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로 포도주 만드신 이유 요2:1~11 -09.04.09설교스크랩, 출처-
◑1.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항상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사셨다
▲4절,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냥 ‘어머니’하면 되는데, 왜 굳이 ‘여사님(여자여)’하셨을까요?
‘여사님’이라고 부른 것도 사생애를 정리하셨다고 하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시점에서, 어떤 결연한 마음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말도
내가 십자가를 향해 가는 내 생애의 발걸음에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이, 공생애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요?’
이렇게 물어보는 것일 수 있어요.
▲표적의 의미, 단순하게 ‘떨어진 포도주 보충’이 아닙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2:4
이런 말투는, 어머니의 요청에 대한 ‘일단 거부’로 보입니다.
그러시다가 결국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의 길/복음의 길과 연관을 지어 그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단순히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필요/동정심 때문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면,
이 기사가 성경에 꼭 기록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사도요한은, 모든 표적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요20:30
예수 믿고 영생 얻는데 필요한 표적만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요20:31
그렇다면 가장 첫 번째 표적도, 그냥 ‘포도주 떨어진 것 보충/동정심’이 아니라
구원/영생/십자가의 목적을 염두에 두시고, 표적을 펼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첫 번째 기적은, 이어질 전체 기적/생애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책을 읽어도 서론을 잘 읽어야 합니다.
서론에 그 책의 전체 주제와 결론까지 어렴풋이 다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기적’은 앞으로 <이어질 모든 기적의 서론> 격으로 볼 수 있으며 요2:11,
또한 <앞으로 공생애 전체의 목적을 규정>해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십자가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의 의미가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 속에 다 들어있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엄청난 사건이지요.
▲적용 :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2:4
이 말씀은 ‘내가 갈 길/십자가의 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매사에 항상 이렇게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식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면
‘십자가에서 죽은 나에게 이 자식문제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남편문제가 생겼다. 사업문제가 생겼다 건강문제가 생겼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죽은 나한테 도대체 지금 이 문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를 물어야 합니다. 매사에.
내가 지금 십자가에서 죽었음이 확인되는 이 순간
‘우리 자식 놈이 나에게 말썽을 피운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러면 내 마음이 매우 너그러워집니다.
‘그래,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내가 그것을 못 받아주겠니?’
남편 사업이 망하려고 하는데 ‘그래 내가 죽었으니 나한테 보석 사줄 일도 없고
옷 사 입을 일도 없으니, 걱정 마!’ 이런 마음가짐이 되면.. 매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적용2 : 영생에 관심이 없으면...
어떤 할머니가 연세가 이미 70대 중반인데,
무슨 부동산에다 투자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파트 다 짓고, 입주하는데 지금부터 10년인가 걸린답니다.
자녀를 위해서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습관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하시는 일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생을 정리하고 영생을 준비하셔야 할 시점에도
여전히 부동산 투자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해서 ‘영생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관심이 없으니, 부동산에 관심 두는 것이지요.
◑2. 결례항아리에 ... 겉 형식이 아닌, 속마음의 질적 변화
▲왜 하필 ‘결례항아리’ 인가?
지금 잔치 현장에도 ‘빈 포도주부대’들이 있었습니다.
포도주 담는 용도인 포도주부대가 엄연히 있었는데
왜 결례항아리에 물을 담아라 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바꿨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례가 뭔지 아시지요. 손 씻고 발 씻는 거예요.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먼지가 묻으니까,
집 입구에서 그 통에 담긴 물을 떠서, 손 씻고 발 씻고... 그랬어요.
제가 한 번은 달동네에 살 때, 수돗물이 자주 끊어져요.
그러면 아래 동네에 가서 물을 길어오기도 하고
때로는 구청에서 급수차가 나와서, 물을 배급을 해주기도 합니다.
하여간 그렇게 하다보면 그릇이 모자라니까 세숫대야에도 물을 담게 돼요.
그런데 하루 종일 물을 쓰다보면, 저녁에 밥할 물이 없을 때가 있어요.
할머니가 중풍으로 누워계시니까, 수발을 들다보면 물이 자연히 모자라게 돼요.
그러면 어머니가 할 수없이 세숫대야에 담겨진 물로 밥을 지으시는 거예요.
으~ 밥맛이 이상한 것 같아요~ 아버지가 세숫대야에 발을 씻으시는데~
영 밥 먹을 마음이 내키지 않잖아요.
주님께서 이왕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것이면
지금 잔칫상에 쓰다가 비어버린, 빈 포도주부대들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물을 담으면 될 것을
왜 결례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가요?
손 발 씻는 물에다가 포도주를 만드시니, 느낌이 안 좋잖아요?
주님이 당신의 십자가 생애가 갖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이 하나의 사건으로 제시를 하는 겁니다.
▲겉을 씻는 종교로부터 → 마음을 변화시키는 종교로!
유대 종교는 ‘열심히 씻는 종교’였습니다.
바리새인/율법사/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부지런히 겉을 씻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접의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더럽다.
회칠한 무덤 같다. 註1)
그래서 있는 집들은, 집집마다 결례항아리를 두었어요. 잘 씻기 위해서!
그들은, 겉은 열심히 씻었지만, 속마음은 씻지 않았습니다...
위생적으로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신앙적으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더 완전케 하셨고,
그래서 더 강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즉,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이제 너희가 속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은, 마음에 미움을 품어도 이미 범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겉만 씻는 결례의 종교, 모세의 율법은
사람을 온전하게 세우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 망하게 되었어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본질적 변화/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냥 ‘손과 발의 겉을 씻는 것’이 이제 끝나고,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본질적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의미를
이 기적이 함축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성가를 부르잖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됐네♪
이것은 중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겉이 아닌 속의 변화, 즉 질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변화시키는 기적을
‘포도주 부대’가 아니고, 특별히 ‘결례항아리’에다 행하신 이유라고 봅니다.
▲이 단락(◑2)의 적용: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 책은, 내 속에 성공에 합당한 인격인가/아닌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도둑놈도, 사기꾼도 ‘성공하는 7가지 법칙’을 적용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인격, 속마음의 변화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
누구나 이 7가지 법칙을 행하면.. 성공한다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교훈도.. 좋은 면만 가져와서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나,
교회에서는, 그런 것을 자주 들먹이는 것은.. 기독교 기본원리를 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지금 그렇게 세상풍조를 따라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내 속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얼마나 더럽거나/ 지저분하거나/ 깨끗하거나 상관없이
하여간 겉 행동을 통하여, 내가 얻으려고 하는 것을 성취하면 된다는 겁니다...
원래 설교문 원본은, <씻는 종교>에서 <마시는 종교>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마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원문 출처(화면 상단 오른쪽)를 참조하세요.
◑3. 변화된 포도주를 마시고 즐거워하다. ... 취하도록 마시라
(이 설교문의 3개 대지 중 가장 강조점)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2:10
이제 결례항아리에서 만들어진 포도주를
사람들이 자기 속으로 마셔버립니다. 마시면 사람이 취하게 됩니다.
▲술 취한 사람/ 성령에 취한 사람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라’고 하셨는데,
5리를 가자고 하는데 10리를 가 주는 경우를, 실제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맨 정신에는 안 가지만, 술 취한 사람들은 10리를 가 줍니다.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성령에 취한 사람들은, 10리를 기꺼이 가 줍니다.
‘왼편 뺨을 치면 오른 편 뺨을 들이대라’
맨 정신에는 안 대지만, 술 취하면 댑니다.
영화장면에 보면, 술 먹은 사람들이 싸울 때,
한 대 맞으면 ‘나 쳤어? 한 번 더 쳐봐’ 하면서 들이대잖아요.
그러나 성령에 취한 사람들도 그렇게 합니다. 똑같이 취해 있으니까요!
그래서 한 쪽 뺨을 맞으면 반대쪽도 돌려 댑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사람들에게 마시게 하신 것은
‘겉을 씻는 종교’가 아니라 ‘마시고 속이 헤까닥 변화하는 종교’임을 암시합니다.
마치 포도주에 취한 사람처럼, 복음을 믿으면,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성령에 취한 베드로
술 취한 사람들, 한 겨울에 길에서 드러누워 잡니다.
안 깨워주면, 동상 걸리거나 얼어서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겨울에 술 취해서 길바닥에 드러누워 자다가
목숨은 건졌지만 동상에 걸려, 10손가락, 10발가락 다 잘라낸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내일 아침에 목 베임을 당하게 돼 있는데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쳐서 깨워도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을 자요.
완전히 술 취한 사람 같아요.
그리고 실제로 성령이 임했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보냐하면
낮술에 취한 사람들이라고 보게 됩니다.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행2:15
▲말씀에 흠뻑 취해야!
마르틴 루터가 ‘교회는 말씀의 집이다’ 라고 했어요.
이 말을 루터의 제자들이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말씀의 식당이다, 말씀의 주막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말씀을 한 잔 먹고 가야 한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말씀을 자기 속으로 퍼 넣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가, 말씀을 먹기는 먹는데, ‘조금’만 먹어요.
그리고 1주일 동안 세상에 살면서, 세상적인 것들은, 매일 ‘엄청’나게 먹어요.
주일날 예배 나와서 ‘잠시’ 은혜를 받지만, 그것은 1시간에 불과하고
나머지 시간에 일주일 내내 ‘세상/마귀/현세적 가치관’에 철저히 지배를 받고 삽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취하도록 먹고 마셔야 합니다.
술 취한 사람이 술 깨면 살 수 없듯이,
우리가 말씀에 늘 취해서 word-holic/word-mania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큐티 10분정도 하는 것으로는, 사실 승리의 삶을 살기는.. 힘듭니다.
오늘날 ‘바쁜’ 세상 풍조는.. 점점 우리를 ‘말씀과 동행하는 삶’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교회는 말씀의 집이다’고 한 이유도, 흠뻑 먹고 마시고 가라는 것입니다.
찔끔찔끔이 아니죠.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두 세 통 드는 항아리’를 5개나 가득 채우신 것은
굉장히 많은 양입니다. (한 항아리가 약 반 드럼, 100리터, 5개는 총 5백리터)
오늘날 500ml 짜리 병으로 환산하면, 포도주가 1천병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몇 명 모였는지 모르나, 모두가 풍성히 마시고 취했을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는 큰 도시가 아니라, 동네입니다.
▲안 취하면 벌벌 떤다.
제자들이 성령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예수님이 죽으신 후, 방문 꼭꼭 걸어 잠그고, 숨죽이며 벌벌 떨며 숨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숨은 자리에서 뛰쳐나와서
‘너희가 예수를 죽였지? 빨리 회개해!’ 하고 문 열고 달려 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끄윽~ 소리만 안했지, 술 취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지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한테... 막말로 대드는 것으로 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완전히 취한 거예요.
그렇게 취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제정신 가지고 뛰쳐나갔겠습니까?
▲적용 : 우리도 ‘안 취하면’ 벌벌 떤다.
우리가 살면서, 자식문제 놓고 파르르 떠는 게 제 정신이에요.
이웃집 애는 무슨 학원/유학 보낸다는데.. 파르르 떨리잖아요?
사업을 할 때.. 벌벌 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에서 포도주에 풍성하게 취한 사람들처럼
하나님 말씀으로 오늘 우리가 풍성하게 취할 때
사업이 망해간다는 남편에게
‘우리가 언제 돈 갖고 살았어? 당신하고 나하고 사랑해서 살았지.’
이런 마음이 드는 것. 이것은 끄윽~ 소리만 안 한 것이지 취한 것입니다.
‘여보 돈 없어도 괜찮아요!’ 이게 취한 말이지, 제정신이 아니지요.
▲마약중독자 범행을 줄이기 위해, 마약을 나눠주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독일 전 국가가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어요.
함부르크라는 항구도시가 있는데, 항구도시이다 보니까 기강이 좀 문란해요.
그래서 그 항구도시에서 범행이 많이 일어나요. 약물중독자들에 의해서.
그러니까 이 함부르크에서 어떤 정책을 발표했냐면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서 정기적으로 시청 앞의 어느 장소로 모이면
아편을 준다고 공고를 한 거예요.
왜냐면 그들이 마약을 사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과정 중에
자꾸 범죄를 저지르니까, 마약중독자들에 의한 범죄를 줄이기 위해서
시청에서 아예 마약을 사갖고 그들에게 배급을 해주기로 선언을 한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캐나다에서도 그 정책을 검토를 하더라고요.
그런 정책이 잘된 건가/잘못 된 건가.. 범죄가 많아지나/줄어드나?
이러한 효과를 따지기 전에,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다녔던 교회, 내가 섬겼던 교회,
거기서 내가 바로 이런 짓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돈에 중독 된 사람들에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겁니다. 돈을 더 가져야 행복할 것 같아서...
이 세상에 취해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적인 희망을 주겠다고 교회가 약속을 해주는 겁니다.
함부르크에서 마약을 주겠다고 하는 말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이에요.
▲여기 앉은 남자 집사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셔요.
자기는 평생에 처음 들어 본 말이 있대요. 무슨 말이냐고요?
자기가 남산에서 드라이브를 하면서, 제 설교 CD를 듣는데
제 설교 중에 ‘돈은 벌어서 뭐합니까?’ 그러더래요.
자기는 평생에 그런 말을 처음 들었대요.
그래서 길 가에 차를 딱 세우고, 생각해 봤답니다.
‘돈은 벌어서 뭐합니까 라니.. 아니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그런데 그 말이 마음에 꽉 배기고
갑자기 사업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사람이
그렇게 마음이 평안해 질 수가 없더라는 거예요.
야, 때로는 사람들 중에
‘돈 같은 것 벌어서 뭐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게
‘돈 못 벌어도 되겠다’ 싶은 생각에... 마음에 안도감도 생기고 그랬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세상을 깨워야지요.
세상이 모두가 ‘돈 더 벌자’ 하는 데, 교회도 발맞추어서 ‘돈 더 벌자’하면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그것이 100% 성경적인 가르침도 아닌 데요!
▲세상 자랑에 취해서 사는 사람들
제가 한 번은 설교할 때 ‘서울대학이 뭐가 좋아요?’ 했더니,
설교 후에 식사하다가 서울대학 나온 의사 선생님이 의자에 앉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싫어하시는 서울대 의대를 나왔습니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제가 싫어하긴 왜 싫어해요? 서울대 의대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서울대 의대를 너무 좋아하고/사모하고/자랑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지...’
왜 그걸 굳이 싫어할 이유가 있겠어요?
그러나 그것을 왜 좋아하느냐 이겁니다. 그 좋아할 것 아니지요.
하나님을 좋아해야지, 왜 서울대/명문대를 좋아해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사실은 세상 자랑에 취해 있는 겁니다.
십자가만 자랑해라 했잖아요? 갈6:14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세상 자랑에 취해서 살고, 세상 자랑을 동경해서 사는 것은
모두가 <말씀에 취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모두가 요20:19절의 제자들처럼, '벌벌 떨면서' 살게 된다니까요?
▲세상 이야기만 하는 성도들
주일에 남자 분들하고 대화하는데,
WBC 야구할 때는 야구이야기가 무르익고
대포동 미사일 쏘면 또 그 미사일 얘기가 나와요.
왜 그래요? 술 먹으면 술 냄새가 나요.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우리는 대화의 주제로 삼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이야기를 안 하고 살 수 없지만
성도들끼리 만나도 늘 쇼핑/주식/부동산 등 세상 이야기로 일관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평소 우리 성도들의 삶이.. 말씀과 너무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술 먹으면 술 냄새 나듯이, 늘 세상을 먹고 마시니까.. 세상 이야기만 나오지요.
말씀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말씀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영적 힘이 없는 이유
예배당에 와서 말씀 한 잔 ‘소주잔’(작은 잔)으로 마셨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세상 이야기를 ‘사발’(큰 잔)로 들이마셔요.
소주잔으로 겨우 말씀 한 잔 먹고 '아, 알딸딸하다.' 이러고 갔는데
세상 메시지는 대접(대포라 그럽니다)으로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거예요.
그러니 무슨 수로 하나님 말씀에 취할 수가 있겠어요.
오늘날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말씀을 더 들어야 되요.
성경을 더 읽어야 되요.
필요한 경우 인터넷을 통해서 말씀을 더 먹어야 되요.
그래서 입만 열면, 하늘 냄새가 팍~ 풍길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현대인들, 아무리 바빠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면서 살더라고요.
먹고 싶은 것은, 찾아가서 먹고
가고 싶은 곳은, 시간내서 가고,
보고 싶은 연속극, 영화.. 다 보고 살면서도
늘 바쁘다고 그래요...
하루 종일 바쁘게 살면서도, 성경 한 장 안 보고 사는 것.. 참 신기하지 않아요?
목회자라면, 하루에 말씀 연구 반나절은 '매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주일날 설교할 게 너무 많은데, 그걸 30분 안에 하려니, 참 '힘들게' 됩니다.
그런 말씀 연구가 없으면, 횡설수설, 중언부언 하게 됩니다. 성도들 다 영양실조에 걸리고요.
註1) <회칠한 무덤>이 뭔지 아시지요?
당시는 여관이 없을 때라서, 여행자들이 밤중에 동굴에 들어가서 누워 잤는데,
밤에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아침에 깨보니 거기 사방에 뼈가 가득한 무덤이었어요.
그래서 그 후로 <여기는 무덤>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회를 칠해놨어요.
밤에 허옇게 보이면, ‘아, 저기는 무덤이구나, 딴 데 가서 자야 되겠다!’ 하는 것이지요.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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