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건망증 욥8:1-22 -08년 12월중 설교스크랩,정리,출처-
▲도입 예화, 일상의 건망증 사례
*어느 목사님이, 토요일에 주로 심방계획이 없으시니까
목욕탕에 갔다가 자기 교회당 앞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누가 결혼식을 하는구나..’ 생각하고 지나갔어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주례를 해야 하는 결혼식 입니다.
목욕탕에 들어가 계시니까 그 때만해도 뭐 연락이 되어야 말이지요.
그래서 낭패를 본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권사님은 손녀딸이 시집을 가니까, 결혼식 시간에 맞춘다고
아침 일찍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하다가
머리가 다 끝났는데, 자기가 왜 머리를 했는지 잊어버리신 겁니다.
그래서 머리를 하고선 ‘아, 오늘 뭘 할까?’ 하시다가
나가서 친구 만나서 점심 드시고, 결혼식장에선 난리가 났지요.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그런 건망증, 기가 막히지요.
*저 같은 경우는 아주 간혹, 기억에 두서너 번 있었을까요?
안경을 끼고서, 막 안경을 찾습니다.
무심결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안경을 꼈어요. 그리곤 안경을 찾는 거예요.
이 ‘건망증’이라는 것은 전제가 있습니다.
이미 의식하거나 알거나 깨닫고 있었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건망증’입니다.
아예 의식해본 적이 없고, 아예 알아본 적이 없는 그런 대상에 대해서는
‘건망증’이라는 말이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건망증
그런데 여러분 욥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건 ‘멸망의 건망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신앙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잊어버린다고 하는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의식하고/알고/깨닫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과연 무슨 말입니까?
▲빌닷의 훈계
욥기 8장은, 빌닷이, 엘리바스와 욥이 대화하는 것을 보다가
나름대로 견디지 못해서 욥을 비난하며 이 토론에 끼어듭니다.
빌닷의 생각의 기본적인 틀은 엘리바스와 크게 다르지를 않아요.
현세적인 가치와 그 가치에 맞추어진 생의 목적,
그러니까 돈 잘 벌고/자녀들이 잘 되고 하는.. 이 세상적 기준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잘 안 풀리면.. 죄가 있는 것이고
세상에서 잘 되면 의로운 것이라는.. 철저한 인과응보적 사상을 갖고서 말합니다.
그런 틀로 욥의 고난의 문제를 접근해 들어갑니다.
그런데 빌닷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라고 하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욥아, 네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훈계합니다. 욥8:13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너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을 찾아라.
그러면 지금 네 상태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욥8:7
오늘날 우리가 빌닷처럼 살고 있어요.
안 풀리는 형제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창대하게 될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정작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은 빌닷 자신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뭐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하여튼 가게를 오픈하기만 하면 갖다 거는 액자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어느 문맥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고 갖다 거는 거예요. 우리가.
자, 이런 빌닷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정당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정당하지 못했느냐?
빌닷이 ‘욥아, 네가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말하고 있는데
정작 빌닷 자신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욥8:11
진흙에서 자라는 왕골이 진흙에 물이 마르면 말라 죽는 것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는 이렇게 망하는데, 욥아, 네가 바로 그 짝이 난 것이다.
라고 말하는 빌닷이.. 정작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빌닷이 건망증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유
어떤 면에서 빌닷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욥과 비교하면서 2가지 면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인과응보/현세 축복 가치관을 가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도, 빌닷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빌닷은 ‘현세적인 축복’ 이것이 타인의 신앙을 판별하는 기준이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8:7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8:3
하나님의 공의를, 이 세상의 현상적인 성공과 연관시켜 생각합니다.
돈이 벌리고/안 벌리고, 고난을 받고/안 받고 하는 것으로.
우리 이렇게 많이 생각하지요. 인간의 본능인가 봐요.
*영생 천국을 못 보는 선교사 신부의 절규
여러분 일본의 작가가 쓴「침묵」이라는 소설에서도 그러잖아요.
바닷가에서 박해 받아서 죽어가는 교인들을 보면서, 선교사 신부가 절규합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어디에 있으신가?’
교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지금 당장 벼락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공의 아닙니까!
아니 거기서 박해받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늘나라가 이어져 있잖아요.
박해받고 죽으면 좋지 뭘 그래요? 왜 거기서 괴로워합니까.
선교사 신부가 하늘나라를 못 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으로서 당연한 절규이지만)
‘왜 하나님 침묵하시니까?’ 하며 난리를 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못 봅니다.
하나님이 순교자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누구보다 더 관심 갖고 보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보는 영안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침묵’을 갖고 고민하는 겁니다.
이게 불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니까요.
그래서 ‘안경 쓰고 안경 찾는다’는 말입니다.
빌닷이 지금 그렇게, 선교사 신부처럼, 오판하고 있다는 겁니다.
‘욥아, 네가 하나님을 잊어버려서 이렇게 망조가 났다...’ 라고 신앙적인 얘기하지만,
‘축복은 믿음 좋음/환란은 믿음 나쁨’이라고 단순하게 판단 내려버리는 그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의 상태/멸망의 건망증에 걸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내세를 못 보고, 현세만 바라보는 빌닷 같은 사람들
초대교회 로마의 박해 하에 죽어가던 셀 수 없이 많은 순교자들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잘 되고/못 되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의 정의 따지고/공의 따지는 것으로 볼 때.., 말이 안 되잖아요?
공산주의자들의 문제가 뭐냐? 이 세상에서의 부의 분배를 자꾸 얘기합니다.
그게 정의라고 얘기하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내가 착취를 당하는 것은, 한없이 억울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다 과정이에요. 죽음 이전 까지 우리 모든 삶은 과정이라고요.
반대로 내가 이 세상이서 돈 많이 벌게 되었다는 것..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가서 봐야 되요!
* ‘현세적 시각’만 갖고는, 절대 하나님은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말하는 의식구조 안에서
절대로 하나님은 찾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만나려면,
이 세상에서 창대해질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절대 하나님을 순수하게 못 만나요.
미약한 지금은 안타깝고, 창대한 미래를 마음으로 꿈꾸면서 하나님을 찾는다고요?
절대 하나님을 못 찾습니다.
아니 내가 안경을 쓰고, 안경을 찾는데 어디서 안경을 찾습니까?
쓴 안경을 잊어버리고 있는데...
‘미약한 지금은, 하나님이 내게서 멀리 떠나계시다’라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절대 하나님을 깊이 못 만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혜/섭리에 따라, 어쩌면 평생 미약하게 살 수도 있는데,
그러면 평생 자기 신세 한탄하면서, 안경 끼고 안경 찾아 헤매면서 살 겁니까?
그게 바로 ‘멸망의 건망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의 창대함을 느끼기 전에, 지금의 미약함 가운데도
이미 더 가까이 와 계신 분이십니다.
그걸 느낄 수 있어야,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욥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7장에서 '스토커'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말씀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스토커예요.
왜요? 침 삼킬 동안도 나를 잊지 않고 보고 계신 겁니다.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7:18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7:19
욥은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욥6:10
빌닷은 네가 하나님을 떠나서 그렇다고 훈계합니다. 속 터지는 일이지요.
욥은 ‘창대해진다/미약해진다’ 라는 생각에 구애받을 겨를이 없이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스토커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자기를 보고 계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어 잘 살고 싶으세요? 미래에 창대해 지고 싶으세요?
그런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렇게 어려우신 것입니까?
뭐랄까요. 인생은 두부 자르듯이 정확하게 잘라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즉, 예수 잘 믿으면 평탄한 삶을 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인생은 죽는 순간까지 ‘고통의 바다’를 계속 항해합니다.
‘나는 예수 잘 믿어 일년 내내 환란 없이 축복만 받고 살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정신적으로 진찰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인생의 ‘고통의 항해’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그런데도 항상 ‘창대해지는 그날’만 바라보며 살 것입니까?
항상 ‘현실은 미약하다’고만 생각하며 살 것입니까?
(실제로 많이들 이렇게 삽니다. 욥의 믿음이 아니고, 빌닷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비전, 꿈과 신앙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들의 특징이.. 비전 얘기 합니다.
항상 꿈 얘기 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가 신앙의 과제지,
‘미래에 내가 어떻게 잘 사는가, 내가 어떻게 창대하게 꽃을 피우는가?’
그걸 생각하면, 자기 야망에 신앙을 섞어버린 것입니다. 참 신앙 아닙니다.
▲2. 옛 사람의 말을 들어보라 8:8
빌닷이야 말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에요. 사람 말/상식 위주의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가 옛 사람의 지혜를 듣고 배워야죠.
인과응보도 맞는 말입니다. 성도에게도 인과응보가 반드시 적용됩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정신병자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고상한 어휘로 ‘초월적 신앙’이라 합니다.
제가 십자가 복음을 알고 난 뒤에, 제일 위험한 책들 중 하나가 위인전이었습니다.
뭐 간디가 나오고,
뭐 나라를 사랑한 이순신,
이 제일 위험한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치의 뿌리로 심어주는 것이에요.
십자가 복음을 알고 났더니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이순신도, 진시황도
이 세상의 온갖 영웅들이 다 어떻게 됐어야 했느냐? 십자가에서 다 죽었어야 했어요.
그들을 보고 배우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 십자가에서 죽었어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 위인이 어딨어요? 하나님 앞에서 성인이 어딨어요? 다 죄인이지.
아무 개념도 없이 플루다크 영웅전을 얘기하고 그럽니까? 말이 안 되는 얘기예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위인전 다 없앴습니다. 동화책 밖에 없어요.
위인전 자칫 잘 못 읽으면, 십자가와 반대방향으로 나가는 거예요.
자기가 희생하고, 십자가 지고, 살신성인해서 하나님나라를 위한 자가 참 영웅이지,
다른 사람 밟고/죽이고/희생시켜서 성공한 사람은.. 영웅 아닙니다. 죄인입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자기 목회적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은.. 위인전에 영향 받은 세상 성공이지, 참 성공은 아닙니다.
성경에 영향 받은 참 성공은, 다른 사람을 짓밟지 않고, 도리어 자기가 죽습니다.
여러분, 옛사람의 말도 필요하지만,
십자가의 도를 무시하고,
옛 사람의 말=성경으로 이해하면,
엘리바스, 빌닷처럼 인과응보 위주의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누가 잊어버립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교인들이 잊어버리지,
하나님의 이름을 아예 부르지도 않는 밖의 사람들은
아예 ‘잊어버린다’는 말이 해당되지도 않아요.
교회 안에 빌닷 같은 사람들의 ‘멸망의 건망증’이 있습니다.
이 세상 현세적인 한계 안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기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못 보고
항상 미래에 무슨 창대함을 꿈꿉니다.
성경을 또 하나의 ‘자기계발서’ 정도로 이해합니다.
안경을 쓰고 안경을 찾듯이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겁니다.
‘풍요/성공의 하나님’만 찾고 있으니,
‘고난/어려움/보통 상태의 일상의 예수님’이 자기 옆에 계신데도
자기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 그리스도의 임재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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