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과 돌, 생선과 뱀 마7:7~12 -설교 스크랩, 출처-
,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리라
이 구절은 너무 유명해서, 이제는 믿지 않는 사람조차도
가령 예를 들어 연애가 잘 안 된다, 여자가 나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할 정도로, 대중적으로 좋은 격언이 되어버렸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막10:38
▲不死는 구했는데, 不老 구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여러분, 로마 신화에 새벽의 여신의 이름이 오로라입니다.
그 여신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티토노스라는 멋진 청년을 사랑하게 되는데,
너무 사랑에 빠져서 제우스신이 왔을 때, 선물을 구하게 됩니다.
자기의 애인 티토노스의 불사不死를 구합니다.
그래서 제우스가 티토노스가 죽지 않게 해 줍니다.
그런데 오로라가 그만 깜빡 한 것이 있어요. 불노不老를 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죽지는 않고, 완전히 쭈그렁 할아버지가 돼서 계속 자기 옆에 있어요.
오로라 자기는 신이니까 아무 문제없죠.
그래서 오로라가 생각 끝에 애인이었던 티토노스를 매미로 만들어 버립니다.
▲뭘 뜻합니까.
가령 예를 들어 우리 아이가 대학을 들어가면 좋겠다고 챙기면,
하나님 보실 때, 그 아이를 위해 챙겨야 할 것들이, 그 외에 한 두 개가 아닙니다.
대여섯 개가 있는데, 우리는 하나(입시)만 보고 챙깁니다. 나머지는 다 못 챙겨요.
불사를 얻었는데 불노를 잊어버려 낭패를 당하다가, 결국 매미신세가 된 것처럼,
나머지 내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챙기려다가, 그래서 간신히 챙겼는데,
보니까 다른 것 대여섯 개가 모자라서.. 결국 내 자식이 매미 꼴이 됩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신화 아닙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결국은 오로라 꼴이 되어버린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대학을 떨어지게 해서
7~8가지를, 즉 일석 칠조 팔조를 챙기실 수가 있고,
내게 병 한번 나게 해서, 여러 가지를 얻게 하실 수가 있는데,
우리 구함과 우리 찾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누락시키고,
내 욕심을 따라서 한 두 가지만 집중적으로 구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 기도대로 잘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제우스신은 나쁜 신이죠.
나쁜 신이니까, 달라는 대로 다 주죠.
그래서 결과가 더 비참해지고 말았죠. (매미)
그러나 우리 하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나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매미 꼴이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 찾는 것이 잘 이루어 지지 않아요.
마7:12절을 아무리 암송하며 기도해도.. 잘 응답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우스신처럼 무책임한 신이었다면 우리가 구하는 것 다 이루어 주셨겠죠,..
▲그래서 기도로 뭘 구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아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시지만
하나님은 어떤 입장에서 내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를 바라시는가요?
내가 갖고 있는 기준대로 ‘좋다는 것’을 포기 할 때.., 에덴이 시작 되요.
내게 좋은 것이 무엇이라고 고집하고 있는 동안... 생지옥이 시작 되요.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고아가 입양되었다가, 다시 고아원에 되돌려 보내진 사연
▲입양 되었어도, 계속 고아로 살았던 아이
제가 아는 목사님이 아들을 둘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고아원에 가서, 아들들보다 더 큰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입양한 아이를 데리고 사는데, 식탁위에 과자를 두면 없어진대요.
보통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없어지는데, 한꺼번에 다 없어지더래요.
입양한 아이가 와서 과자를 통째로 다 들고 간대요.
아버지가 불러서, ‘과자는 네가 다 먹으면 얼마든지 또 살 테니
놔두고 동생들과 같이 먹으라’고 타일렀대요. 그런데도 계속 그런대요.
식구들은 ‘그냥 놔두고 먹으면 되는데, 저걸 왜 가지고 가는지’ 모릅니다.
고아원에서 과자 놔두면 순식간에 없어지잖아요.
서로 뺏던 고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이것은 아직 그 아이가, 아버지와 어머니로 진정 받아들이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결국 이 아이는 고아원에 돌려보내졌어요.
너무 다른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이 안 좋아서.
고아적 습관이 몸에 배니까 구하는 게 달라요.
그냥 아빠가 줄 건데,
자꾸 자기가 챙겨서 가지고 들어가는 행위가 연장되고 확대되면서,
가정에서 부모와 함께 살 수 없는 아이로 취급을 받았어요.
안타깝게 들은 얘기입니다.
▲이처럼 안타까운 것이, 바로 우리 실정입니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할 때
‘너희 아버지께서’ 라는 이 말이 나타내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고아적 습성이 떨어져 나가서
고아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고아적 습성이 벗어졌나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태도가... 아버지가 안 주실 것 같이 여겨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내용이... 고아들처럼 의식주 위주로 구합니다.
그래서 진짜 자녀다운 모습도 없고, 의식도 부족한 것이.. 우리 현실 아닙니까!
▲‘내가 돈을 좀 벌어야 하겠습니다, 내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죠?
그런 것이 잘 못되면,
‘하나님 당신이 내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나는 믿지 못하겠으니,
식탁 위에 있는 과자를 다 가져가는 것처럼 나는 이것을 구해야만 하겠습니다.’
하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우리 아이가 반드시 대학에 꼭 들어가게 해 주셔야겠습니다’ 라는 기도도,
자칫 잘 못하면,
‘나는 하나님이 내 아이에게 아버지가 되셔서 보호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믿지 못하겠습니다.’ 라는 식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 못 나오면 사람 구실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십분 이해하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아들은, 대학 떨어져도..(붙으면 더 좋지만) 큰 걱정 안 합니다.
아버지가 또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아들의 길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 대부분의 기도가
‘아들’이 아닌 ‘고아’ 입장에서 아주 절박하게 부르짖는 것인데
그러다가 진짜 ‘고아원에 되돌려 보내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이에!
결국 우리의 기도내용을 따지고 보면
밤새도록 철야기도하고, 금식 기도를 했지만,
‘아버지! 아버지! 나는 절대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로 삽시다!
▲신분은 자녀인데, 구하는 것은 고아처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내일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걱정이 안 생겨야
자녀 의식을 갖는 거예요.
그런데 걱정이 생기지요. 내일 일이 자꾸 걱정이 돼서
‘어떻게 먹고 살까, 우리 아이가 대학 못 들어가면 어떻게 사나?’
이것은 뭘 반증하는 것이냐?
<나는 아직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고 있는
고아적 습관을 갖고 습성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겁니다.
▲탕자처럼, 돈을 미리 달라는 사람들
‘아버지 내일 돈을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까지 아버지라고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필요한 물질을 아버지가 다 알아서 주실 텐데.. 말입니다.
밤새 기도하면서 물질축복 달라는데,
사실은 적절한 때가 되면 주실 것을,
오늘당장(미리 당겨서)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탕자가 미리 당겨서 받아간 사람이잖아요.
결국 ‘매미’신세가 된 것이죠!
하나님이 어떻게 들으시느냐 하면,
‘나를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주머니에 계속 채워주시옵소서... 하니까
좋다, 과자를 통째로 다 줄 테니까,
이제 너는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라.
나도 너를 아들로 삼기 힘들고, 너도 나를 아버지로 인정하기 힘드니,
고아원으로 가라!’ 하기 쉽다고요.
그래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추라기 응답 받고도
원하던 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얻고 나서,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까!
▲고아 눈에는 돈이, 아들 눈에는 성령이.. 좋게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눈에 ‘좋은 것’ 은 무엇일까요.
고아 입장에서 보면.. 돈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확보된 돈이 있고, 은행 잔고가 그득하면 든든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 입장에서 보면,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누가 복음 보면 성령이라고 나와 있어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13
▲왜 성령이 내게 제일 좋을까요?
자녀로 된 사람에게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의 아버지다움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돼요.
금요일이면 저희 아들이 꼭 저하고 붙어서 자려고 하는 날이에요.
토요일 새벽에 안 나가니까 그걸 알고,
자다 보면, 제 다리 한 짝을 붙잡던지, 팔 하나를 붙잡던지
어디 하나를 붙잡고 자고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 마음에 흡족할 때 까지
이 큰 얼굴 구석구석에 뽀뽀를 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이렇게 될 때까지는,
그 아이에게 아버지는 나를 무조건 받아준다는 신뢰가 생길 때까지
자기 나름대로 경험이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이렇게 느껴지면 끝납니다.
하나님이 진짜 친 아버지로 느껴져서,
아버지로 느껴지고 아버지가 알려지기만 하면 여러분은 인생이... 끝납니다.
걱정하는 인생, 불행한 인생, 염려하고 노심초사 하는 인생은... 끝납니다.
▲문제는, 여러분에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기가 막힌 삶을 살도록 허락하셨는데,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지지가 않는 것이죠.
그러므로 제일 좋은 것은, 돈이고 건강이고, 출세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로 느껴지는 것이 제일 좋은 겁니다.
아버지 다리 붙잡고 자는 아들이
세상에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이상하게 서양이건/동양이건, 모든 황제가 다 ‘하늘의 아들’임을 자처합니다.
중국은 황제를 천자라고 해요. 일본은 천황이라 하고.
로마도 결국은 그들이 황제숭배를 강요한 이유가
시저가 ‘하늘의 아들’이라고 강조한 때문입니다.
황제는 군사를 다 통치합니다. 재물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뭐가 부족했는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은
‘하늘의 아들’이 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한을 주시니,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실제 삶은 마치 ‘고아’처럼
땅 몇 십 평/아파트 몇 십 평 정도를 얻기 위해,
평생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망각한 채로, 자기 신분을 소모하며 살고 있어요.
▲이런 것이 제대로 표현되고 발휘된 사건이,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나와 같이 되기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실제로 아그립바 왕이 불쌍하게 보여야 해요.
전두환 대통령을 너무 욕해요, 운동권 학생들이.
너무 저주하듯이 욕하는 것은 콤플렉스를 반영한다고 내가 말했어요.
자기네는 정의를 위해 한다고 하지만, 정말 정의를 위하면,
전두환 씨가 그렇게 대통령이 된 사실에 대해 불쌍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여움은, 높은데 있는 자가 낮은 데 있는 자에게 갖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아그립바 왕을 보는데, 사도바울 마음이 너무 안 됐어요.
왕이 됐다고 다 얻은 줄로 알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 안 됐어요.
정말 불쌍하다고 하면 자존심 상할 까봐. 당신도 나처럼 되기 원한다고 하죠. 행26:29
▲자녀로 부른 사람들에 대해 아버지의 역사는 두 단계입니다.
①첫 단계는, <아버지로써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단계>로 섭리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아버지에게 마음을 집중하게 하시려고
이것도 막으시고, 저 일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②그 다음 이게 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실감하게 된 사람>한테,
하나님이 본래 하늘에서 계획하셨던, 긍정적이고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때가 바로 ‘나의 공생애 기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공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이때부터 진정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완전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는 것이라도
아버지의 뜻이니까 좋은 거라고 믿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면,
이제 그때부터 하나님이 본래 갖고 계시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우리의 공생애가 시작되고..,
(우리의 죽음이 십자가처럼 ‘다 이루었다’가 되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아버지로 실감합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무조건 하나님을 아버지로 실감할 수 있다면
만사가 다 OK인데, 실감할 수 있기 위해,
누가복음에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데, 성령’이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실감할 길이 없어요.
십자가 사건이 내게 실감되지 않은 이유가
내 안에 성령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진짜 내 안에 살아 움직이면서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조난당하고도 두렵지 않은 이유
내 마음이 마치 방수처리된 것처럼, 남편/자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흡수가 안 돼. 일이 내 마음에 빨려 들어오지가 않아요.
조난당한 사람들이 지금 다같이 물에 빠져 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에 연결된 사람들은,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요.
하늘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러나 연결이 안 되고, 물에 빠진 사람은, 죽을까봐 겁을 잔뜩 먹고 있어요.
남편은 큰 사고가 생기고, 자식에게도 큰 문제가 생겼는데도,
아내의 입장/엄마의 입장에서 그들의 조난당한 문제에 다가가는데
아무런 그 문제를 흡수하지 않고, 하늘의 기운이 차서 밀고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가 나의 죽음으로 깨달아질 때 느껴질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느껴지겠어요?
내가 줄로 하늘에 연결된 것이 어떻게 느껴질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오셔야 하나님이 아버지로 실감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좋은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지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고,
그 다음엔 좋은 것이 없어요. 그 다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질 거예요.
그러니 뭔 남편에게/자식에게 바가지 긁고, 스트레스 줄 필요가 없습니다.
엄마가,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지면 돼요.
자녀에게 세상의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요구가 없어져요.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지기만 하면..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이 편안해져요.
여러분 중에, 이미 실감하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고 찾고 두드리다 보면.. 되는 날이 있는데,
남편으로부터 뭘 받아서 행복을 느끼려 하지 말고.
남편에게 짜증내는 모든 사람들은, 아직까지 뭔가 기대가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남편이 주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주시니까.
그래서 성령 받은 아내는.. 바가지 안 긁습니다.
▲내가 부족한 것이 없으니까, 이제 다른 사람 부족한 것이 보여요.
‘내 배 불러야 머슴 배고픈 것 안다’는 말이 있죠.
하나님이 아버지로 실감나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말썽쟁이 남편을 봐도,
‘아, 저 사람이 나름대로 힘들구나, 못 견뎌서 저러고 있구나’
하는 것이 보여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아내는, 바가지 긁는 대신에, 남편을 위로하게 됩니다.
그런 남편은 다 잘 됩니다. 가정도 천국이 되고요!
▲이 설교 제목은 ‘떡과 돌, 생선과 뱀’입니다.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줄 아비가 누가 있으며,
자녀가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부모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축복달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데
그래서 밤새 기도하다가 우리는 성령을 받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설교 스크랩, 정리. ▣ 기 도
'분류 없음 > 2008'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 죽음의 침묵 1817 (0) | 2009.03.30 |
---|---|
부활이란 무엇인가? 1815 (0) | 2009.03.28 |
대령숙수의 고집 (0) | 2009.02.26 |
거울보다 망한다 1755 (0) | 2009.02.19 |
같은 모양의 다른 두 길 (0) | 2009.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