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세상을 섬기는 사람 편집자 칼럼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를 가지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그런 명제를 위주로
그 소설/영화가 전개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세계에서는
‘<말씀>을 가지는 자가.. 세상(하나님 나라)을 지배한다’ .. 이런 명제가 성립합니다.
무슨 지배욕에 불타오르라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가지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서, 세상을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는, 안타깝게도
그런 일에 전심전력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신에 다른 현상(현실)적인 일들에 전심전력하는 사람들은 늘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다음 세대에 ‘기독교 약화’ 및 ‘서구 교회 갔던 길 답습’이 될 것입니다.
현상적인 일(겉)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본질(속)이 허약해지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고백에 의하면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말씀이 다 하였다.
나는 그저 말씀을 연구하고.. 그 이외에 시간에는 쉬었다.’
고 했습니다. <설교에서 들은 말
물론 여기에서 '쉬었다'는 말의 뜻은
정말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을 연구하는 일이 너무 고되어서/너무 열심히 하다보니 힘들어서
중간 중간에 쉬었다는 뜻입니다.
루터의 저작물은, 당시 인쇄술의 인프라가 유럽에 갖춰진 시기와 맞물려
약2~3주 만에, 유럽 전역에, 나오는 족족 보급되었다고 합니다.
한 마을에 전달되면, 즉시 인쇄해서 그 사본을 이웃 마을들로 전파했고, 거기서 또 인쇄하고 또 전파하고...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종교개혁을 주체는, <루터>가 아니라,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발이 있거나, 바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루터가 해석한 <말씀>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인쇄물이 되어서 퍼져나갔으며
그 <말씀>이 결국은 종교개혁을 이룬 것입니다.
▲무디 선생님의 부흥운동
1백만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는 19세기말~20세기 초의
무디 선생님은 당대에 가장 큰 일을 하신 주의 종입니다.
(제가 교회사학자도 아니고, 깊은 연구를 한 것도 아니라서 대단히 조심스럽지만)
루터의 저작도 많고, 칼빈도 물론이요, 웨슬리의 저작도 많습니다.
또 깊이도 있고, 오늘날까지 그들이 저작들이 여전히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디 선생님은 상대적으로, 그런 면에서 좀 약한 것 같습니다.
국내에도 무디 선생님은 ‘생애’ 위주로 소개되고 있지,
무디 선생님의 설교, 무디 선생님의 사상.. 이런 것은, 저는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무디 선생님의 설교집을 읽어보았는데, 극히 일부만 접해본 것이지만
제가 읽어본 것은 별 내용이 없었습니다.
아마 번역서라서 그랬겠지요.
그러나 무디와 함께 활동했던 생키나 크로스비 여사의 찬양은 아직 내려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이런 말도 저는 들어보았습니다.
‘무디의 부흥운동은.. 생키의 찬양이 사실 그 핵심이었다.’)
▲정리하면
물론 무디 선생님은 <활동>위주로, <부흥운동>을 이끄신 부흥사이십니다.
부흥운동을 이끄신 활동가에게, 무슨 <영향력 있는 저작>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식한/ 또한 무지한 요구입니다.
사람마다 은사가 다르고, 무디 선생님은 자기의 고유한 은사로 놀랍게 쓰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1백만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고, 여러 부흥운동을 이끄셨습니다.
더욱이 그의 부흥운동은 학생자발운동SVM의 촉진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크나큰 열매들이.. 그 분의 신앙과 삶과 인격을 웅변해 줍니다.
그러나 그의 부흥운동은, 무디 다음 세대에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20세기 초에 침체기가 왔습니다)
조심스런 관측이지만, '현상'에 보다 치우친 부흥운동이 아니었나.. 봅니다.
강력한 말씀운동이란 본질은 서서히 약화되면서, 사람 많이 모이고, 찬양으로 은혜받는 부흥회였습니다.
당대를 위해서는 ‘현상’이 필요하겠지만, 후대를 위해서는 ‘본질’이 필요합니다.
사실 무디의 부흥운동 이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이런 기록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시대가 사람들이 많이 모일 인프라를 아직 갖추기 힘들었다고 봅니다.
그저 마을단위로, 동네 단위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마이크도 없이 촛불켜고 부흥회 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자연히 ‘현상’ 보다는, 말씀 위주의 ‘본질’적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은혜스러운’ 부흥운동은
그 시초가 아마 <무디의 부흥운동>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합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에 너무 치우쳐서, ‘말씀’운동을 등한시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현상이 오늘날 21세기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에 집중할 때, 다음 세대에 기독교의 약화는 불 보듯 뻔합니다.
‘다음 세대’까지 갈 필요 없고, ‘다음 십년’decade입니다.
일례로, 요즘은 ‘설교를 가급적 안 하는 것이 미덕’인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하기야 (만약) 별 내용도 없는 설교를, 자주 쏟아낸다면 그것도 공해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가급적 안 하는 것도 미덕’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오늘날 말씀 약화 추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종들은 ‘말씀 운동’보다 ‘여러 현상적인 운동’에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둘 다 한꺼번에 할 수 없으면... '말씀을 연구하는 쪽'에 사람들이 더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모자라거든요.
이제 우리는 무디 이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디 선생님은 나름대로 쓰임 받으신 분, 폄하 아님)
현상에 치우친 부흥이 아니라,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는 부흥 말입니다. (현상도 필요합니다.)
또한 ‘반지를 가지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을 곱씹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지고 성실하게 세상을 섬기는 분들이 많이 나와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약화된 부흥' ... 10년만 지나면 물거품됩니다.
지금 우리가 그 열매를 거두고 있지 않습니까!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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