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9

풍랑의 목적 1722

LNCK 2009. 2. 1. 07:35

◈풍랑의 목적               막4:35~41                 -블로그 스크랩, 출처-

 

 

◑1. 겸손한 사람이.. 믿음을 가집니다.

 

▲겸손한 사람이 믿음을 가집니다.

제자들은 심한 풍랑이 몰아치자, 막 가라앉을 것 같은 배에서 심하게 두려워합니다.

제자들 다수는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 출신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예수님을 깨우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코앞에 다가오자 비로소 그들은 교만을 버립니다.

평생 어부생활을 해 왔던 그들이지만,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까지 와서야

자존심을 버리고 결국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호수를 평온하게 하시고 그들의 약한 믿음을 꾸짖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자신을 버리는 겸손이 바탕이 되어야합니다.

그랬으면 일찍,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을 것입니다.

 

▲겸손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저도 처음엔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려 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긴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강론이나 강의를 할 때, 저는 주님께서 함께 해 달라고 기도하고

제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을 미리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위해 하지 않으니 떨리거나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15:5)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머무는 것이 기도입니다. 겸손과 믿음의 증표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주무시고 계신 그분을 깨워 대화하고 도움을 청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지면

살아가면서 단 한 순간도 그분의 존재를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만하면 물에 빠집니다.

아기들이 물에 빠져죽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부모가 함께 있어주며 보호해 줍니다.

 

그러나 조금 컸다고 혼자 물장난을 하다가 익사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다는 그 믿음, 그래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말 두려워 할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가 무슨 일을 저지를 줄 모르는 아기를 항상 주위에서 돌보는 것처럼

주님께서 항상 옆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겸손해야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지가 아닐까요?

 

▲너무 늦기 전에 일찍 주님을 깨워야!

성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젊었을 때 마니교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까의 기도에 힘입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았나이다.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있었나이다.”

 

절망과 회의 방탕과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그 가운데에 하느님의 빛, 하느님의 영이 함께 계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일찍 하느님을 깨달았더라면 죄도 덜 지었을 것이고,

하느님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했을 것이라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물이 배에 가득 차고 난 뒤에야 주님을 깨웠습니다.

만일 미리 깨웠더라면 더 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혹시 아직도 주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우구스티노성인처럼 주님을 떠나 내식으로만 살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면 빨리 주님께 나아와 기도드리고

다시금 복된 삶을 살도록 마음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2. 풍랑을 통해, 내 믿음이 단련됩니다.

 

▲급박한 상황인데

복음에서 어둠에 묻힌 호수를 건너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센 돌풍을 만납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는 표현은 막4:37

일행이 처한 상황이 얼마만큼 절박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긴박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자고 있습니다.

 

▲주님은 잠자고 계시는 듯합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도 이 세상에서 이와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역경과 빠져 나갈 수 없는 곤경에 처하여

우리는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잠자고 있는 듯한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합니다.

 

더군다나 처한 상황이 절박하고 긴급할수록

더 깊은 ‘하느님의 침묵’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주님은 침묵하신다

하지만 ‘잠자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부재’나 ‘신은 죽었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자 예수님은 일어나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는 말 한 마디로 상황을 반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침묵하는 하느님을 만나면.. 사람들은 절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에 자비로운 이유가 있음을 믿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인생의 바람과 파도는 늘 우리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때때로 하느님이 나의 삶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도

그 때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필요한 때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3. 주님의 보호를 의심하지 맙시다.

 

▲기가 차는 아들

다섯 살인데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머리가 좋은 꼬마가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서점에 가요!”

 

“응? 서점은 뭐하게?”

 

꼬마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계속 졸라대기만 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할 수 없이 꼬마를 데리고 서점에 갔고,

꼬마는「어린이 양육법」이라는 책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엄마는 책의 제목을 보고서 궁금해 하며 물었지요.

“우리 아들, 왜 그 책으로 골랐어?”

 

그러자 태연한 표정으로 이 꼬마가 말했다고 합니다.

“응? 내가 올바로 양육되고 있는지 조사해 보려구!”

 

당찬 아이의 모습이지요?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에구 우리 아기 똑똑하기도 하지..’하면서 칭찬하시겠습니까?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기에

결코 좋게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하느님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을 때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호를 의심하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들과 언제나 함께 하면서

계속해서 많은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고 계신데,

이에 반해 우리들은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을 던지고 있을 뿐입니다.

 

돌풍을 만난 제자들이 자고 계신 예수님을 향해 던지는 말처럼 말이지요.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막4:40

 

그러면 주님이 원하신 제자들의 모습은

‘자로 가나 모로 가나 천국 갈 것이니, 두 다리 쭉 뻗고 잠이나 자자!’ 였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당장 내일이면 처형당해 죽을 날인데,

감옥 속에서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잤습니다. 행12:6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안달복달 했을까요? 아마 태연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보면, 사실 자기가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이 해 주신 일들입니다.

그런데 야곱 자신은 일평생 안달복달 하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며 고백했습니다.

 

제자들은 반드시 풍랑에서 구해졌을 것입니다.

‘장차 사도행전에 일어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 풍랑과 문제가 일어날 때, ‘아예 잠 자버리는 것’도 한 가지 해결 방법이 되겠습니다.

단, 여기에는 주님이 ‘그럴 만한 믿음’을 주셔야 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썹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믿음’ 말입니다.

 

‘너희에게 믿음이 없느냐?’며 책망 받았던 베드로는 막4:40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됩니다. 행12:6

 

 

◑4. 모든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제자의 길에는, 기적도 있지만 풍랑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풍랑이 일기 시작하는 시간에, 날이 어두워져 가는 시간에

주님은 호수를 건너가려고 하신 것인가?

 

본문의 앞뒤를 다른 복음서와 함께 살펴보면 해답이 나온다.

이 풍랑 이야기 앞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있고,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가 있다.

 

다른 복음서에는 장정만 해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따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가 열두 명, 칠십 명으로 줄어들고

마지막 골고타에서는 그나마도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주님의 말씀과 기적 앞에서는 그렇게 넘쳐나던 사람들이

풍랑 앞에서는 하나 둘씩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는 비난과 핍박, 적대와 음모라는 풍랑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통해 가라지와 알곡을 추려내고 계시는 것이다.

 

곧 제자 되기를 원하는 자가,

그 풍랑과 큰 물결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주님은 보신다는 것이다.

 

▲고통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인생의 앞길이 어두워지고 풍랑이 일고 큰 물결이 일어날 때

나는 친구의 이 말을 떠올린다.

 

진통제로도 잘 듣지 않는 통증으로 고생할 때

의사인 친구가 전화로 들려준 말이다.

‘육체의 모든 통증에는 끝이 있다!’

 

그렇다. 어둠도 풍랑도 큰 물결도 반드시 그 끝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어찌하여 고통의 끝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풍랑은 있지만,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그러나 막상 중요한 것은 기적보다 제자들에게 ’아직도 없는 믿음’(40절)이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막 태동한 그리스도 교회가

바다 위의 배와 같이 돌풍과 풍랑에 시달리는 모습을

마가복음 저자가 미리 내다 본 것일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배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승선하여 계시다는 것이며,

바람도 바다도 모든 자연도 하느님 통치의 손길 안에 있으며,

이들도 하느님 현존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5. 임종의 풍랑을 아름답게

 

K씨는 폐암으로 수술·방사선 치료·항암제 치료를 받고 지내던 중,

다시 재발하여 항암제 치료를 하는 2년 동안 2차·3차 약까지 사용했고

신약도 사용해보았지만 점점 악화되었다.

 

“항암제 치료가 듣는 것 같지도 않고 정말 힘든데 더 해야 할까요?”

라고 나에게 물었다.

이제 항암제 치료도 효과가 별로 없고 무엇보다 식사도 잘 못하는 정도라면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마무리를 잘하여

남아 있는 시간을 귀하게 써야 한다고 권했다.

 

그리고 호스피스 완화 의료 프로그램에 등록하면

환자에게 통증을 포함한 증상완화치료를 적극적으로 하고

정신적·영적 고통도 상담을 통해 환자와 가족에게 도움을 드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환자와 가족은 너무나 힘들게 지내왔기 때문에

솔직하게 모두 이야기 해준 것에 감사하고 오히려 편안하다고 말했다.

 

L씨도 역시 폐암 환자였고 오랫동안 항암제 방사선 치료를 받아오다

뇌로 전이되어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었다.

오랜 투병 생활 중에 나와 친해진 L씨는 어쨌든 치료를 받으면

계속 생명이 연장될 줄 알았고, 점점 몸이 꺼져가는데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환자가 정말 말기임을 알렸고

그 이유는 자신을 정리할 시간이 없이 임종을 맞게 되면

너무 큰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끝까지 투병 의지를 불태우던 환자는 너무나 실망하고 식사를 잘 못하더니

며칠 뒤 사망하고 말았다. ‘내가 잘못 말한 것일까?’라고 자문해 보았지만

너무 늦게 이 사실을 알려준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죽음이 임박해 오더라도, 두렵더라도 주님의 사랑 곧 호스피스에 의지하면

그 두려움은 잠잠해지고 평안한 가운데 아름다운 임종을 맞을 수 있다.

호스피스 완화 의료는 가톨릭 수도회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종교와 관계없이 말기 환자를 돌본 데서 시작되어

이제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우리나라도 곧 제도화되어 보험급여가 될 전망이다. <모두 펀 글, 정리

 

[주제별 분류] 고난의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