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씨줄과 날줄 시30:1-12 - 09.04.07.설교스크랩-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데 그 경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는 환란, 역경, 참담한 현실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노래하는 것이라면 (나를 끌어내십니다)
6절부터 12절까지는 내 일이 형통할 때, 막힘없이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을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당신과의 관계를 긴장감을 유지하며 인도해 가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감추십니다)
◑1. 어려울 때 나를 끌어내시는 하나님
▲30: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 다윗에 대해서, 원수가 끊임없이 있었지 않습니까?
정말 인간의 욕망을 따라 왕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서
끊임없는 환란과 도전과 정말 위기의 상황이 계속 주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평생 동안 인도하셨는가 말을 할 때
가장 핵심적인 단어가 ‘나를 끌어 내사’라는 말을 썼다는 것입니다.
깊은 우물에서 물을 끌어 길어 올리는 것 같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에요.
▲30:3,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1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끌어올렸다. 내려가게 하지 않으셨다’ ... 하는 얘기를 해요.
그런데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3절 같은 경우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셨다’고 합니다.
지금 다윗은, 나라가 위험에 처하고/ 왕권이 위험에 처하고/
가정이 흔들리고/ 목숨이 위태로운 그런 위기인데
이 다윗의 노래는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1절에서는 <현실적인 어려움>에서 끌어내신 것과
3절에서는 <영적인 어려움>에서 끌어내신 것을 노래합니다.
▲1993년도에 나온 <피아노>라는 영화 아시는지요?
페미니즘영화로 아주 대표적인 영화로서
영화의 배경은 19세기말, 아직 뉴질랜드가 미개척분야가 많은 그런 때에
뉴질랜드의 미개척지에 사는 어떤 영국 이민자에게
16살 된 실어증에 걸린 에이다라고 하는 한 젊은 미혼모가, 시집을 오게 됩니다.
팔려서 와요. 그 아버지가 팔아버렸어요.
그런데 조그마한 그랜드피아노를 하나 갖고 와요.
말도 못하고 15살 때 아기를 낳은 미혼모로서
이 세상에서 억눌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를 표현하지 못하는 (실어증)
그러한 답답한 환경 속에서
오직 피아노만이 이 여자를 표현해내는 유일한 방법이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시집을 올 때 피아노를 갖고 왔는데
남편은, 피아노를 옮기려면 숲을 지나야 하는데,
그래서 피아노를 옮기기 힘들다고 해변가에 버려버려요.
그러자 그 남편의 친구였던 이주민 남자가 하나 있는데
그 남자가 피아노를 자기 집에다가 옮겨놓고
여자로 하여금 피아노를 치도록 허락하면서
그런 사이에 이 남자와 사랑이 오고가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나이가 많은 신랑이, 이 에이다의 손을 잘라버립니다.
피아노가 유일한 기쁨인 자기의 젊은 아내,
그래서 그 피아노가 있는 집에 가서 피아노를 치다가
그만 그 집의 남자와 정분이 나버리자, 남편에게 젊은 아내는 손이 절단당합니다.
그런데 손을 잘랐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기 수중에 들어오지 않는 그 자기아내를 보면서
아예 여자를 그 남자에게 보내버려요.
에이다는, 이 사랑에 빠졌던 남자와 피아노를 싣고
이제 배를 타고 나와서 딴 곳으로 가다가
피아노를 배 바깥 바다 속으로 집어던지는데
배가 휘청거리면서 피아노가 빠지는데
피아노를 묶고 있던 밧줄이 쭉 바다 속으로 끌려가지 않습니까?
그때 일부러 에이다는 자기의 발을 그 밧줄에 매어가지고
피아노가 바다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에 딸려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죽기로 작정한 거예요.
그랬다가 물속에 들어가서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에이다가 몸부림을 치면서 물 바깥으로 다시 솟아올라옵니다.
그리고 잘려진 손에 쇠로 만든 손가락을 끼우고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요.
▲여러분, 이 영화에서 이 버려진 피아노와, 새로 치는 피아노의 차이가 뭐겠습니까?
<처음의 버려진 피아노>는.. 억압되어진 상태에서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기표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피아노가 유일한 생의 표현의 분출구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이제 물속에 빠졌다가 다시 올라왔을 때 <새로 치는 피아노>는..
억압된 상태에서의 유일한 분출구로서의 피아노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생에 대한 자발성을 허락받은 인격으로서
자발성에 의해서 선택한 피아노를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스토리의 영화장면 중에
피아노의 밧줄이 에이다의 발목에 밧줄을 끌어서 매서 같이 끌어내려가는 이것,
이것이 바로 다윗이 당하는 환란의 상태를 한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에요.
▲‘피아노’가 뭡니까? 부모의 ‘피아노’는 <자식>입니다.
내 생에 있어서 내 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값진 것들이에요.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들.
예를 들어 내게는 자식이 있습니다.
아,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식을 통해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자식에게 환란이 닥칩니다.
그러면 그 자식이 피아노처럼 바다 속에 빠질 때.. 내가 같이 빠져버립니다.
내 발이 ‘자식이라는 피아노’에 같이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피아노인 <왕권>
그런데 그 왕위와 왕권이 피아노처럼 바다 속으로 빠져버립니다.
이때 다윗도 같이 빠져 들어가는 거예요.
왜요? 거기 묶여있으니까요.
묶여 있다가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끌어내셨다는 거예요.
뭘 끌어내셔요?
‘마음’을 끌어내십니다.
피아노와 같은 왕위에 묶여있는 마음을 끌어내셔서
우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내듯이, 다윗의 마음을 끄집어내셨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30:4~5절에 보면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거룩함을 기억하고 감사하라.
노여움은 잠깐이요 은총은 평생이로다.
이제 다윗 왕은, 바다 속에 빠져버린 그 왕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시 채택하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에 의해 ‘끌어내어진’ 다윗은.. 이제 ‘새로 피아노를 치게’ 됩니다.
▲사업이 위기에 처합니다.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 그 빠지는 ‘피아노’를 건져내려고 하지 마세요.
에이다처럼 바다 속에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빠지는 피아노와 같은
사업과/ 내 일과/ 경제문제와/ 내 건강과/ 내 자식과...
이런 것들을 자기 힘으로 끄집어 올리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러지 말고 에이다가 피아노를 버리고 탈출하듯이
피아노와 함께 죽었다가. 물속에 완전히 빠졌다가.
그리고 다시 에이다가 탈출합니다. 옛날 피아노는 버리고.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우리 마음을 묶고 있는
피아노와 같이 소중한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내 생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모든 것들을
다 바다 속에 버리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인 것을 다윗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위기가 닥쳐서 내가 존재감을 느낄 만큼 귀중한 것들이 위태롭게 될 때마다,
상실의 위기에 있을 때마다
그것과 함께 불안의 바다로 빠져들어 가는
걱정과 근심의 바다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내 마음을 끌어내 주십니다.
◑2. 형통할 때 내게서 얼굴을 가리신다
▲30: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형통할 때에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야, 이 되어져가는 일을 한번 봐라!’ 이렇게 교만하게 말합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30:6
‘내가 정말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생활에 기초위에 서있게 되었구나.’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30:7a
이런 자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30: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주님이 얼굴을 가려버리십니다. 주의 얼굴을 가려버리십니다.
주의 얼굴을 가려버리실 때
다윗에게 나타나는 심정이 어떤 심정입니까? 9절의 심정입니다.
▲30:9, 무덤에 내려갈 때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무슨 얘기입니까?
다윗의 마음이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있을 때가 언제냐?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자기 마음이 무덤에 내려가는 것 같다는 것이지요.
내가 곤고할 때는.. 나를 끌어올리시지만
내가 형통해서 자만할 때는.. 그 얼굴을 가려버리시니까,
다윗의 마음이 무덤에 내려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오르락, 내리락> 인도하십니다.
▲잘 나갈 때, 잘 풀릴 때.. 하나님 얼굴이 보이지 않고.. 그 때 찾아오는 공허함
일이 안 될 때는 처절하고 비참하고 걱정과 근심이 몰아치는데
일이 잘 될 때는 뭐가 있느냐?
공허함이 찾아오는 거예요. 공허함.
①예를 들어서 최진실 씨가 다시 컴백을 해가지고 잘 나갔어요.
지금 그렇게 못하는 배우가 수천, 수만 명 아닙니까?
택함을 받은 여자지요. 다시 컴백했는데도 그 결혼이 불화하고
또 남편에게 얻어맞고..
비참한 그러한 결혼생활의 터널을 통과해서 다시 컴백했는데
너무너무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잘 나갈 때 또 자살을 하시느냐?> 이겁니다.
②헤밍웨이도 마찬가집니다.
그가 노벨상을 받고 전 세계 사람들이 그의 글에 감동을 받고
경제적으로건 사회적으로건 명예적인 차원에서건 부족함이 없을 그때
그가 뭐라고 얘기하느냐?
‘내 생애는 필라멘트가 끊어져버린 전구와 같다.’
왜 그래요? 왜 잘 될 때 그래요?
③마릴린 먼로가 36세에 자살할 때
그 여자에게로 들어오는 돈이 수천 만 불이었대요.
그럴 때 왜 자살을 합니까?
모든 남자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 마릴린 먼로가. 왜?
공허함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도 무덤에 내려간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30:9
일이 형통할 때... 마음이 높아져버렸습니다.
‘내가 이만큼 일이 잘되는데...’
그 때 하나님이 얼굴을 가려버리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최진실, 헤밍웨이의 마음처럼,
무덤에 내려가는 자처럼 된 거예요. 마음이 공허한 것이지요.
모든 기대가 다 성취되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행복할 줄 알았지요. 그렇지요?
모든 내 욕망이 다 이루어졌으니까. 행복을 기대해도 좋은 상황이 됐잖아요?
그런데 하나도 안 행복할 때..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거예요.
돈이 있으면 좋겠다.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해서 돈을 쫓아가는 동안에는
차라리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쫓아가려고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공허하지는 않아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목표를 이루었어요. 이루었는데 행복하지 않아.
이제는 방법도 없어요. 그게 바로 허무함, 허무주의라는 거예요.
거기에서 자살이 나옵니다.
이미 <마음>이 죽은 자들이 자기 <몸>을 죽이는 게 자살이라 그랬어요.
자살하기 전에, 마음이 먼저 죽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30: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다윗은 형통할 때, 공허감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낮추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10절부터,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인생의 씨줄과 날줄’입니다. ←이 설교문의 원제목
곤고할 때는 나를 끌어올리시고
내가 평안해서 교만할 때, 내게서 얼굴을 가리셔서 공허하게 만드시고
그래서 내가 곤고한 가운데서 다시 주를 간절히 찾게 하시고 ...
기도 :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씨줄과 날줄, 기억하게 해주시옵소서.
위기가 처해서 피아노에 매여 빠질 때 피아노를 건지려하지 말고
내 마음이 거기서 빠져나오게 하시고
일이 잘 되어 그 성과 위에 내 마음이 올라갈 때에
깜짝 놀라 그 위에서 속히 아래로 내려올 수 있게 하시고
우리 인생의 씨줄과 날줄을 잘 직조해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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