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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있는 곳이 거룩한 땅! 1764

LNCK 2009. 2. 25. 23:28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거룩한 땅!              신11:8~12           2009.02.01.설교 녹취

  

명당자리, 목 좋은 곳, 편한 자리 찾아다니며 헤매지 말고,

지금 내가 터전 잡은 그 자리를.., 명당(하나님 임재의 자리)으로 만들어야...

 

'환경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말하지만,

더 깊이 보면, '그 사람이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킨다.                      *이 부분 관련글 보기 -클릭-

 

 

◑하나님이 주시는 땅은 열악, 척박하다.

 

▲세상에서 가장 열악한 땅 가나안

①카나다canada 는 자연 경관이 정말 아름다운 땅이다.

그런데 이름이 비슷한 카나안canaan은 자연 경관이 별로 좋지 못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면, 카나안보다는, 차라리 카나다가 더 이름에 걸맞다.

 

 

한반도가 70%가 산이듯이, 가나안 땅도 대부분은 半사막지대, 건조한 광야이다.

요단 강변 등 가나안의 일부분은 아름답지만, 나머지 땅은 대부분 황무지다.

아주 쓸모없는 땅으로 가득 차 있다.

 

②아주 쓸모없는 황무지라도,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중동국가에 매장된 수많은 원유들,

또한 칠레 역시 황무지가 많지만, 국토 전체가 거의 구리로 뒤덮여 있다.

순도 98%의 구리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으므로, 살살 걷어내서 팔면 된다.

 

③지하자원이 없으면 땅 덩이라도 넓든지...

중국, 미국, 러시아, 호주 등은, ‘덩치’로 한 몫 한다.

그런데 가나안은, 크기도 쬐끔이다.

 

④그리고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얼마나 많이 득실거리는지..

남쪽에 애굽, 북쪽에 앗수르와 바벨론, 헬라와 로마 등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가나안 땅이 너무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 땅은 비옥하지도 않고,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도 아니고,

지하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렇다고 넓은 땅도 아니다.

모든 조건이 열악하면, 주변 환경이라도 편해야 되는데,

항상 강대국의 중간에 끼어서, 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불리한 조건만 다 갖춘 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그런 가장 악조건 속으로 인도하셨는가?

 

▲똑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위의 ‘가나안 땅’과 비슷한 환경으로 인도하실 때가 많다.

 

온 땅의 주인되신 풍성하신 하나님이

자기 자녀인 우리들을, <광야 같은 세상>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풍성하신데, 때때로 우리 성도의 삶 가운데는

모자라고, 어렵고, 힘든 상황을 경험하게 하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오히려 노예로 살던 애굽 땅이, 환경이 좋았다.

애굽의 모든 농사는, 전적으로 나일 강에 의존했다.

해마다 나일 강이 범람해서 주변 삼각주에 신선한 토양을 공급했다.

또한 나일 강의 풍성한 수자원이 있어서, 농사하기에는 적격이었다.

햇볕은 쨍쨍하고, (그러면 보통 물이 없는데) 물은 나일 강에서 한없이 대었다.

 

하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은 ‘애굽의 삶’과 같다.

애굽 사람들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자기 몸을 써서 물레방아를 돌리는 만큼, 물을 얻을 수 있었다.

힘들게 애를 써서 농사를 짓는 만큼,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결과는.. 자기 노력에 비례했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은, 강 가까이에 자리 잡기 원했다.

강 가까이에 있는 땅이 값비쌌다. 물 대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더 좋은 땅을 선점하려고 애를 쓴다.

좋은 목을 잡아야, 사업이 잘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은, 거기 사는 사람에 따라 좌우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일 강변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살게 되어있다.

애굽 땅이.. 열심히 자기 노력으로 사는 땅이라면,

가나안 땅은..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야 하는 땅이었다. 천수답이었다.

하늘에서 비를 주시면 농사가 되는 거고, 하늘에서 비 안 주시면 농사를 망쳤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되었고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면... 그냥 그대로 황무지가 되는 땅이었다.

 

그 땅은.. 거기 사는 사람이 합당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고

거기 사는 사람이 불의하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황무지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명당자리 찾아다닐 필요 없다.

 

‘복의 근원’인 성도들이 머무는 그곳은.. 어디나 명당자리가 된다.

아무리 명당자리에 자리 잡아도,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면.. 금방 황무지로 변한다.

 

▲여호와의 눈이 그 위에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11:12

 

여기서 ‘돌보신다’은 옛날 성경에는 ‘권고하신다’고 번역하기도 했는데,

원래 뜻은, ‘추적한다. 조사한다. 돌본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눈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찾아가고 추적하며 돌보신다’ 이다.

우리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따라가신다.

 

하나님은 <땅>에 관심 있으신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사는 <사람>에게 관심 있으시다.

 

▲그러니까, 땅의 문제가 아니다. 그 땅 위에 사는 사람의 문제다.

우리는 땅(환경)의 문제를 중요시하게 여긴다.

환경이 좋으면 성공하고, 환경이 열악하면 실패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바는, <땅>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다.

 

우리 하나님의 눈이 <특별한 땅>을 감찰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땅을 밟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감찰하고 계신다. 돌보신다.

 

▲여호와의 눈은,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를 찾으신다.

사람을 찾으신다. 이 아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

 

지금 내가 밟는 땅이 기름지지 않아도 괜찮다.

위치가 좋지 않아도 괜찮다.

번화가가 아니라도 문제없다.

 

하나님의 눈이 나를 감찰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기만 하면,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베풀어주시기만 하면.. 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날 <유리한 땅, 기름진 땅>으로 옮겨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하나님의 눈에 드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더 좋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서, 열심히 땅을 찾아다닌다.

그래서 대기업, 증권가를 세울 때, 아무 땅에 그냥 세우는 것이 아니다.

보통은 ‘지관’(풍수지리 전문가)을 초빙해서, 땅을 살피고 난 후에 이사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땅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임을 알고 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지, 땅에 매달리지 않는다.

 

 

◑지금 네가 일하는 여기가 가장 거룩한 땅이다!

 

제가 칠레 안데스 산맥 자락에서 외롭고 힘들게 선교사 생활을 계속 하던 때였다.

하루는 출애굽기 3장을 큐티하고 있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5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이런 내적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네가 일하고 있는 그 곳이, 가장 거룩한 땅이니라’

 

그날 아침, 중요한 깨달음이 왔다.

그렇다. 자꾸 더 좋은 곳을 찾아다니려 해서는 안 된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다면,

지금 바로 그 곳이 <거룩한 땅>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한다는 사실을, 오늘 내가 확신한다면

지금 내가 일하는 이 곳은, <거룩한 땅>이라는 것이다.

 

내가 외로운 안데스 산맥 고원에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하나님의 계획 속에/훈련 속에 있음을 확신하고..,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벧엘 들판의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막막하고 황량한, 고립무원의 들판이었다.

돌베개를 베고 자던 그 밤에, 야곱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사다리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벌판은, 황량한 광야가 아니었다.

그는 즉시로 그 자리에 제단을 쌓고,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 그 땅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었다.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자기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창28:16

 

▲요셉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는 곳이, 모두가 명당으로 변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 가면.. 그 집이 복을 받았다.

그가 감옥에 가면.. 감옥이 형통했다.

그가 애굽 총리가 되니.. 나라가 태평했다.

(위 경우의 정반대 현상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적용

오늘도 수많은 사역자들이, 자기 자리를 옮기고 싶어 한다.

90%는 잘못된 생각일 것이다.

다른 곳에 옮겨봐야, 더 힘들어질 것이다.

 

문제는,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느냐는 것이다.

임재가 없으니까, 오늘 내가 있는 자리가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확실히 있으면

안데스 산맥 자락에서 내가 느낀 것처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거룩하게 느껴질 것이다.

예사 자리, 고생만 죽도록 하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만 확실히 임하면

황량한 벌판, 야곱처럼 쫓겨 가는 장소라도,

그 자리에서 돌베개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경배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므로, 야곱처럼 자기 장래에 대해 안심할 것이다.

 

<09.02.01. 설교 녹취, 축약    *원제목 : 하나님이 돌보시는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