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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프레드 라는 이름의 개 1711

LNCK 2009. 1. 24. 22:56

 

◈프레드 라는 이름의 개           고후3:15~18            설교 녹취, 정리

 

*출처 : 힐송 컨퍼런스 동영상 녹취,  클릭 

 

 

▲프레드는 사람의 다리 무는 것을 좋아하는 개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의 다리는 무조건 일단 물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개 주인이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개 주인은 프레드의 입에 망(이하 재갈)을 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주인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프레드에게는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제 자기는 하루 종일 개 줄에 묶여있어야 했고, 입에는 재갈이 씌워져 있었지만,

그래도 자기 마음속에는 하루 종일 사람 다리 물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레드는 다름 아닌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만, ‘율법’이라는 재갈이 물려져 있습니다.

죄의 욕망이 있지만, 율법이라는 재갈에 꽉 물려 있습니다.

 

옳은 일을 하려고 무척 열심히 노력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본성new nature을 갖지 못합니다.

규칙과 규정(율법)들로 자기 행동을 통제하기만 하고,

자기 내면과 본성은 실제로 전혀 변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적으로 신앙생활 하다보면

사람들이 자라면서 ‘하나님 섬기는 일’을 점점 등한시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도우는 일’ 따위에는 별 관심도 없는 크리스천이 되어갑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는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진정 사랑한다면, 누군가를 도와라’입니다.

 

그러나 율법적인 신앙생활은,

이렇게 말씀으로 남을 도우는 일이.. 대단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자기도 스스로 못 일어선 사람이, 어떻게 남을 도우겠습니까?

 

여러분, 율법적 신앙생활이란,

자꾸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노력/분투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복음적 삶의 본질은 아닙니다.

 

▲복음적 삶이란, 자꾸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 단점, 과거, 약점.. 이런 것을 자꾸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런 나의 문제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셨고,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자기 옛사람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목표해서 살아갑니다.

 

자꾸 바라보면, 닮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항상 교제하다보면, 자기 내면이 점점 변화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과거처럼 '다리 무는 것'(죄성)을..

자기 본성적으로 하기 싫어지는 때가 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sweet and easy and nice 해 지는 것입니다.

 

▲저는 로마서 6, 7, 8장을 이해하는데, 수년이 걸렸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이해하는데도, 수년이 걸렸습니다.

이제 제가 수년에 걸쳐 겨우 이해한 것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갈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여러분들은, 모두가 바울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율법이 여러분께 소리치고(설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여러분을 얽어매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적인 접근을 하게 하기 위해,

마귀는 사력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적인 종교를 갖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아닙니다.

그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가 그(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와 깊고 친밀한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함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종교 relig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합니다.

‘종교’에는 율법적 뉘앙스가 강하게 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인격적 관계relationship’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사실상 본질적으로 율법적입니다. 인격적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도 종교적으로 믿으면.. 율법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과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 수 있습니다.

저는 프레드 같은 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재갈을 물렸지만, 내면적 본성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존재 말입니다.

 

평생 외적인 선을 행하고, 오래 기도하며, 매년 성경을 읽고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며, 또 새로운 것을 착수하려고 합니다.

그것들이 진정으로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단지 의무나 외식으로, 또한 남을 의식해서 행동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늘 지치고 힘겨운 것입니다.

 

▲저도 한 때 ‘프레드’ 같은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좌절을 겪어봐서 잘 압니다.

‘다리를 깨무는 것’은 제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그것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좌절한 나는, 계속 새로운 규칙과 새로운 결단을 스스로 내려 보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작심삼일 식의 계속된 실패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내 노력으로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예수님만 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내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주님과 교제합니다. 주님과 동행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합니다. 오직 거기서 나오는 힘이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자기를 바꾼다는 뜻은,

결국 주님/말씀과 가까운 교제, 친밀한 동행을 의미하는 듯)

 

'은혜'는 죄를 지을 수 있는 핑계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약4장에, 우리의 약한 본성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4:6

 

▲종교는 규정과 법으로 우리를 구속합니다.

그러나 구속만 할뿐, 그 규정과 법을 지키는 데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과거에 제가 그런 율법적인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매우 잘 가르쳤습니다만

돌이켜보니, ‘복음으로 변화된 new nature’ 에 대해서는 거의 못 배운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변화된 신분이 과연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것은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옛 본성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꾸 옛 본성을 율법적으로 재갈을 물리는 것이 아니라

새 본성을 추구하면,

옛 본성은 자연히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 음성 듣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자신 있게 말하십시오.

성경을 그대로 믿고, 믿음으로 그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크리스천들은 ‘내가 지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 라고 말하십시오.

이것이 성경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변화된 새 본성new nature을 가질 것이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변화된 새 본성을 가졌다’고 말하고 믿으십시오.

 

▲갈2:20절에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고백을 하기 까지는, 예수 믿고 20년이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회심은 약 28세, 그가 갈라디아서 기록할 때는 약 48세였습니다.)

 

저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6, 7, 8장을 이해하는 데는 수 년 이상 걸렸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렇게 묻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어떻게 죄 중에 더 살겠느냐?” 롬6:2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너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롬6:11

 

바울은, 앞으로 점점 자기가 개선되어, 죄에 대해서 죽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자기가 죄에 대해서 죽은 몸임을, 믿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을 저지를까 너무 두려워서

개줄에 묶여 재갈 물려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보십니까?

아니면 그런 것에 대해서 죽은 사람으로 보십니까? (여기십니까?)

 

(그렇게 인정하고, 그렇게 여기다 보면.. 점점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적 삶입니다.

절대 그렇게 인정하지 못하고, 절대 재갈이 없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

율법적, 비복음적 삶입니다.)

 

여러분, 프레드처럼 유혹을 강하게 받는 다면,

예수님께로 달려 가십시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품에 안겨

그 안에 거하면, 모든 것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롬6:11절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생각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롬6:12

 

여러분, 이렇게 되려면 우리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 내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지 않고,

내가 죽었으니까, 이제 내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눈으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새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도 보이고

남의 다리를 쳐다보더라도 깨물고 싶은 프레드의 본성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시험이.. 시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만 가능합니다.

 

▲같은 원리로, 저는 예수 안에서,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더 이상 기름부음을 받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기름부음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발을 구르면서 기도했습니다.

또 그 기름부음을 유지하려고, 사람들과 함부로 만나는 것도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을 믿으니까, 제가 자유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니까,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긴장을 풀고 삽니다. 내가 기름부음 받은 것을 믿음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저는 교회에서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일들을 많이 하고자 했습니다.(공로주의)

그러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잘못임을 제가 압니다.

‘그냥 하나님과 좋은 관계에 있으면, 이것 저것을 안 해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인정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 당신이 좋은 직장을 갖고 있는 고액연봉자이든지

당신이 막노동자이든지 혹은 실직자이든지

‘예수 안에서 완전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정신으로 안 믿어지겠지만,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믿어집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이렇게 수 만 명 청중들 앞에서 설교하고 다니지만,

사실은 고졸 출신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떳떳이 말합니다.

‘나는 예수 안에서 제가 당당하고 온전한 자’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나>라는 사실입니다.

저도 과거에 율법적으로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좋은 아내가 되려고 했습니다.

말씨가 고분고분한 상냥한 여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수록, 뭔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자지만, 목소리가 좀 걸걸해서, 전화 목소리만 들으면

사람들이 제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을 잘 못합니다.

물론 저는 보통 여자들처럼, 상냥한 목소리를 갖기 원합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저는 걸걸한 목소리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저는 한동안 ‘목사님의 사모님’(상냥한 목소리 소유자) 흉내를 내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을 불쌍히 동정하는 인내심 많은 연약한 여자처럼 연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너 무슨 문제있는거니?’ What's wrong with you?

 

상냥하고 친절하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도리어 나도 불편했고, 상대방도 불편해 했습니다.

저는 그냥 걸걸한 남자 목소리 그대로 말하고,

여자지만, 약간 거칠게 언행하는 제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디오로 제 설교를 들었던 어떤 사람은,

6개월 동안이나 제가 남자 설교자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하나님이 이 특이한 목소리를 제게 주셨다고 믿습니다.

상냥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설교하기에 어쩌면 적합한 목소리인지도 모릅니다.

설교 내내 상냥한 여자 목소리로 하면, 어쩌면 사람들 귀에 거슬릴지도 모릅니다.

(전통적으로 설교자는 거의가 남성이었으니까요)

 

여러분은 웃겠지만, 제 목소리 문제는 제게 매우 심각한 고민/열등감이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호텔에서 전화로 아침식사 배달을 주문하면

“알겠습니다. 미스터 마이어!” 라고 대답하면 정말 화가 납니다.(저는 여자거든요)

 

2주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얼굴 관리facial care를 받으려고 전화했더니

“당신의 얼굴에 콧수염, 턱수염 있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남자 목소리 때문)

 

저는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이제 저는 그런 문제가, 제게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고 당당한 자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열등감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뭐라고 생각해도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처럼 비슷하게 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사람이, 자기 목소리 때문에 열등감 가질 필요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중보기도 은사를 받아서 그런지

아침 5시에 기도를 시작하면, 서너 시간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사람과 똑같이 기도생활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율법에 얽매이지 맙시다.

그는 그이고, 나는 나인 것입니다. 자유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방식과 스타일, 시간에 대해.. 남에게 배울 필요는 있지만,

내가 기도하는 방식과 스타일이, 남들에게 율법(의무)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저는 어떤 자매의 기도스타일에 항상 경쟁적으로 따라하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늘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울음이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발버둥쳤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자기 마음에 큰 상처가 있어서 늘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녀가 너무 영적이라서 울면서 기도한 줄 알았던 것입니다.

기도도 ‘율법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자유해야 합니다.

 

▲하루는 제가, 존 맥스웰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항상 그렇게 행복하고 친절하십니까?”

(저는 항상 그렇지 못하니까, 당신하고 제가 너무 비교가 되어서 기분 상합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식사할 때도, (표정관리인지) 항상 미소 지으면서 먹습니다.

모르죠, 저도 조엘 목사님처럼 큰 교회를 목회할 때가 온다면

아마 그 분처럼 24시간 미소 짓고 다녀야 할 때가 올 지 모르겠습니다만

괄괄한 제가, 누구처럼 24시간 미소짓고 다니기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요지는, 그냥 자기 있는 모습 그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온전한 자가 되었는데,

더 이상 남들 흉내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부러워서, 그들을 따라서,

괄괄한 제가, 상냥한 목사님의 사모님 흉내 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한 번은 제가 존 맥스웰 목사님께 살짝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은 정말 항상 그렇게 친절하고, 항상 그렇게 행복하십니까?”

 

그의 대답이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제 타고난 성격입니다.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일 뿐입니다!”

저는 그의 대답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여러분 규칙적으로 성경 읽고, 독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거운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과 깊은 교제’입니다.

그 교제 가운데서 성경을 읽고, 독서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루에 몇 장씩 규칙적으로 정해 놓고 읽는 것도 좋은 습관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하나도 못 듣고, 성경만 수 십 장 읽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여러분, 어떤 초신자는 하루에 단 5분만 기도하면서도

(보통 사람이 누리지 못 하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 5분 기도’ 한다고, 누구를 비웃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퍼 크리스천’들은, 이런 초신자를 쉽게 비웃습니다.

 

고후3:16,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이것은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성령에 의해 인도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공동체에 의해서 인도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하는 그대로 따라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는 변화transfigured 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고전3:17~18

 

성경 말씀을 읽고서, ‘이것을 해야지, 저것을 금해야지’가 아닙니다.

‘주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질수록, 주님을 더욱 닮고 싶은 것입니다.

 

▲결혼식 할 때 보면, 신부가 면사포(veil)를 쓰고 들어옵니다.

혼인이 선포되면, 신랑은 신부의 면사포를 걷어올리고, 그녀와 입맞춤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신부가 한사코 면사포 걷어올리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 결혼식이 엉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고전3:15~18절에 바울이 말씀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의 면사포’를 걷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되신 예수를 face to face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여러분, 일생을 율법적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율법의 면사포veil를 걷어 올리고, 항상 그리스도와 교제, 동행하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유로운 신앙 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 깊은 교제, 동행 가운데,

우리가 죄와 율법을 향하여는..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게 되고

의와 하나님을 향하여는.. 자신을 산 자로 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힐송 컨퍼런스, 조이스 마이어 *출처 동영상 보기           [주제별 분류] 율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