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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용서 1799

LNCK 2009. 3. 18. 19:07

◈용서                       마18:23~27                      -설교 스크랩, 출처보기-

 


◑용서는 ... 어렵다


▲용서에 미숙한 두 사람, 신애와 박도섭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얘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이 영화는 한국 지성계는 물론, 한국 교계에

<구원이란 무엇인가? 과연 용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략의 줄거리는 생략하고, (재외동포를 위해 맨 하단 처리)

교도소에서 살인범 박도섭과 신애의 만남의 대목은,

<과연 용서가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져 주었었다.


드디어 살해범 박도섭과 신애가 만난다.

신애는 그에게, ‘자신이 주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며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전해주러 왔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의 말에 박도섭은 고맙다며 자신도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께 회개하자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자신도 비로소 맘의 평화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 말에 신애는, ‘(피해자인)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냐?’며 반문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충분한 준비도 없이 용서를 시도하는 신애>에 대해서는 안쓰러움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용서를 말하는 박도섭>에게서는 가증스러움을 느낀다.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신애와 박도섭 둘 다, 용서에 대해 미숙한, 우리 모습이요 자화상이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운운하면서 사랑과 용서를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 둘 사이에서 진정한 용서가 일어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비단 영화 ‘밀양’에서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용서 - 머리로 알지만,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우리 기독교도들은 ‘사랑과 용서’라는 말을 설교에서 많이 듣기 때문에

용서라는 말에 아주 익숙하고

용서에 대해, 비교인들보다 훨씬 더 용서를 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당신은 용서의 사람인가?’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 나를 포함해 우리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대부분 교인은, 자기가 ‘용서의 사람’이라고 여긴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설교를 듣고/기도를 할 때면,

내게 상처준 이를 용서하기로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사람을 보면 미워지고, 갑자기 마음이 상하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나(설교자)는 과거에, 학교 일로 어떤 선배 교수님과 한 번 다툰 일이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회개했고, 내 마음속에 다 정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우연히, 그 선배 교수님이 마주쳐 내게 다가올 때,

내 몸은, 그냥 그 분을 피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분명 용서하기로 기도까지 했는데, 그 분을 보자 내 몸은 이미 돌아서있었다.

의지적으로 용서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나의 이런 경험은 내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과연 나는 용서의 사람인가?...’

이후 나는 용서가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연구하기 시작했다.


▲공지영, 죽는 남편을 보면서도 용서가 잘 되지 않더라!

소설가 공지영 씨도, 용서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공지영 씨는「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라는 산문집에서

자기 남편이 작고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가 죽는다는데.. 어쩌면 그(남편)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나를 모욕하고, 나를 버리고 가버렸던 날들만 떠오르다니...

그리고 그의 죽음보다도 더 당황스러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저의 진실이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쉬운 용서의 길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남편이 죽는다는데 용서는커녕

자신에게 준 모욕과 상처가 떠오르는 것이 당황스러웠다는 공지영씨의 솔직한 고백은

심지어 <죽음 앞에서조차 용서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 마음의 상처 때문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용서가 힘든 것인가?

그 이유는 마음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달마대사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 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니..”


마음이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도저히 그 인간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맘이 오그라드는 것일까? -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아 맘이 오그라든 탓에 용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공지영 씨도, 아마 자기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 죽는다면

얼마든지 그 앞에서 그를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는 친밀했던 남편에게서 받은 상처이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쉽게 용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특별히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뭘까?

지나가는 아저씨와 부딪혀서 문제가 생긴 것이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운 식구나 가까운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다면 용서하기 어렵다.

한때는 다정했던 사람, 신뢰했던 사람이 상처를 주었기에

바늘조차 꽂을 수 없을 만큼 맘이 오그라든 것이다.



◑용서의 잘못된 해결책


▲보복... 꿀보다 달콤하다

이럴 때 보통 가장 빠르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보복이다.

요즘 복수라는 주제를 가지고 엽기를 넘어서 막장극 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내의 유혹>이라는 드라마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복수가 꿀보다 달콤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단기간으로 봤을 때, 복수가 용서 보다는 쉽고 달콤하며

때때론 상처가 치유될 수도 있기에

일상생활에서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도 내에선

차라리 복수가 상처를 해결하기에 좋을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말을 안 하면, 나도 모르는 척 하고 말 안 하는 것이다.

그러면 큰 문제가 생기진 않으면서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이고 인간의 인지상정이다.

물론, 보복은 올바른 처방이 아니다.



◑용서의 올바른 해결책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크리스천이라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요구하시는지

우리는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  마18:21~22

어느 날 베드로는 용서에 관해 예수님께 묻는다.

예수님 당시의 랍비들은 3번 용서하라고 가르쳤다. 사실 3번 용서도 힘들다.

그런데 베드로는 랍비의 가르침을 넘어서 ‘7번 용서할까요?’라고 물었는데

랍비가 3번이면, 베드로 생각에는 ‘7번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산 넘어 산이었다.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한다. 산술적인 의미 이상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수의 정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나를 따르는 자는 용서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강조한 것이다.


▲1. 용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 용서해야... 진정한 용서가 가능하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용서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진정한 용서는 한 번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7번씩 70번 용서하라는 것도... 계속 반복해서 용서하라는 뜻도 내포한다고 본다.


하나님은 한 번에 용서하실 수 있겠지만, 인간은 절대 한 번에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와 사랑에 관해 평생 연구한 미국 풀러신학교의 윤리학 교수인 루이즈 스미스

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저는 어느 날 우리 동네 경찰관 말로니가, 별 이유 없이 제 막내아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분노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경찰관 때문에 며칠을 집 안에서 큰 소리를 치며 살았습니다.


그를 용서하지 못하면 제가 비참한 사람이 될 것 같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정말 용서했습니다. 저는 서재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

‘말로니 경찰,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어느 날, 순찰차를 타고 가는 그를 본 순간

저는 다시 그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왜냐면 다시금 분노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번째 용서였기에 조금은 쉬웠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경찰관이 난폭한 행동으로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소식이 제게는 꿀보다 달았습니다. 마치 제가 보복을 한 것처럼 달콤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저는 ‘그를 다시 한 번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를 완전히 용서하기 위하여

과연 몇 번 더 용서해야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한 차례가 아니라, 계속 용서하면서 진정한 용서에 이른다는 주제의 글)


▲ <결단의 용서>로는 부족하고, <정서적 용서>까지 가야한다.

물론 용서를 하기 위해 결단을 해야 한다.

용서의 감정과 느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기에

‘용서하기로 자기가 결정해야 한다’고 윤리학자들은 말한다.

이것을 <결단의 용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용서를 결단한다고 해서, 쉽게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그 사람을 보거나 유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미운 마음이 다시 들기에, 용서하기로 하는 결단은 쉬워도

정서까지 바꾸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머리부터 가슴까지는 인생이 가야할 가장 긴 길’이라고 하지 않나?

가슴을 변화시키는 용서를 해야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사람에 대한 분노, 두려움, 적개심 옆에

그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긍휼을 베풀고 사랑을 보이는 긍정적인 정서를 병치시켜서

긍정적인 정서로, 부정적 정서를 대치시키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에 대한 좋은 기억/좋은 감정을 계속 품고, 나쁜 기억/감정은 누그러뜨리는 것)


이런 과정을 오랜 동안 강하게 지속시키면

가해자에게 복수를 꾀하지 않고 선의의 감정을 가슴에 품게 되는데

이 때 비로소 온전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을 학자들은 <정서적 용서>라고 부른다.


이런 정서적인 용서가 있어야 비로소 몸이 뒤따른다.

우리가 용서한다고 결단을 해도, 몸 자체가 용서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걸린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를 한다 해 놓고 또 다시 내가 용서하지 못했구나..’

‘나는 용서할 줄 모르는 실패자나 위선자!’ 라는 느낌이 들면서

또 다시 자기를 비난하고, 상처 위에 상처를 가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2.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면 인간이 용서를 결단하고 (결단의 용서)

정서적인 용서의 과정을 겪으면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인가? (정서적 용서)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무리 결단을 하고 애를 써도

인간의 노력으로는 진정한 용서란 불가능 해 보인다.


마18:23~27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1만 달란트 용서받았기 때문에,

1백 데나리온 빚진 이웃은 당연히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만약 그가 ‘하나님께 1만 달란트 빚을 졌다’는 의식이 없다면

이런 의식이 없기에 그는 용서를 할래야 용서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란,

내가 엄청난 양의 빚을 탕감 받았다는 빚진 자의 의식이 있지 않고서는

결코 남을 용서하며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인식하고 그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면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일화 :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의식으로 살아가는 목회자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한 목회자의 삶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영등포역 근처의 쪽방에서 1987년부터 교회를 세우고 노숙자를 섬기고 있는

임명희 목사는「절망촌 희망교회」라는 그의 자서전 같은 책에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한번은 예배드리는데, 교회 찬송소리에 술 맛 덜어진다며 끌려가 뭇매를 맞은 일,

자기 부인이 가출하자, 목사부인과 자야겠다며 칼 들고 들어 온 사람으로부터

쇠파이프를 들고 자기 아내를 지켜낸 일..


나는 그분께 감동을 받고 몇 번 신학교에 모셔 설교를 들었었는데

나 또한 그분에게 설교청빙을 받아, 광야교회로 찾아가게 되었다.

거기는 설교를 잘 못하면, 노숙자들이 ‘너나 잘 하세요’라고 소리 지른다고 한다.


가보니 낮은 한 30평쯤 되는 1층 집 안에 70-80여 명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교회 안의 1평 남짓 하는 목사님 사무실에 가봤더니

한 3개월 되는 영아가 누워 있었는데 15살의 미혼모가 낳았다고 한다.


목사님은 나에게 우리 교회는 특송하면 너도나도 하겠다고 하기 때문에

중간에 잘라야 한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그랬다.

한참 후 아까 그 영아의 미혼모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특송하겠다고 하니

뒤의 할머니가 “이년아! 크게 얘기해!” 라고 하여 얼마나 놀랬던지...

정말 생동감 넘치는 예배였다. (중략)


나는 아직도 그 생동감 넘치는 예배를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너무 목말라 있기에 내가 설교 한 문장만 말해도 아멘이라고 답했다.

예배가 다 끝난 후 목사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1년도 아니고, 18년을 저분들과 함께

사랑과 용서라는 메시지를 나누며 삽니까?’ 물었더니

임명희 목사님이 내게 답했다.


“저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 할 빚을 하나님께 졌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이 아니면 이 일 못합니다.”


4년이 지난 일인데 아직도 나는 그 말이 귀에 쟁쟁하다.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행했던 우리 아이들에게 뭘 배웠냐며 물었다.

“아빠보다 더 훌륭한 목사님을 봤어요!”


▲마치는 말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신다.

‘하나님의 백성. 그대는 정녕 용서의 사람인가?’


용서란, 거창한 한 번의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7번씩 70번이라도 반복해서 용서해야 하는 긴 여정이다.

우린 이 용서라는 고통의 긴 여정을 걷는 동안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 길을 갈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엄청난 은혜(1만 달란트 용서)를 베푸신 후

우리가 이 길을 가도록 부르셨다. (1백 데나리온 용서)


.......................................... 더 읽으실 분 ...........................................


▲영화 <밀양>의 줄거리

30대 초반 여성인 신애는 남편을 여의고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살게 된다.

신애는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투자하기 좋은 땅을 주위에 부탁하지만

사실 은행엔 470만원이 전부인 서민이었다.


결국 이런 허황된 소문 때문에 큰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아들 준의 웅변학원 원장 박도섭은, 신애의 아들 준을 유괴하고 돈을 요구한다.

신애는 은행에 있는 470만원의 돈을 다 내 주고는 아들 준만은 사려달라고

사정사정하지만.. 아들 준은 끝내 변사체로 발견되고 만다.


아들의 사망신고를 마치고 동사무소를 나오던 신애는

‘상처받은 영혼을 위하여’ 라는 교회의 현수막을 보고는 교회로 향한다.

그리고는 참을 수 없는 통곡을 토해낸 다음, 부흥강사의 안수기도를 받고

잠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그리고는 그 다음부터 교회를 다니며 새 생명을 찾았다고 간증하고 다닌다.


이렇게 교회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애는 <용서가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들의 살해범을 만나 하나님의 용서를 실천하겠다며 주변에 알린다.


주변인들은 그녀를 극구 만류하지만 신애는 기어코 감옥에 면회를 간다.

그런 그녀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믿음과 용기에 감탄을 한다.


드디어 살해범 박도섭과 신애가 만난다.

신애는 그에게, ‘자신이 주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며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전해주러 왔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의 말에 박도섭은 고맙다며 자신도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께 회개하자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자신도 비로소 맘의 평화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 말에 신애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냐?’며 반문한다.


박도섭과 신애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와 사랑, 은혜를 얘기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은 거북하기 그지없다.

특히 우리 개신교도들은 보기 민망하다.


일부는 기독교를 정면 비판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영화를 만든 이창동 감독은 노골적으로 비판할 생각은 없었다고 말한다.

전반적인 영화의 모습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지만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왜곡하려한 것은 아닌 것 같다.


<09.02.22. 인터넷설교 스크랩   *원제목 : 하나님의 백성, 그대는 정녕 용서의 사람인가?

 

 

▲관련 글 : 요셉의 용서/섭리적 차원의 용서  

요셉은 자기가 겪은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45;5

이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용서를 하고/말고 ... 그런 것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가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로 생각하니까...

자기를 곤경에 빠뜨린 사람들을 용서 하고/말고가 아예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섭리적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모든 과거 상처를 극복하고 살아갑니다.

자기에게 오늘 같은 믿음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를 사업에 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오늘의 믿음을 갖게 하시려고... 시어머니에게 온갖 구박을 다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과거의 상처에 대해, 용서하고/말고가 아예 없습니다. <설교 스크랩, 편집

 

   ▣ 크리스천 인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