납니다.
롬6:3절에서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례까지 치렀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롬6:6절에서는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길거리에 뛰쳐나가 큰 소리로 외칠 일이 아닙니까?
아무리 놀라운 진리요 복음이라도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진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 복음이
내게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나가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 되겠습니까?
▲바울도, 베드로처럼,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롬6장의 복음의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고백한 것이
갈2:20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2;20절에서는 ‘내가’ 라고 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도 고백할 때..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베드로만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만 그렇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
예수님을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가족들에게도, 직장 동료들에게도, 이웃 사람들에게도
여러분이 정말 소리 높혀서 베드로처럼 고백할 것이 바로 이 복음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밝히는 것을 주저합니다.
무언가 부자유할 것 같고, 불이익을 당할 것 같고, 논쟁에 휩싸일 것 같고,
계속 그리스도인답게 살 자신이 없고, 너무 튀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을 바꾸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고
당당하게 고백하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나와야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데,
우리가 주저하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고백하고, 그대로 살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복음을 고백하니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예수의 십자가 정신 안에 조국 인도를 구원할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영국의 부당한 처사에 굴복할 수도 없고, 그러나 무력에 호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대안이 십자가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유명한 “비폭력, 비협조” 운동입니다.
그것은 힘이 넘쳤습니다. 대영제국을 흔들었습니다.
간디의 소집으로 인도의 지도급 인사 20만 명이 감옥에 갔습니다.
화를 잘 내던 사람들이 대나무 곤봉에 머리를 맞고
아무 저항 없이 감옥에 들어가고, 가장 가혹한 형벌을 자청하였다.
그들은 법정에서 감옥으로 이송될 때 영국인 판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힌두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힌두교인이 선교사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십자가를 가지고 말하려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감옥은 우습게 되었습니다. 양심적인 영국인들은 괴로워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우리가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있는가?’
이것은 이상한 전쟁이었다. 그것은 힘이 있었고, 거의 기독교적이었습니다.
그 운동에 폭력이 슬금슬금 들어오면, 간디는 운동 중지를 명하고
대신 스스로를 참회하고 정화하는 뜻으로 단식을 실시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행위였습니다.
한 힌두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겪었듯이
마하트마 간디도 예르바다 교도소에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겪고 있다.”
간디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비폭력, 비협력 운동도 십자가가 아니었고
단지 목숨을 걸고 십자가 정신을 적용하려 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는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고백하고, 삶에 적용하면..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힌두교인들이 그랬습니다.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간디에게 물었습니다.
“기독교가 인도에 뿌리 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디가 말했습니다.
“당신네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하십시오.
기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으십시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타종교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십시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유력한 힌두교인이,
‘기독교가 인도에 뿌리내리려면 더욱 기독교적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닐 때 한국 복음화, 토착화를 위하여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 종교를 배우고 그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로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통하는 기독교인이요, 교회가 되려고
세상을 배우고 닮으려고 할수록.. 우리는 더욱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진실이요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해되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엄청난 보화를 가지고만 다니다가 죽을 것입니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한번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
예수님과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진리를 증거해 보십시오. 삶으로 보여 주십시오.
여기에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걸어 보십시오.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대로 살았던 베누고팔
스탠리 존스 선교사의 자서전「순례자의 노래」에서
개종자 베누고팔(C. T. Venugopal)이란 사람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는 형의 권유로 스탠리 존스 선교사 전도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차에서, 예수님이 자기 곁에 앉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과 자신이 영원토록 서로에게 속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철도 공무원이었는데. 뉴델리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하 직원과 고위 공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기독교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이거든
내게 다가와 그것을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나를 돕는 것입니다.”
얼마 후 2명의 힌두교인 직원이 그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베누고팔씨. 오늘은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닌 것 같군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오늘 아침 고요한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까?”
그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예수의 사람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할 될 때, 서로 적대적인 사이에서
철도와 관련한 분쟁을 해결할 특사로 파키스탄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인도가 필요한 서류 뿐 아니라, 배상금까지 받아 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란 인도 정부가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산상설교에 나온 대로 했을 뿐입니다.
10리를 더 가주고 원수를 사랑했을 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산상설교대로 살 수 있나 말합니다.
하지만 산상설교는 그대로 살기 시작할 때, 산상설교는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그는 브라만 계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믿은 일로 인하여 집안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회심이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2년 동안 아들에게 와서 살았습니다.
그 후 가족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베누는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베누고팔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가진 신앙을 가지기 원합니다.”
이 모든 일이 그가 당당히 예수의 사람임을 고백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중략)
◑내 입술로 고백하고, 내가 그 고백대로 살 때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 때 <능력,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대신 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에서 사무실에서 “나는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로 산다.”고
당당히 고백하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선언하고 살면, 정말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만약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께서 내 생명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였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고백하고 나가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과 같은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물론 사무실에서 핍박과 어려움도 따르겠지만,
성령님이 감당할 능력 주시고, 임재, 동행해 주시고, 결국 승리하게 하십니다.
능력과 역사는 <그 핍박과 어려움의 과정>에서 <승리로 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동반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은 지금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선언해 놓고 나면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가 나타나며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핍박을 이기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그 모든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십니다. (후략)
<08.12.14 주일 설교 (사도행전 강해 5) 스크랩, 정리 [주제별 분류] 신앙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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