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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영원합니다 1721

LNCK 2009. 1. 31. 19:32

◈사랑은 영원합니다                 고전13:7~12               설교 스크랩

 

 

◑예수님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마8:17

 

2005년에 KBS TV『인간극장』에 <내게 너무 예쁜 당신> 이라는 제목으로

한 부부가 소개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 칠을 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 유금옥 씨가 20미터 사다리차에서 페인트 칠을 하다가

추락하는 큰 사고를 당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아내는 4년 동안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 이길수씨는 그 아내가 언젠가는 깨어날 것을 믿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수발을 합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아내가 기적적으로 깨어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 그것뿐이었습니다.

아내는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합니다. 그녀의 정신 연령은 5살짜리 꼬마 상태입니다.

 

그런 아내를 남편 이길수 씨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7년 동안 병수발을 합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위해서 파마도 시켜주고, 얼굴 마사지도 해주고,

예쁘게 화장도 해주고,

그녀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서 별의 별 곳을 다 데리고 다닙니다...

 

▶담당한다. 짊어진다는 뜻

저는 이 인간극장에 나오는 남편을 보면서<담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짊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담당한다>,<짊어진다>는 것은 아내의 병과 연약함을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로 여기며 돌봐주는 것입니다.

그 병을 없애고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헌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과 연약함을 짊어지신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하고 병든 것을 책망하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시며, 병들고 연약한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우리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감당해 주십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과 연약한 것을 다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대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가져 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친히 담당하시는 사랑>, <짊어지시는 사랑>입니다.

 

▶마술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을 <기계적> 혹은 <마술적>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아픈 것도 없고 힘든 것도 없고,

그저 비행기에서 구호품을 뿌리듯 치유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위치를 올리면 켜지고 내리면 꺼지는,

모자를 향해서 얏! 하면 비둘기가 나오는 그런 식의 사랑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담당하고 짊어지시기 위해

연약하고 병든 육신의 몸으로 친히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라는 뜻입니다. 마8:17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 4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참고, 믿고, 바라보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사에 <모든 것 always>이 4번이나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랑은 항상 참고, 항상 믿고, 항상 바라고, 항상 견디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는 ‘항상’을 4번 다 번역하고 있습니다.

 

①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여기서 <참는다, 스테게이>는, <지붕을 덮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모든 허물과 실수를 덮고 가리워 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항상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못하고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그런 때에도 변함없이 인격적으로

상대방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그 실수와 잘못을 마구 들추어서

두 번, 세 번 죽이는 것이 아니라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참는다’를 <보호한다, protect>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잘못이나 죄악에 대해 단순히 침묵한다,

그냥 넘어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 어떤 허물과 실수, 심지어 심각한 죄악 앞에서도 놀라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몹쓸 말과 행동 앞에서도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헐크'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헐크를 보고 놀라 경악했습니다.

그는 너무 위험해 보였습니다. 이런 그를 제거하기 위해 특공대를 보내고,

기관총을 쏘고, 헬기에서 미사일도 발사했습니다. 그래도 안 죽고 더 날뛰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여자 친구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 변함없이 다가갔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총탄이 빗발치는데

오히려 그를 보호하려고 달려갔습니다.

 

미쳐 날뛰는 헐크를 바라보며 그녀는 "날 바라보세요.. 내 눈을 보세요.." 했습니다.

이 여인 앞에 헐크는 더 이상 날뛰지 않았습니다.

사실 가장 놀란 사람은 헐크 자신이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며 그는 변화되기 위해서

자신을 치료할 과학자를 계속해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총알과 대포를 무지 무서워하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인은 이런 그에게도 변함없이 함께하고, 보호해주고, 변화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것이 <모든 것을 참는 사랑>입니다..

 

②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로서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믿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믿을만한 때에야 왜 못 믿어주겠습니까?

<믿기 어려운 때 믿어주는 것이 ‘모든 것을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세 번이나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영적 지도자가 될 것을 믿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세 번이나 찍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믿어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며

초대 교회 지도자로 그를 세워주셨습니다.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남자는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후에 예수님께 목숨을 바쳤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님처럼 똑바로 박힐 수 없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③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여기서 <바란다>는 것은 <밝은 마음으로 끝까지 소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고

항상 소망적으로 봅니다.

 

눅13장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한 과원지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은 3년 동안이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왜 땅만 버리느냐며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라며

나무에 대한 소망을 거두어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소망을 갖고 두루 파고 거름을 주는 투자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그는 우상 판매업자요, 자식 하나 없는 75세 노인이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큰 민족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의 소망을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명의 땅인 가나안에 간지 얼마 안 되어 힘들어져

이집트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또한 그는 그곳에서 아내를 누이로 속이며

자기 살 궁리나 하는 이기적인 남자에 불과했습니다.

 

그 후에도 자식 빨리 안 준다고 하나님께 데모를 하지 않나,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는 13년이나

거의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을 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보면서도 처음 가졌던 소망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 99세,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17:1

 

그리고 이름을 '고상한 아버지'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소망이 있으니까 책망도 하고 이름도 바꾸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소망이 깨어지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항상 가지고 기다려주고 투자하는 것>입니다.

 

④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여기서 <견딘다> 는 것은 헬라어 <휴포메네이> 로서 <뒤에 머문다>,

<끝까지 남는다 stay behind>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픔과 고통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견디면서

그 사람 곁에 끝까지 남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잘 견디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함께 지내다보면 부딪히는 것도 있고 서로 맞추어야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서로 충돌하거나, 손해를 보거나, 자존심이 상하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런 것을 견디느니 차라리 혼자 지내겠다며 혼자 밥 먹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영화보고, 혼자 놀러가는 <나홀로족>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갈수록 이혼이 많아지는 이유도 결국 이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런 아픔과 고통을 겪으면서 결혼 생활을 견뎌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서 배우자와 자녀들을 떠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견뎌야할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핍박당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면서 죄악 되고 이기적인 자신이 깨어지는 아픔이 있고,

때로는 공동체에서 사람들과 갈등하며 고통하기도 합니다.

 

전도하면서 또 양들을 도우면서 무시 받고 오해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아픔과 고통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그 사람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고, 주님 <주신 사명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끝까지 남는 사랑하면 누가 떠오릅니까?

구약의 룻이 떠오릅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룻1:16~17

 

하나님께서 이 사랑에 얼마나 감동하셨는지, 이후에 룻을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잘 아시지요? 그에게 엄청난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여기서 ‘떨어진다’는 것은 나뭇잎이나 꽃이 떨어지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파릇파릇하던 잎도, 아름다운 꽃도.. 시들해지고 언젠가는 떨어집니다.

어찌 꽃뿐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들,

지금 우리가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다 그러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예언, 방언, 지식>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모릅니다.

이런 것으로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며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여기며 사모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폐하고 그치고 떨어지는 날이 옵니다.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부분적으로 알던 지식, 부분적으로 하던 예언,

하나님과의 부분적인 대화인 방언도..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다 폐하여 집니다.

 

여기서 <온전한 것>은 <완전한 것, 최후의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최후에 완전하게 임하게 될 예수님과 그분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때가 되면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주어지고

예수님과 온전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부분적인 지식과, 예언과, 방언은 필요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것과 이 세상에 관계된 것은 다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떨어지고, 그치고 폐하여질 <돈, 성공, 명예>를

영원한 것처럼 추구하고 사모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나마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조차도 <언젠가는 떨어질 많은 물질,

심리적 안정과 평안, 성공과 자기 영광을 얻고자하는 방편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을 보면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아직 친구나 부모를 생각할 줄 모릅니다.

 

또한 자신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아이들이 겸손한 것 같지만,

실상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거나 뭔가 다 안다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무엇이 가장 귀한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장난감이나 딱지에

최고의 가치를 둡니다.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사모하고 집착합니다.

 

장성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반대입니다.

자신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되고, 어떻게 대접받고 이런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09.01.04. 인터넷설교 스크랩                                [주제별 분류] 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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