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죽음의 침묵 왕하 18:17-37 -08.10.03.설교 스크랩-
그러나 백성이 잠잠하고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왕하18:36
◑자궁 속 침묵, 세상 속 울음
▲사람은 울음으로 시작해서, 결국 울음으로 수렴됩니다.
어느 시인의 말에 의하면 모든 언어는 울음으로 수렴될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의 자궁 속에 있던 태아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세상속의 빛을 보게되자마자
첫 번째로 내는 소리가 울음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빛을 보면서.. 세상속의 빛을 본다는 것은
이제 그 어린아이는 살아가면서 엄마/아빠를 보게 되고
또 크면서 친구와 학교 선생님을 보게 되고, 세상에 나가서 사업을 보게 되는데,
그런데 이 세상속의 빛을 볼 때, 처음에 내는 소리가 울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그 아이가 내게 되는 모든 분노의 소리
욕망과 야심의 언어, 또 심지어는 기쁨의 언어 기쁨을 표현하는 환희의 언어
걱정의 언어, 근심의 언어, 이 모든 언어의 뒤를 캐고 뒤를 캐고 캐어서
결국 끝을/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울음이라는 겁니다.
웃고 있어도 궁극적인 출발점이 울음이요,
근심하고 있어도 울음이요, 울고 있어도.. 결국 시작과 끝이 울음이라는 겁니다.
모든 생각과 언어의 궁극적인 출발점과 수렴점이 울음이라는 내용입니다.
▲반면에 자궁 속은 침묵
세상에 태어나 세상속의 빛을 본 아이가 첫 번째로 내는 소리가 울음이라면
반면에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 태아 그 아이의 언어는 침묵이라는 겁니다.
그 침묵의 의미가 뭐냐면
완전한 만족이라는 것이에요. 완전한 만족!
태아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으면서 양수로 둘러싸여있어 거칠 것이 없습니다.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체온과 양수의 온도가 똑같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살 때, 더위와 추위를 번갈아 느끼지만,
거기는 자기와 똑같은 36.5도의 양수가 항상 자기를 보호하고 있어
자기를 잊어버릴 정도로 만족합니다.
완전한 만족이 침묵이라는 언어 속에 담겨있다는 것이에요.
▲사람은, 태아적 울음을 일생 반복하며 삽니다.
그런데 태아가 태어나자마자, 세상속의 빛을 보자마자 운다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정치인이 되어서 정치를 하든지,
철학자가 되어서 인생을 논하든지,
사업가가 되어서 사업을 경영하면서도,
사람들의 모든 언어가 결국은 그 근원을 따지자면 태아적 울음이며,
결국 울면서 살다가, 울면서 인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태아의 울음이, 그런 자기 일생을 내다보는.. 그런 울음이라는 것입니다.
뭔가 만족함이 있지 않아서 울고, 뭔가 부족해서 울고, 뭔가가 맞지 않아서 울고...
다 이루어진 것 같아도 허무해서 울고, 사람은 일생을 울면서 삽니다.
자식이 잘되면 끝인 줄 알았어요. 좋은 대학가면 잘 되는 건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또 울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도, 그래서 기뻐하는 것조차도.. 잠시고, 결국은 울음입니다.
잠깐 기쁨으로 착각되고 있지만, 근원이 울음이며, 수렴점이 울음입니다.
◑본문 해설
▲랍사게의 모욕적 언어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금을 벗겨서 조공으로 다 바칩니다.
그러다가 앗수르의 이 위협을 막기 위해서 애굽에 손을 뻗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히스기야가 애굽에 손을 뻗으려고 할 때,
이사야서 30장에 보면 그러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대신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의지해라고 합니다. 30:2, 7
그런데 히스기야가 애굽에 손을 뻗어요.
성군 히스기야가 어떻게 이지경이 됐냐? 이겁니다
하여간 애굽에 손을 뻗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화가 났어요.
그래갖고 유다나라를 다시 침공해 들어옵니다.
유다나라를 포위하고, 그 부하 랍사게 장군을 보내서
이제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유다의 항복을 강요합니다.
그때 랍사게가 항복을 강요하면서 하는 말들이, 너무너무 굴욕적인 말들을 합니다.
히스기야가 말하기를, 너희가 믿는 신 여호와가 너희를 구원한다 할지라도 믿지마라.
이제까지 앗수르에 대항해서 이겼던 나라가 없었는데,
그 나라에는 신이 없는 줄 아느냐? 다 나름대로 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신들이 앗수르 왕으로부터 자기나라를 구하지 못했는데
너희 유다나라의 신 여호와가 어떻게 앗수르 왕의 침공을 막고 너희를 지켜줄 수 있겠느냐?
히스기야가 지금 거짓말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지켜준다고 말할지라도 절대 믿지 말아라.
오히려 항복하면, 앗수르 왕이 너희를 잘 대우해 줄 터인데
왜 그렇게 무리수를 두느냐 하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앞부분에서 랍사게가 이렇게 얘기해요.
너희가 군사력이 있냐? 아니면 너희가 동맹을 맺은 애굽은
나일강의 썩은 갈대 지팡이와 같은데, 애굽이 무슨 힘이 있어 너희를 도와주겠느냐?
그리고 또 말합니다.
이미 너희는 모든 신들을 다 제거해 버렸다.
산당을 제거해버리지 않았느냐?
히스기야가, 바알신도 아세라신도 몰록신도 다 제거해버려서
이젠 너희가 의지할 신도 마땅히 없지 않느냐?
결국 너희의 지역신 여호와 하나 남았는데, 무력한 신일뿐이다
그런 얘기를 해요. 그리고
너희가 우리가 이렇게 포위하고 둘러싸고 있는 동안에 먹을 게 없어서
너희의 대변을 먹고, 너희의 소변을 먹고 말것이다
▲침묵하라는 히스기야
이렇게 모욕을 하고 자극적인 말로 도발을 하는데
히스기야 왕이 명령을 내립니다.
모든 백성들이여 랍사게의 선동적인 도발적인 이런 말들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말고 침묵하라!
이 침묵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침묵은, 다시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하나님의 자궁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마치 태아가 탯줄을 통해서 어머니로부터 계속 영양공급을 받듯,
하나님의 자궁 속 모태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끝없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침묵’으로 돌아간 히스기야
히스기야 왕이, 처음에 앗수르에 조공을 주다가, 다시 애굽을 의지하다가,
<이제는 하나님 뿐이다>로 마음이 변화된 과정을 한번 추적해 봅시다.
▲북이스라엘 멸망으로 마음이 녹아내린 남유다의 히스기야
여로보암의 길로 계속 가던 북왕국 이스라엘이
(남왕국 히스기야 때)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가 살만에셀에 의해서 포위당하면서
3년 뒤에 망하고 맙니다.
그 3년 동안 사마리아가 포위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결국은 뭐예요?
안전하신 하나님 안에 있던 히스기야가 세상에 눈을 돌려서 빛을 보게 됩니다.
그때부터 울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품속에만 있다가, 비로소 세상속의 빛을 보기 시작하면서
3년 동안 계속 그 소식을 듣다 보니까
‘사마리아가 포위되었다. 포위되어서 먹을 게 없단다. 먹을 게 없어서 망한단다.
결국 3년 동안 그것을 보고/듣고 하는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앗수르가 결국에는 사마리아를 다 먹어 버렸어요.
이때 남유다 히스기야의 마음도 같이 정복되어져 버린 것이에요.
그래서 유다나라까지 아직 도달도 하지 않았는데
미리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치게 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의 금을,
그 성전기둥에 입혀져 있던 모든 금을 다 벗겨서 조공으로 바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살아계신 것이 마음에 느껴진다면
하나님 임재하시는 곳의 금을 벗겨다가 앗수르 왕에게 갖다 줄 수 있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이 훨씬 더 강하신 분이요, 세상의 주인이신데
앗수르 왕에게 성전의 금을 벗겨서 갖다 줄 수가 없지요.
▲세상속의 빛을 보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태를 떠난다는 의미)
세상의 일을 보고, 세상의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그 보고 있는 것이
형제나 남편/아내든지, 직장동료, 사장 등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강 건너 불처럼 볼 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뉴스에서 여러 가지 내용이 나오는데
그게 다 나랑 직접적인 관계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것들을 계속해서 보고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동안에
내 마음이 세상속의 빛을 보면서 와~앙 우는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에요.
우는 마음으로!
세상속의 빛을 보면 울게 되어 있습니다.
잠깐 웃고 있는 그 사람의 속에도 울고 있는 거예요.
▲예로, 마릴린 먼로가 처음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너무 기뻐했을 것이에요.
그러나 두 번 받고, 세 번 받고.. 몇 번 받았는지 그건 제가 모르겠어요.
결국은 자살을 하고 맙니다.
사진에 나오는 그 웃음이 어떤 웃음이었습니까?
울음에 먹히고, 울음이 도사리고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잘된다고 하는 것들이
결국은 다 울음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는 웃음이라는 겁니다.
언젠가는 그 근원적인 울음에 먹혀버려
그래서 주님께서도 뭐라 그러셨어요?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셨죠.
계속해서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신앙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영원히 그런 곳으로 가게 됩니다.
▲계시록 21장에 마지막 재림하신 예수님에 의해서 회복될 그 나라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아니하리니.. 계21:4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누릴 때에도
눈물이/울음이 없어지는 세계를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로 믿는다는 게 뭡니까? 침묵으로 들어간다(울지 않는다)는 거예요.
랍사게가 이제 곧 침공해 들어올 기세를 가지고 항복을 권유하는 말속에
너무너무 모독적이고 위협적이고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무시무시한 언어들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또 랍사게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요.
진짜 앗수르의 세력 앞에서 견뎌냈던 민족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는.
그러니까 벌벌 떨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많은 궁리를 하게 됩니다.
앗수르 왕에게 투항하면, 먹을 것을 준다는데.. 살길을 열어준다는데..
땅과 토지를 허락하겠다는데..
우리가 여기서 망할 필요가 뭐가 있겠냐? .. 많은 생각이 날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히스기야왕이 침묵을 명합니다.
이 침묵의 의도가 뭐예요? 여러분 믿는다는 건, 딴 게 아니죠.
하나님의 생각의 자궁 속에 있다가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에 대해서 깜깜한 상태로, 세상속의 빛 속에 살아갑니다.
울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울면서 살아가다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침묵하기 시작합니다. 죽었음을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뭐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이세상속의 빛에 대해서
이 세상속의 빛에 대해,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죽었다는 사실은 뭘 말하는 겁니까?
(신약에 내가 세상의 빛이요 라고 말씀한 것과는 구분 필요)
◑침묵은.. 십자가에서 죽을 때 가능
▲침묵은 ...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의미
이 세상에서 보이고 들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죽었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진정한 침묵이 되는 거예요. 생각까지도 멈춰지는 게 침묵 아닙니까?
말만 안하고 생각은 계속 돌아가는 건.. 침묵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침묵을 회복한다는 것이예요.
죽음 사람은..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침묵이 이루어질 때,
이세 상에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에 대해서 침묵이 이루어질 때,
즉, 십자가에서 내가 죽을 때,
드디어 어디로 들어갑니까? 다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됩니다.
히스기야가 침묵을 명하고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속의 빛을 보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이세상의 자식을 보고 있는 동안.. 엄마는 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세상의 남편을 보고 있는 동안.. 아내는 울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 기쁨이 있을지라도 순간이요, 울음을 바탕으로 한 기쁨일 뿐이에요.
진정한 기쁨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음을 고백하면서
이 세상속의 빛 자체에 대해서/내가 보고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음을 고백해버립니다
그 때가 <침묵의 상태>입니다.
▲히스기야가 당한 상황이 지금 뭐에요?
군사력을 기댈 수도 없고, 동맹군을 기대할 수도 없고,
다 막혀버렸어요. 이 세상에 있는 것 다 막혀버렸어요.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가 첫 번째 내린 조처는 “침묵하라!” 였습니다.
하나님께 들어가려면 침묵해야된다 라는 걸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려면/하나님과 연합하려면/하나님께 의지하려면
내 생각을 침묵해야 되는 것이고
침묵하려면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 방법밖에는 없는 겁니다.
▲적용 : 나의 침묵
눈 앞에 자식이 보입니다. 그러나 안 봅니다.
그러기위해서 마음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에요.
십자가가 뭐예요 침묵의 자립니다. 세상속의 빛이 다 끊어진 자리예요.
세상 빛 속에서
자식을 보고/남편을 보고/사업을 보고/경제상황을 보고/
증권동향을 보고/환율을 보고있고/ 모든걸 보고있는 동안에
우리마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응~애하고 우는 것처럼
울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이세상의 눈을 닫으세요.
‘나는 죽었다’를 선포하세요!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만 붙잡는 겁니다.
‘나는 죽었다/죽은 자에게 생각이 있을 수 없다/
죽은 자에게 느낌이 있을 수없고/ 죽은 자에게 바램과 소망이 있을수 없다/
자식에 대한 소망/ 남편에 대한 소망/ 사업에 대한 소망/ 경제적인 소망/
다 있을 수 없다! 나는 죽었다!’ 하면서 침묵합니다.
▲하나님의 개입, 평강을 주심
침묵하며 히스기야처럼 오직 하나님 앞에만 서 있노라보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면서 세상 빛이 차단될 때
드디어 천국의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천국의 빛이 내 마음에 비치기 시작해요.
세상에 태어날 때 세상 빛을 보게된 첫 순간에 모든 신생아들이 우는 것과 반대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세상에 대해 침묵하고, 세상속의 빛에 대해 눈 닫아버리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하늘의 빛을 보게될 때
마치 어머니 자궁속에 있는 아기처럼.. 편안함과 평강을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개입하시자
세계 모든 나라들이 무릎을 꿇었던 앗수르가
약소국 남유다 히스기야 앞에서 패망하여 물러갑니다.
천사를 보내사, 하룻밤 사이에 18만5천명이 살해되었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부하에게 피살됩니다. 왕하19:35~37
하나님이 개입해서 깨끗이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참된 평안은 어디에 있나?
좋은 대학을 가서 안전함을 느끼고
좋은 마누라를 만나 결혼을 잘해 안전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만 안전함을 느끼고 있는 동안에
나를 껴안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이 땅위에서의 삶의 터전위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해 가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치를 실현시켜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태아의 침묵과 신생아의 울음> 이 두 단어를 묵상하시면서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시며
하나님 자궁 안으로 들어가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08.10.03. 설교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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