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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소서 1785

LNCK 2009. 3. 10. 19:59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소서      요5:30~47        설교 스크랩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본 이유


오랫동안 제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영적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니, 예수님 당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 신성모독죄로 몰아 십자가에 죽인 것을 보았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면, 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았을까?

예수님이 정규 신학교를 다니시지도 않으셨고,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문도 들리고,

"내가 하나님이다!“ 하고 나설 때,

나는 예수님인지, 이단자인지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참 답답해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당시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알았고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을 보고도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1.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요5:38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잘 지킨다고 자부하지만

겉으로만 “말씀! 말씀!”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알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을 안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안에 없음을 알았도다.  5:42

그들이 종교를 앞세운 이유는,

그것을 통해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고, 어떤 이득을 얻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분을 유지하고 세상 영광을 얻는 도구로 여긴 것입니다.


▲3. 세상 영광에 너무 취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43~44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제사장도 아니고 바리새인도 아니고 서기관도 아니고,

무식한 나사렛 출신에다가 목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들이 취해야될 백성들로부터의 존경과 인기를

예수라는 친구가 가로채 가버리니... 화가 단단히 난 것입니다.

자기들의 가르침에는 졸던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귀가 번쩍 뜨이자

자기들의 인기가 침해 당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사람의 영광 밖에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인정 받고, 존경 받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그들이 원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세상 영광만 추구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고

오직 세상만 추구하고 사람의 영광을 더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성경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세상이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임재/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지금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신지/안 계신지 아는 눈이 뜨이려면

마음의 주인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주인 삼아서 살면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함께 계신 예수님을 도무지 알 수가 없고, 그 반대편에 서기 쉽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려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사람인지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는지를 한번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려면, 이 점을 점검해야 합니다.

마음 속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영광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를 큰 소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람만큼도 섬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돈 만큼도 믿지 못합니다.

사람의 영광, 돈의 위력을 더 사랑하다보니.. 가까이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놓칩니다.


어려운 미자립 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목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게는 역사하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만 있어도, 이 어려움을 견뎌나갈 수 있을텐데요!”

 

마찬가지로 이것은 많은 성도들의 안타까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더 크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옆에 있는데,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을 보지도 못하고

여러분의 말을 듣지도 못한 채, 두려워하고 외로워하거나 잘못된 길을 간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는 주님의 안타까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인사하지만,

예수님을 두고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인사하면 안 됩니다.



◑일상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완벽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의 꾸준한 경건의 훈련이, 주님과 더 깊이 있는 만남으로 나를 인도해 줄 것입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세상 영광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 곁에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믿음으로, 발견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쟌느 귀용 부인의 깨달음

최근 깊은 은혜를 받으며 읽는 책이 있습니다.

쟌느 귀용 부인이 쓴 [순전한 사랑]이라는 책입니다.

쟌느 귀용 부인은 17세기 사람으로서 성직자도 신학자도 아니었지만

앤드류 머레이, 워치만 니, 허드슨 테일러 등과 같은 위대한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던 정말 경건한 예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귀용 부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몸부림치며 주님을 갈망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거룩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나아지고 있는지, 철저히 자기를 점검하고 또 살폈습니다.


그러나 헛되고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노력으로 거룩해지려고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노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필요하다 하더라도)

무거운 삶을 짊어진 채 주님을 찾으면서 동분서주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쟌느 귀용 부인이 프란시스코 수도회 수사 한 분을 만나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며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가 귀용 부인에게 답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귀용 부인의 영적인 눈이 뜨였습니다.

뜨거운 사모함, 열망, 안타까움이 다 주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녀는 그 수사에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경건하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것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주님이 영혼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에는 몰랐습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

영국과 백년 전쟁에서 조국 프랑스를 구한 오를레앙의 처녀 쟌다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은,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늘상 밭갈던 들녘이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주님을 만난 자리도, 그가 늘 일하던 보스턴의 한 구두 가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메섹을 향하여 늘상 다니던 길 위에서였습니다.

 

모세는 양 떼를 몰고 늘상 다니던 광야 길목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무의미하게 세월만 반복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대할 것도, 소망할 것도, 바라볼 것도, 뭔가 신날 것도 없는

그런 삶의 일상 한 가운데였습니다.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매일의 일상적인 삶의 길목에 서계심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일상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침실에서, 주방에서, 사무실에서, 출퇴근 길에서,

어디서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조건이 있다면 오직 하나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만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진심이어야 합니다!


제게는 예수님을 더욱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얼마 전 간절히 그 기도를 했었습니다.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소서.” 그 때 주님께서 마음에 물으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체험하면 제가 교만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백했습니다.


'지금보다 예수님을 더 체험한다면 교만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교만할 것이기에 예수님을 더 보여 주시지 않으신 것이라면

지금 이 은혜로 충분합니다.’


아무리 은혜를 사모한다 하여도 욕심으로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사라지고 염려가 없고 그저 좋았습니다.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어떤 환난과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히 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저는 군에 가거나 유학을 가는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언제나 함께 계시는 주님을 보게 하소서!” 라고 축복합니다.

미국 유학 가는 제 딸에게도 그렇게 축복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그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은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누리시면 됩니다.

여러분 마음에 정말 “예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더 이상 세상 사랑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던 저렇게 하시던 주님이 함께 계시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그 기도를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시험도 문제도 십자가도 이길 힘이 생깁니다.

무거운 짐은 다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가정 핍박, 중병, 사람들의 비판, 경제적인 어려움, 어떤 시험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무엇이 여러분의 눈을 가리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까?

세상과 사람의 영광으로 가리워진 눈을 가지고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07.03.25. 인터넷 설교 스크랩                                                 ▣ 그리스도의 임재 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