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 결단, 어중간한 결단 눅9:51~62 09.04.05.설교 녹취
<결단, 선택> 모음
우연인지, 아니면 저자 누가의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본문 눅9장은, 십자가를 지겠다는 <예수님의 굳은 결심>과
주님을 따르기는 따르되 <어중간한/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 모습과도 흡사하다.
◑어중간하면.. 오히려 문제다.
▲어중간한 양이 감기에 잘 걸린다.
지금은 기계로 양털을 깎지만, 옛날에는 일일이 목동이 손으로 양털을 깎았다.
그런데 야외에서 양털을 깎는 중에, 갑자기 늦추위(꽃샘추위)가 몰아닥칠 때가 있다.
그 때는 양털 깎는 일을 중단하고, 양들을 다시 막사에 몰아넣게 된다.
그래서 늦추위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날씨가 따뜻해지면
다시 양떼를 막사 바깥에 내어 놓고, 양털을 계속 깎는다.
이때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데,
털을 아직 깎지 않은 양도.. 아무 문제가 없고,
아예 털을 다 깎아버린 양도.. 나름대로 날씨에 잘 적응한다고 한다.
그런데 털을 반쯤 깎다가 만 양들은.. 한결같이 감기에 걸린다고 한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중간한 상태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도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실 때,
너희가 차갑지도, 덥지도 않으니.. 너희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셨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따르며 섬길 때,
과감하게 결단하고 열심을 내어야 하는데,
하는 둥 마는 둥 어중간하게 나아갈 때, 내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우왕좌왕할 때
‘영적인 질병’에 걸려서 시름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중간했던 베드로.. 낭패를 겪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멀찌감치 도망갔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맹세 때문인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5
어중간하게 주님의 뒤를 따라갔다.
도망간 것도 아니고, 따라간 것도 아니고, 멀찍이 잡히신 주님의 뒤를 따라갔다.
마26:58
그 결과,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는, 큰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차라리 다른 제자들처럼 멀리 도망가 버렸다면, 오히려 그런 과오는 피했을 터인데..
신앙생활도.. 어중간하게 멀찍이 따라가면.. 오히려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어중간한 상태를 면하려면..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내 속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감동하시고, 인도하실 때
적극적으로 결단하고, 그 인도함에 순종하고 나서야 한다.
그 성령의 인도함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끼더라도 고의적으로 불순종 할 때는
성령의 인도함(통칭 역사)이 내게서 점점 소멸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하루 무엇을 할 것인가.. 기도 중에 결단해야 한다.
한 주간을 시작할 때, 이번 주에 내가 어떤 면에서 더 성장할 것인가.. 결단해야 한다.
한 달을 새로 시작할 때, 하나님이 나를 어느 쪽으로 인도하고 계신지 분별하고,
계속 그 길을 따라갈 것을.. 결단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어떤 면에서 ‘거룩한 결단’이다.
계속해서 결단을 내리면서 주님을 쫓아야 한다.
이렇게 결단하고 나서는 사람이.. 능력 있는 주님의 제자가 된다.
오늘날 나는, 결단하는 사람인가?
그런 사람은 수첩에 뭘 적는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결단하는 내용을!
수첩에 적는 것 없이/수첩도 없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결단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에 나가면.. 세상이 좋아서 거기에 흠뻑 취해서 즐기다가
교회에 나오면.. 또 예배드리는 것이 좋다고 하는 생활은
주님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 받을 것이다.
바울도 세상을 자랑치 말고,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가르쳤다. -갈6:14, 클릭-
◑굳게 ‘결단’하신 예수님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9:51
이전에도 예수님은 몇 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적이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말하는가?
굳게 결심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굳은 얼굴/비장한 표정을 하셨다’는 뜻이다.
KJV 성경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얼굴방향을 고정했다고 번역했다.
he stedfastly set his face to go to Jerusalem,
여러분, 예수님도 결단하실 때가 있으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명 감당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결단하셨다.
하물며 우리가 굳게 결심/결단이 없다면... 어떻게 사명을 감당하겠는가?
▲결심이 흐트러지셔서, 다시 결단하신 것.. 아니다.
왜 그렇게 얼굴로 비장한 표정을 지으셔야 했나?
이번에 올라가는 길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로, 이 시점에 처음 결심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를 계획하고 계셨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주님이 피하신 것도
주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는 길은, 다른 방법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라고 이미 생각하고 계셨다.
이렇게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로 작정하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십자가 길을 가시기로 작정하고 3년간 공생애를 보내신 예수님이,
결심이 흐트러지셨거나, 결단이 희미해져서
다시 굳게 결심하신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길은, 결심/결단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늘 결단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오셨지만,
오늘 다시 한 번 더 굳게 십자가의 길을 결심하신 것이다.
지금 우리 각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런 십자가를 지겠다는 굳은 결심이 과연 있는가? 있어야 정상이다!
▲십자가를 지는 마음
①대적들의 속셈을 뻔히 다 아시면서도..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이 시점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예수님도 그것을 다 알고 계셨다.
가룟 유다의 배반, 공회의 심문, 빌라도의 재판, 골고다의 십자가를
다 내다보고 계셨다.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이다.
②인기가 한창을 달릴 때.. 돌연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생각해 보면,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계셨다.
천국 복음을 가르쳤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그런 인기절정의 순간을 맞고 계셨다.
그런데 그 순간에, 거꾸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신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어려운 결단이었겠는가?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도,
인기가 다 떨어지고, 올 데 갈 데 없어서 지는 것은.. 글쎄, 십자가일까?
인기가 한창 정상을 달리고 있을 때, 십자가를 지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③더욱이 주님의 이 결단은, 전혀 자기를 위한 결단이 아니었다.
주님 자신의 생애에 어떤 문제로/이유로..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십자가를 결심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세상에 어리석어도,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을까?
그렇다. 여러분, 오늘도 어리석은 마음 없으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다.
완전히 비상식적인 마음/감동이 있어야.. 십자가를 질 수 있다.
◑ 어중간하게 ‘결단’한 제자들 눅9:52~62
주님은.. ‘굳은 결심’을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해 올라가시는데,
똑같은 시점에 (본문에 나오는 세 부류의) 제자들은.. ‘어중간’하다.
▲1. 덕 볼 것 기대하고 예수님 따르다가... 오히려 도망간다. 눅9:52~56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눅9:52~56
두 제자가 주님에게 ‘불을 내려 주세요!’ 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불을 내려...’ 라고 말했다.
자기들이 언제 그런 권능을 가졌단 말인가?
도대체 누구를/무엇을 믿고서, 이런 엉뚱한 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인가?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려고 올라가시는 줄 알고 있었다.
그 분은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출하실 분이다.
그런 분을 모신다고 생각하니.. 제자들이 자기들 스스로 의기양양해진 것이다.
그래서 너무 교만해진 나머지 ‘우리가 불을 내려 멸할까요?’ 말했던 것이다.
이런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또한 ‘왕의 입성식’때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정말 날아갈 듯 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잡히시고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 낙심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어땠는가? ... 환란이 찾아왔을 때, 다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다.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길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천지를 휘젓는 그런 길이 아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덩달아 한 자리하고 높아지는 길도.. 당연히 아니다.
그런 길을 기대하고 지금 신앙생활 하신다면... 언젠가는 실망하실 것이다.
목적이 잘 못 되면.. 결과는 보나마나다.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 덕 볼 기대감에 넘쳐 있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묵묵히 따르는 사람이다.
거기에는 희생/헌신/눈물이 있다.
우리도, 덕 볼 기대를 접고, 대신에,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기를 <결단>해야 한다.
▲2. 편한 것 기대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지 마시라 눅9:57~58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눅9:57~58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 같지만 아니다. 정확한 대답이다.
옛날 그 때나, 오늘날이나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사실은 ‘내가 잘 풀릴 때, 내가 복 받을 때’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다.
주님 따라가다가 조금만 어려운 일 당하면.., 포기하고 돌아설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집도 절도 없는 데도, 나를 따를 테니?’ 하고 물으신 것이다.
‘그런 고생(십자가)을 감수하고서도 나를 따르겠니?’ ... 하면서 주님은 되물으신다.
(그의 대답/반응은 본문에 안 나오는데, 아마 도망갔을 것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저자 누가의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본문 눅9장은, 십자가를 지겠다는 예수님의 굳은 결심과
주님을 따르기는 따르되 어중간한/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 모습과도 흡사하다.
▲3. 미루지 말고, 때가 왔을 때 <결단>하라 눅9:57~58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9:59~60
이 말씀은 ‘성도는 부친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이 사람은, 자기 부친이 아직 죽었는지/안 죽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또한 언제 죽을지도 불분명하다.
그는 ‘늙은 자기 부친이 죽을 때까지 (몇 년이고) 기다렸다가,
죽고 나면 장례식 다 치르고 나서, 그 때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하라>는 뜻이다.
어떤 일도, 주님을 따르는 결단을 늦추게 해서는 안 된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로 지금 결단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다.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 눅9:51
여기서 ‘기약’은 타이밍이란 뜻이다.
주님은 그 타이밍(기약)을 놓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특별히 ‘유월절’의 타이밍을 택하셨다.
유월절 양 잡는 날을 택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기로 결심하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성령 안에서 깨어있는 사람은..
때를 잘 분변할 줄 안다. 때를 놓치지 않는다.
‘앞으로 언젠가 헌신할 거야’ ... 그런 사람치고 제대로 헌신하는 사람 없다.
지금 결단 못 하면, 앞으로도 못 한다.
내일은 무슨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결단>을 내렸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라! 눅9:61~62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 따르는 사람은, 가족과 작별도 못하는가?’ ... 물론 그런 뜻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무슨 사소한 일/핑계거리만 생기면.. 집에 돌아갈 사람이다.
예수님의 말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의 뜻은
<한 번 결단을 내렸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라>이다.
▲마치는 말/ 북한의 난동은.. 신앙적으로 결단하라는 하나님의 싸인
지금 북한이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다고, 연일 뉴스에 보도되고 있다. 09/04/05시점
여러분은 북한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가?
우리는 ‘북한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알아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북한을 통하여, 대한민국 교회에/성도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정신 차려라! 미지근하면 토하여 내치리라!’
‘너희들이 기도해야 한다, 너희 신앙을 다시 한 번 <결단>해라!’
항상 (영적으로) 긴장하면 승리하지만, (영적으로) 방심하면 마귀에게 당하게 된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십자가 지는 일에 <굳게 결단>해야 한다.
아니면 본문에 대조되는 제자들처럼.. 어중간하게 된다.
어중간하면.. 더 문제가 많고, 더 혼란스러운 결과를 낳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의지가 굳어서 결단을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의지가 약해서 잘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의지'보다 더 큰 결정적 변수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이다.
'결단하게 하소서'라고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은.. 태생적 자기 성향과 관계없이
누구나 예수님처럼 거룩한 <결단>에 이르게 될 것이다. ▣ 십자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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