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체타의 돌 벧전5:7 -08.10.31.설교, 출처-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5:7
▲아파체타 돌의 유래
남미의 한 인디오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돌멩이 하나를 그곳에 놓게 됩니다.
대지를 먹이는 여신인 파차마마가 그 돌을 받고서는
그 나그네의 힘들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줍니다. 그 올려놓은 돌의 무게만큼!
그런 미신적인 생각이 퍼지게 된 겁니다.
그래서 페루에 하나의 풍습이 생겼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도, 그 아파체타의 돌무더기에,
자기가 돌을 한 개 올려놓으면
그 올린 돌의 무게만큼, 자기의 짐이 가벼워진다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계의 문학인들도 ‘아파체타 돌’을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파체타 돌의 <심리적> 효과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나그네, 사실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도 피곤한데
쓸데없이 다른 돌을 하나 들어서 그 돌무더기위에 올려놓는다고
자기의 무거운 짐이 가벼워질 리가 절대 없습니다.
별도의 수고를 첨가하는 것뿐입니다.
나그네가 왜 그런 수고를 곁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현재 짐을 지고 가는 것도 무겁고 힘든데...
그런데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나그네들이, 이 신화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실제 자기 짐이 가벼워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효과가 있다면, 효과가 있기에 그 풍습을 너도나도 따르게 되었겠지요.
수고를 해서 큰 돌을 거기다 올려놓는 이유/효과는
다만 심리적으로 자기 마음이 가볍다고 느끼는 거겠죠.
▲「체 게바라 평전」에 보면,
남미의 가톨릭 신부들이
그 커다란 아파체타의 돌무더기 위에 십자가를 갖다 꽂아 놓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파체타의 돌무더기 위에 꽂힌 십자가>와 유사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파체타의 돌?
▲그런데 신앙적인 관점 말고, 한번 세상적인 측면에서, 이 사실을 한번 바라봅시다.
덴마크의 그룬투비가 생각나고,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나라를 재건해 가야 되는 시기에서,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준행하는 것은
나라를 재건하는 그런 짐, 나라를 다시 세워야 된다고 하는 그런 부담,
거기에 직접적인 방법론/방향성/도움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라’ 하는 것은
이제 나라를 다시 세워야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별도의 짐입니다.
‘아파체타의 돌’과 같은 것이에요.
지금 나라를 새로 세워야하고, 삶의 터전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지키고/말씀을 배우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아파체타의 돌처럼
지금 현재 직면하고 있는 생활의 무게를 덜어주는 어떤 직접적인 도움이 아닙니다.
▲자식을 잘 길러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면
그 자식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방법으로.. 사람들은 종교를 채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여호와신앙은
아무리 말씀을 뒤져보고, 아무리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을 해도
내가 돈 벌고 싶다/내가 성공하고 싶다/내가 이 세상의 삶을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직접적으로 해결해주는 방법론이나 지름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전혀 별도의 과제/별도의 부담’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파체타의 돌’과 같은 말씀/하나님의 율법은,
이것을 행하면 행할수록.. 실제로 내 짐이 가벼워진다는 거예요.
진짜 세상에서 지고 있는 짐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별도의 또 다른 짐이에요.
그런데도 성도들이 열심히 그 말씀의 짐을 지는 것은
적어도 ‘아파체타의 돌’같이, 믿음에서 오는 편안한 심리적 안정이 주어집니다.
여러분, ‘가화만사성’이란 말도 있듯이
매사에 마음이 편하고 안정되어 있어야.. 바깥에서 하는 일도.. 잘 됩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면.. 바깥에서 하는 일도.. 잘 안 되고, 그르치는 법입니다.
▲시아버지는 아파체타의 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비교를 해보면
시어머니는 우리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관점을 잘 이해하시고 오해 없기를 바래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무슨 용도와 실용성을 갖고 말씀하자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 ‘짐/부담감’을 한번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예화를 도입합니다.
시어머니가 집에 계시면.. 며느리가 바쁠 때 청소라도 해주시고
빨래라도 걷어서 개주시고, 아이들이라도 봐 주십니다.
반면에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가사노동에 전혀 도움이 안 돼요.
전혀 ‘별도의 부담’입니다. 과일, 커피 대접하는 등.. 짐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계심으로써, 시어머니의 횡포/전횡을 좀 막아주시고,
집안 분위기를 한결 화목하게 할 수가 있다면, ‘아파체타의 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씀준수, 말씀공부
이것은 내가 지금 재테크해야 되고/돈 벌어야 되고/자식 교육시켜야 되고 하는
그런 세상살이에 대해서 직접적인 해결방법이거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처럼 간접적인 지혜를 줄 수는 있겠지요)
전혀 별도의 부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신앙생활 안 하잖아요! 일리 있습니다.)
남미 인디오들이, 자기 짐을 지고 가다가, 별도의 돌을 옮겨 놓을 때
그 돌은 짐을 가볍게 해주는 전혀 직접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별도의 또 하나의 짐인 것이에요.
그런데 이 말씀/규례가 마치 ‘아파체타의 돌’처럼
실제로 이 부담을 안고 말씀의 돌을 우리 마음/생활 가운데 얹어 놓면
얹어 놓을수록.. 세상 짐이 가벼워진다는 것이에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아파체타 돌무더기 위에 꽂힌 십자가
▲남미의 신부들이 거기다 십자가를 꽂았다고 하는데,
정말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에스라/그룬투비(덴마크)/김구 선생님 같은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력이 없습니다.
실제로 나라의 경제를 살려야 되는 대통령/각료들에게
십자가 복음이 무슨 직접적인 지혜/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교육/경제/재테크/증권투자/환율의 급등/부동산 투자 등 그 어떤 것에도
사업의 운영/사업의 경영 등 어떤 것에도
십자가 복음이 직접적으로 어떤 비결을 가르쳐주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당연하죠.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고백’은 진짜 아파체타의 돌과 같습니다.
그것은 실생활에 아무런 직접적 영향력이 없는 것이에요.
지금 살아야 될 과제가 이렇게 많은데
빨리빨리 처리해야 될 일들이 끊임없이 밀려오는데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고 하는 그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겁니다.
지금 직접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것이에요.
▲마음의 부담이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에요. 신비한 것이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서 기억하고
내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자 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세상살이에 또 하나의 과제요/또 하나의 부담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기억해내는 일을
한 번 할 때/두 번 할 때/세 번할 때마다
이상하게 돈을 벌어야한다는 과제 앞에서.. 내 마음의 짐이 가벼워지고
자식을 길러야 된다는 과제 앞에서.. 내 마음의 부담이 가벼워진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쉬게 한다는 것은 이제 사업을 그만 두라는 얘기가 아녜요.
자녀 교육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활동을 중지하라는 얘기가 아녜요.
여전히 그것은 나의 인생의 과제인 것으로 남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성이 전혀 없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복음적 고백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아파체타의 돌처럼 별도의 부담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기억하고 기도할수록
진짜 내가 지고 가는 세상 짐들이 가벼워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분명히 내 짐을 내가 지고 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발걸음이 하늘을 나는 거예요.
너무너무 무거운 짐인데, 마치 깃털을 지고 가는 사람처럼 가벼워진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십자가사건, 그 아파체타의 돌을 우리 생에 놓으면 놓을수록
(우리 짐을 기도로 십자가 아래 맡길수록)
그 십자가 아파체타의 돌무더기에, 내 돌(짐)이 가득히 쌓이면 쌓일수록
내 짐이 가벼워지고, 하나님이 내 짐을 지고 가신다는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내 짐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후략)
▲물론 아파체타 돌과 십자가 복음이 같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위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의/심리적 평안을 준다는 점에서는 유사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예를 들면 '장갑낀 손'과 같습니다.
나는 장갑이고, 주님은 장갑 안의 손이 되어 주십니다.
실제로 모든 일을 내가 움직여 내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갑낀 손이 일하는 것처럼, 나는 죽고, 내 속에서 계신 주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아파체타의 돌은, 심리적 안정만 조금 줄 뿐, 실제로 내 안에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이 실제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아파체타 돌 비유를 잠시 빌려온 것뿐입니다.)
<08.10.31. 설교 스크랩, 축약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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