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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의 성숙한 믿음 1892

LNCK 2009. 5. 16. 07:57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의 성숙한 믿음         창21:22~34            09.03.25.설교녹취



◑1. 아비멜렉이 깜짝 놀란 이유


▲22절.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의 무슨 면을 보았기에, 이런 말을 했을까?


-아브라함이 처음에 그랄에 가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적이 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그 말을 믿고, 사라를 후궁으로 데려갔는데,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 꿈 속에서 책망을 듣게 된다.


-또한 아브라함이 기도 해 줌을 통해서, 그 왕궁의 모든 여인의 태가 열려서

출산할 수 있었다.


-또한 아브라함이 1백세, 사라가 90세가 되어서,

도저히 아기를 못 낳을 시점에서, 아기 출산하는 것도 보았다.


이런 면들을 보고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보인다’고

말했던 것은 아니다. 그게 다가 아니다.


22절은 ‘그 때에’로 시작한다.

그 때란 ..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내어보낸 직후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고 고백했다.


그것은 당시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 가장 큰 재산은 <자식/아들>이었다.

이스마엘이 비록 서자라서, 상속권을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기 집에 그냥 데리고 키우면,

그 이스마엘을 통해서 태어날 그의 모든 후손도 자기 것이 되는데..,

그 귀한 재산을 왜 내어보내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에,

아브라함은, 지금 남이 볼 때 아들 둘 밖에 없다. (이삭과 이스마엘)

그런데 큰 아들 이스마엘을, 미련 없이 내어보낸다.


그것을 보고 바로 아비멜렉이 깜짝 놀라서

‘네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언제,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고 우리에게 고백하는가?

내가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잘 나갈 때인가? ... 그렇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에게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서 순종하며 살 때>이다.


그래서 내 삶에서 참 향기가 날 때... 세상 사람이 우리를 존경한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며!


사도행전의 안디옥 교회가 그랬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던 ‘크리스천’이란 이름까지 만들어 붙이면서

처음에는 조롱하다 결국에는 성도들을 존경했던 것이다.



◑2.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다듬어 가시다.


▲23절,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비멜렉이 군대장관까지 대동해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것은

일종의 동맹/조약을 맺기 위해서 찾아왔다. 그 조약 내용은

‘나 뿐만 아니라, 내 자손에게도 거짓되게 행하지 않는다고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후대(후하게 대우)했다.

‘사라의 해프닝’이 있은 후, 떠나는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거주 허락, 양과 소등 가축, 종들, 은 1천 냥을 주었다. 창20:14~15


내가 너를 그렇게 후대한 것처럼, 너도 나와 우리 자손들에게 후대해달라고

요청하고, 그렇게 하기로 맹세하자고 조약을 제안해왔다.


당시는, 팔레스타인에 왕권이 확립되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부족장들은, 자기 통치하는 영역 가까이에 큰 세력을 가진 부족이 있으면

그들과 동맹을 맺어서, 상호 안전을 도모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가나안으로 왔는데, 그 즈음에는

가신318명을 이끌고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싸워서 이긴 전적이 있었다. 창14장

그러나 지금 창21장, 아비멜렉과 동맹을 맺을 때는 아브라함이 백세가 넘었다.

아마도 그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가신/종들/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와서 동맹과 조약을 먼저 제안한 것이다.


▲24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지금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거짓되게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앞으로는 거짓말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격인데,

과거에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인 일과 관련된 일이다.(절반 거짓말)


여러분, 성도가 진실하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성도가 이런 (일종의) 수치를 당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다. 그 부르심 때문에,

아브라함은 아무 공로 없이/은혜로 ‘믿음의 조상’이 되는 외적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는, 그 ‘믿음의 조상’에 합당한 인격으로 다듬어져가야 했다.

‘거짓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가 (거울처럼) 비추는 하나님이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비골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본다.

아브라함의 인격을 점점 더 다듬어 가시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


★거짓 없는 믿음

사도바울 주위에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기 아들로 여겼던 사람은 ‘디모데’였다.

바울이, 디모데를 자기 아들로 여길 정도로 사랑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

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1:5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은,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상속된 것이었다.

로이스와 유니게가 먼저 ‘거짓 없는 믿음’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 부모들의 영적 상태가.. 자녀에게까지 물려질 수 있다.

자녀를 신앙적으로 올바로 키우는 길은.. 부모가 먼저 주님 앞에 정직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 체결


▲25절,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빼앗다’(히. 까잘)는 .. 폭력을 써서 강탈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늑탈했다’고 번역했다.


아브라함이 팠던 그 우물(브엘세바)이 블레셋 아비멜렉 관할 영토 내(가까이)에 있으므로

그 지역 사람들이 기득권을 주장하며 빼앗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6절,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7절,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 두 사람이 서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서로 거짓으로 행하지 않고, 서로 후대하기로 동맹을 맺었다.


‘언약을 세우다’는 히브리어로 ‘카라트’인데, ‘자르다, 베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계약을 할 때, 짐승을 잡아서 중간을 잘랐다/갈랐다.

그리고 그 갈라진 짐승사이로 계약당사자들이 지나가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만약 이 계약을 어기면, 이 짐승이 갈라진 것처럼,

그렇게 상대방을 갈라도 아무 이의 없다는 뜻이었다.

‘자기 목숨을 걸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3. ‘후대를 위한’ 확실한 언약을 맺었던 아브라함


▲28~29절,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30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절,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27절에서 ‘상호평화조약’이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암양 새끼 7마리를 또 가져왔다.    따로 놓으니...

그러자 아비멜렉이 의아한 눈초리로 이게 뭐냐고 묻는다.    어찜이냐...


아브라함이 이유를 말했다. 이것 받고,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그래서 <이 우물은 아브라함의 소유다>고 두 사람은 맹세했다.


25절에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그 우물을 강제로 빼앗았는데,

아브라함은 암양새끼 7마리를 주고, 확실히 자기 우물로 확증한다.

그래서 그 우물 이름을 ‘브엘세바’(맹세의 우물)로 지어 불렀다.


*상식적으로는, 암양새끼 7마리를 내놓아야 할 측은 아비멜렉이다.

왜냐하면 남이 판 우물을 강제로 빼앗아서 지금까지 사용해 왔기 때문에

보상금을 내어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자기가 판 우물을 도로 찾으면서, 괜히 돈을 내고 있다.


*비슷하게, 창23장에서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4백 세겔 주고 산다.

그 땅 주인이 거저 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땅 주인을 3번씩이나 설득해서 돈을 주었다.

그래서 이 막벨라 굴이 아브라함의 것이라고, 만 천하 앞에서 맹세한다. 창24:16~18


이런 (과도한 대가 지불의) 이유들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자신이 떠난 후에, 더 이상 분란이나 다툼이 일어나기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기 세대에서, 모든 일을 철저하게 처리해 두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도 죽기 전에, 이렇게 모든 것을 철저하게 처리해 두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우물쭈물하다가 급작스럽게 맞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그 때는 정리/처리하려고 해도, 자신이 혼수상태라서 정리/처리 못 한다.

우리는 오늘 밤에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본향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철저한 일처리는.. 눈여겨 볼 만 하다.



▲아브라함이 판 우물 때문에, 후대(이스마엘)가 목숨을 건지다.


창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났을 때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져서, 모자가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되었다.

그 때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열어주셔서,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물을 마시고, 그들은 목숨을 건졌다.


황량한 광야에 무슨 이정표나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넓은 광야에 조그만 샘물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열어주셨다고 했다.

없던 우물이 그 때 솟아나온 것이 아니라, 있던 우물을 그 때 발견한 것이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후대를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다. 

 

반대로 사울 왕은 ‘후대를 괴롭히고 죽이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 아버지 때문에, 그 세 아들도 같은 날 같이 죽고 말았다.

아브라함과 반대 경우다.


오늘 우리 부모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자녀들도 그 혜택을 입어서.. 다 잘 된다.

그러나 사울처럼, 그 부모가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맺으면

애꿎은 자식들도 그 저주를 입어서.. 다 잘 못 될 수 있다.


위에서 디모데의 외조모와 어머니도

아들 디모데에게 ‘거짓 없는 믿음’이란 아름다운 유산을 남겨 주었다고 살펴보았다...



◑4.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


▲32절,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33절,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여기서 ‘영원하신 여호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기복적 신앙으로 신앙생활을 출발한다. 기복신앙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많은 뜻 중에, 자기 뜻과 일치되는 것/자기가 원하는 것만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신앙이다.

그런데 지금 창21장 상황은, 아브라함 신앙의 절정기이다.


그가 되돌아보니, 하나님은 자기 일생에 ‘자기 뜻과 일치하지 않게’ 일하심을 보았다.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명령

-경수가 끊어진 사라를 임신시키시는 일 등을 통해 볼 때

-또한 우물을 빼앗겼다가도, 때가 되니까 자기 우물이라고 당당하게 아비멜렉과 맹세하게 하시는 등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은.. 인간(아브라함)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아브라함이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는데,

‘영원하신 여호와’라고 부른 이유가

아마도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입술에서 나온 신앙고백이었다고 본다.                         (*영원한 : 창17:7, 8절 참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는.. 다른 성경의 용례에 비추어 볼 때 ‘예배를 드리다’로 보면 무난하다.

 

▲34절,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여러 날'은 '오랜 세월'을 뜻한다. 계산해 보면 최소한 10년 이상이다.

 

'지냈더라'(구르)는 뿌리내리고 정착했다는 뜻이 아니라, 나그네가 '잠시 체류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본향을 사모하는 신앙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에 뿌리내리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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