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복’ 보다는 ‘주는 복’ 갈3:9 편집자 칼럼
▲‘받는 복’이 아니라 ‘주는 복’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2
과거 개역성경에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했는데,
요즘 성경은 ‘복이 될지라’고 번역한다. 이것이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이다.
영어성경도 대부분 You shall be a blessing으로 번역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되어라’고 축복하신 것은
‘받는 복’보다는 ‘주는 복’의 개념이다.
‘네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라’가 아니라,
‘네가 그들에게 복이 되어라’인데,
신약적 표현으로 하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와 같은 맥락이다.
빛이 세상에 자기를 태워서 빛을 비춰주고,
소금이 세상에서 자기를 녹여서 맛을 내는 것은.. 모두 ‘주는 복’이다.
‘너는 복이 될지라’도 ‘너희는 빛과 소금이다’처럼 ‘주는 복’을 뜻한다.
과거에 우리는 이 구절을 ‘받는 복’ 관점에서 주로 해석했다.
그래서 ‘복’을 ‘사명’과 연결시키는데 등한시했다.
땅의 모든 족속들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창12:3, 28:14
→이 말씀도 ‘자기가 받는 복’보다는, ‘복의 통로, 주는 복’을 뜻한다.
물론 자기가 복의 통로가 되고, 복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기가 먼저 복을 받는 것을 전제로 하겠지만,
초점이 ‘주는 복’에 있다. ‘받는 복’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아브라함의 복’은
‘받는 복’이 아니라 ‘주는 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는 복’에 실패한 인생은 안 돼!
여러분, ‘받는 복’은 받으면 좋지만, 못 받아도 괜찮다.
성경에서 엄밀하게 강조한 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복을 의미)
그러나 ‘주는 복’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
'주는 복’은 마음만 먹으면 내가 얼마든지 나누어 주면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받는 복’은 받기 어려워도
‘주는 복’은 10배로 받기 쉽다. 마음만 잘 먹으면, 누구든지 다 받을 수 있다.
특별히 ‘주의 종’들은 ‘복 주는 자’이다.
제 주위에 목회자들을 보면, 물질적인 복을 받았다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거의 다 빠듯하게 산다.
그런데 그분들은 (오복 개념으로) ‘복 받은 자’ 보다는
‘복 주는 자’로 성실하게 살고 있다.
늘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주는 삶을 성실히 살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만 해도 그렇다.
남의 병은 잘 고쳐주면서, 자기 병은 못 고쳤다.
‘복 받은 자’보다 ‘복 주는 자’로서의 역할에 더 충실하게 살았던 것이다.
꼭 풀타임 주의 종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복 받는 자’에 비교하면 ‘복 주는 자’가 10배로 쉽다.
‘받는 복(오복)’을 다 받기는 어려워도, ‘주는 복’을 받기는 엄청 쉽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해서
자기가 복 받기는 어려워도, 남을 복 받게 하기는 10배로 쉽다.
저는 지금까지 오복, ‘받는 복’ 못 받았다고 애석해 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 저녁에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내 초점이 잘 못 되어있었구나!’
성경은 ‘주는 복’을 받으라고 했지, ‘받는 복/오복’을 받으라고 명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예로 볼 때 그렇다. 성경을 모두 뒤지지 않았지만, 같으리라)
그럼 나는 ‘주는 복’을 충만히 받았는가?
당연히 충만히 받았다.
다만, 내가 받은 만큼 충분히 나누어 주었는지... 그것이 문제다.
요지는, ‘받는 복’에서 ‘주는 복’으로 초점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초점을 바꾸고 나면,
‘복’ 안 받았다고 말할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 받았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갈3:9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왜 저를 (받는) 복 많이 안 주세요?’하고 따졌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주님이 엄청 답답해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주는) 복 많이 줬는데, 자네는 얼마만큼 나눠 줬니?’
'주는 복'은 다른 게 아니라, 대위임령을 충실히 사는 것이다.
◑‘주는 복’의 예
▲야곱이 라반의 집에 ‘복’이 되다.
야곱이 하란에 도피해서, 삼촌 라반의 집에서 섬기게 되었는데,
라반이 하는 말을 들어보시라.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게 복을 주신 것은 다 자네 때문일세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머물러 있게’ 창30:27
벧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복(비전, 사명, 구약의 지상명령)을 받은 야곱이
외국에 삼촌의 집에 이르자, 그 집이 복을 받기 시작했다.
야곱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지금은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창30:30
야곱은 지금 ‘복의 통로, 남에게 복을 주고 있다.’
‘자기는 언제 자기 집을 세우느냐’고 항변하는데,
실컷 삼촌 좋은 일만 시켜주고 있다는 뜻이다.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집/감옥/애굽 나라가 복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창39:5
또한 감옥에서는 감옥장이 요셉 덕을 봤고,
거기에 수감되어있던 술 맡은 관원장도 요셉의 덕을 봤다.
애굽 모든 사람이 요셉 때문에 복을 받아서 7년 흉년을 면하고, 생명을 유지했고,
야곱의 가족 70인도, 요셉 때문에 복을 받아서, 자기 생명을 유지했다.
요셉은 ‘복’이 되었는데, ‘받는 복’이기 이전에, ‘주는 복’이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로 인해 복을 받았다.
▲복 받는 법
이제 ‘세상이 말하는 복을 받는 법’이 자명해진다.
내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은 샤머니즘 식인데,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 예불 드리는 식으로 복을 구하는 것은 <받는 복> 개념이다.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기에 근거가 미약하다.
그러나 위에서 거론한 성경의 예를 통해 ‘복 받는 법’을 추론하자면,
‘복된 사람’ 곁에 가 있으면 된다.
야곱, 요셉 등 복 주는 사람 옆에 가까이 가면 된다.
<받는 복>보다 <주는 복>이 받기 쉽기 때문이다.
롯도 아브라함 옆에 있을 때..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 보내셨더라. 창19:29
적용하면, 오늘날 내 주위에 신실한 크리스천들과 좋은 관계에 있으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복>이 되어주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중보, 축복기도하면 더 할 수 없이 좋은 ‘복 받는 방법’이다.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모두 <복을 주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대접하는 일에 늘 열심을 내야 한다.
그들은 <복을 주는 자>인데, 내가 그들을 멀리하고 안 받으려 하면.. 못 받는다.
해외에 계신 선교사님께 따뜻한 카드, 책을 보내드리고,
그 분이 나를 위해 간절히 축복기도 해 주시는 것도.. 복 받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더 읽으실 분..............................
◑반대의 경우도 있다.
‘복된 사람’이 곁에 있는데, 그를 통해 복을 받기는커녕
반대로 그로 인해 재앙을 당하는 경우도.., 안타깝지만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 때문에 하나님의 재앙을 맛보았던 애굽 왕 바로, 창12;17
-이삭과 리브가 때문에 큰 재앙을 받을 뻔했던 블레셋 왕 아비멜렉 창26:9
이들은 ‘복 주는 자’ 곁에 있었지만, 복은커녕 재앙을 받을뻔 했다.
그들을 선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창12:3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영접하는 사람에게만 ‘복’이 되었고,
그를 거부하고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화, 재앙’이 되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21:44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복’이 되었지만
바로 왕과 애굽 백성들에게는... 도리어 ‘화’가 되어서 10가지 재앙을 당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과 괜히 시비 붙어서 내게 이익 될 게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가끔 빵 대신 벽돌을 던져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원망하면서 그 벽돌을 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기막힌 집을 짓기도 한다. <편집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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