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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스스로 살다가 망한 사람들 1663

LNCK 2008. 12. 28. 02:05
 

◈스스로 살다가 망한 사람들       왕상1:1~53       설교 스크랩



급변기가 되면, 너무 조류가 급하게 흐르니까, 우물쭈물하다가 주의 뜻을 놓치기 쉽습니다.

다윗 왕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이스라엘 조정은 급변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때 아도니야, 요압, 아비아달은, 혼미한 국정 가운데서 하나님 뜻을 분변치 못합니다.

더욱이 자기 욕심과 야심이 숨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행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1. 아도니야의 ‘스스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사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 태어난 아들로서, 용모가 뛰어났다. 1:6

오늘 본문에서 제일 먼저 아도니야 얘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 아도니야는 왕이 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위로 형들이 몇 있었지만

암논은 죽고,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해 다 사라졌습니다.


남아 있는 왕자들 중에 ‘아도니야가 압살롬 다음 태어난 왕자’란 말은

다윗 왕의 실질적인 장자라는 얘기입니다.

장남이 왕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아도니야는 인물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용모가 뛰어났다. 1:6

인물 좋으면 덕을 좀 보기도 하지 않습니까?

왕이 될 사람의 인물이 좋으면 다른 사람의 지지를 받기가 쉽습니다.


▲아도니야가 요압과 아비아달을 포섭하니, 그들이 아도니야를 지지하였다. 1:7

더군다나 인물만 좋은 게 아니고, 당시 내각의 최고 실세였던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아도니야를 지지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식견과 리더십도 갖춘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5, 9

하나님이 ‘너 왕 해라.’ 그러지 않았는데,

자기가 왕이 되고 싶어서, 아버지 다윗 왕의 뜻을 어기고

아버지하고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하고도 아무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왕 됨을 선포하는,

그리고 잔치를 준비하는 이런 일을 아도니야가 벌였습니다.

다음 장(왕상2장)에서 그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를 생생히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어떤 사안을 내 마음대로 처리해 나가려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2. 단8장의 ‘스스로’


▲못 믿을 만큼 구체적인 단8장의 예언

다니엘서 8장에 보면 기가 막힌 역사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바벨론 다음에 페르시아가 일어나고,

 

페르시아 다음에 그리스가 일어나고,

그리고 이 그리스 (헬라) 제국이 네 조각으로 나누어지고

이런 설명들이 성경에 자세히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 다니엘서 8장을 두고 일부 신학자들이

‘이건 가짜다. 어떻게 이처럼 정확하게 역사를 예언할 수 있는가?

이건 역사가 다 지나고 난 다음에, 누가 기록을 해가지고 예언서처럼 만들어 놓은 가짜다.’

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높아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다니엘서 8장 예언에서, 

헬라 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 나라가 네 쪽으로 나누어지고

그 네 나라가 끝날 무렵에 <두 뿔을 가진 숫양>이 나타난다고 예언합니다.

이 사람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두고 하는 얘기입니다.

안티오쿠스 4세라고 불리었던 왕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다음에, 그의 부하 네 명이

왕국을 네 쪽으로 나누어서 통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네 왕국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네 왕국이 몰락할 때쯤 안티오쿠스 4세라고 하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두고 성경은 스스로 심히 강대해져 갔다, 단8:4

그리고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단8:11


여러분, 스스로 강한 자들의 특징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자기를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신이라고 주장했던 인간들이 백성을 편하게 했던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신이라고 주장하려니까

신답게 보이기 위해 김일성처럼 큰 동상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평양 장대현 언덕에 세워놓은 50m 높이의 김일성 동상 만드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습니다. 거기 입혀 놓은 금을 벗겨내면

북한 주민들이 한 1년쯤은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야 하니까 백성들은 세금 많이 내고,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교만 방자한 자들이 역사에서 항상 그런 일을 행했습니다.


이 안티오쿠스 4세도 자기를 ‘데오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데오스’는 헬라어로 ‘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강해지는 자들은 꼭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대적하고 자기가 휘두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가 되거나

나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아무리 예배에 나와 앉아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내가 말해도,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나 스스로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변질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3. 요압과 아비아달의 ‘스스로’


▲평생 잘 나가다가, 말년에 실패한 원로들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생각해보면

참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평생 동안 다윗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이끌어 왔던 지도자들입니다.

원로 들입니다. 그 사회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생각이 모자라서,

지금 대권을 놓고 아도니야를 지목한 겁니까?

귀가 얇아서 아도니야가 하는 말을 듣게 된 걸까요?


성경은 왜 아도니야는 안 되고, 꼭 솔로몬이어야 하는지 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솔로몬이 아도니야보다 마음이 넉넉하다든지,

믿음이 좋다든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아도니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아비아달이나 요압은, 평생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다윗을 도왔던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 누구를 왕으로 세우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아도니야 편에 섰다가, 이렇게 낭패를 당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우리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생생한 삶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당할 때, ‘하나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이건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익숙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음이 더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더 대적하는 자가 되기도 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과 원칙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판단과 상관없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상식과 전혀 다른 엉뚱한 길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요압과 아비아달은, 상식이 없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너무 많아서 탈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분변해서, 내 상식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원칙을 따라서

행동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은, 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확인이 됩니다.

-밧세바의 입에서 확인이 됩니다.

-최종적으로 다윗왕의 입을 통해서

내가 섬겨왔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맹세한다면서

솔로몬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이라는 것이 선포됩니다.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 왕상1:30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은, 오래 전 앞서 하나님이 미리 보여주신 계획이었습니다.



◑4.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 ‘스스로’


▲스스로 사업가

오늘 이 사건이 있고 1천년이 지난 후,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아도니야와 비슷한 한 사람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한 사업가가 어떤 도시에 가서 사업을 해서 돈을 좀 벌어 보겠다고

사업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약4:13

그런데 난데없이 야고보 사도가, 허탄한 짓을 하고 있다고 야단을 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약4:14~16

 

 

아니, 이 사람이 무슨 마약장사, 술장사를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이 사람이 건전한 사업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고보가 왜 야단부터 치고 봅니까?


야고보 사도가 허탄한 짓이라고 말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뜻입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네가, 그리고 아침 이슬처럼 잠깐 있다가

햇볕이 쪼이기 시작하면 없어지고 마는,

아침 이슬 같고 아침 안개 같은 네가,

‘내가 주의 뜻이면 이걸 하기도 하고, 저걸 하기도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주의 뜻하고 아무 상관도 없이

내가 어떤 도시에 가서 돈을 좀 벌어보리라.

그걸 지금 야단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야단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 열심히 해도, 분변하는 데 깨어있어야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도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에서 벗어나 있는지 그 점에 대해 늘 민감하지 않으면

우리는 매주일 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도

하나님하고는 한참 거리가 먼 곳에 가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마치는 말

우리가 말씀에 익숙한 자가 되어야 하고, 훈련도 받아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변하고 순종합니다.

미숙한 사람일수록 들쭉 날쭉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몰랐기 때문에

아도니야도, 요압도, 아비아달도,

당대에 위대한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는,

아니 위대한 지도자가 되고도 남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한 순간 그런 실수를 함으로써

다 역사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나단, 브나야 같이 당시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이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붙들고 잘 분변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새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오판합니까?

결국은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고, (아도니야)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고, (단8장,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 하고, (요압, 아비아달)

스스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등 (약4장)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자기 욕심을 절제하지 못할 때.., 쉽게 그르치는 것입니다.

 

 


◑관련글 : 스스로, 임의로                                     -이 단락 출처 보기-


다니엘서에서 '임의로'와 '스스로'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띕니다.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단5:23)

내가 본즉 그 수양이.. 그것이 '임의로' 행하고 스스로 강대하더라(단8:4)


수염소가 '스스로' 강대하여 가더니(단8:8)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성소를 헐었으며'(단8:11)

마음에 '스스로' 큰 체하며.. 또 '스스로' 서서 만왕의 왕을 대적할 것이나(단8:25)


그가 큰 무리를 사로잡은 후에 그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서..(단11:12)

강포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이상을 이루려 할 것이나(단11:14)

그는..'임의로' 행하고..(단11:28)


그가..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단11:30)

이 왕이 자기 뜻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단11:36)

그가 모든 것보다 '스스로' 크다 하고..(단11:37)


적그리스도의 일관하는 원칙은

'임의로' 행하고 '스스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칙은 '임으로'와 '스스로'의 삶입니다.


심판 받을 죄인들의 삶의 기준 역시 '임의로'와 '스스로'의 생활입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마27:3)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

유다는 모든 행동을 '스스로' 행하였고, '스스로' 목매달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대조적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8:28)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오늘 나의 생활에 '임의로'와 '스스로'는 얼마나 많은지요!

주여, 오늘 우리에게 '임의로'와 '스스로'라는 단어가 없게 하소서.

 

<08.12.07. 인터넷설교에서 스크랩, 축약                         [주제별 분류] 리더십, 목회자 


 

◑엔드류 머레이, 예수님의 “나는 ~ 아니라”는 자기 부인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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