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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등불 1940

LNCK 2009. 6. 15. 19:59
 

◈하나님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삼상3:1~10                            09.05.24.설교녹취

 

 

◑1. 하나님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삼상3:3


▲세상의 모든 등불은.. 언젠가는 꺼지게 되어 있다.

권력의 등불.. 한 때 환하게 타올랐다가도.. 다음 권력이 되면 그 불이 꺼져버린다.

물질의 등불.. 부자 3대 이상 가기 힘들다고 한다.

내가 기대는 사람(빽)의 등불.. 10년 이상 가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있으니.. ‘하나님의 등불’이다.

이 등불은, 어떤 세찬 바람이 불어도, 어떤 핍박이나 불황이 와도.. 절대 꺼지지 않는다.


▲엘리 제사장 때.. 이스라엘의 모든 등불이 꺼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참된 지도자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심히 절망적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고, 적들은 호시탐탐 국경을 넘보고 있었다.

이 시기는 사사기의 말기로.. 사람들의 영적인 눈이 감긴 ‘신앙의 암흑기’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등불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홀로 꺼지지 않고 밤을 밝히고 있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삼상3:3


하나님의 성소 안을 밝히는 7등잔은.. 아무리 깊은 밤이라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밤을 밝히는 여호와의 등불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다.

환한 새벽이 올 때까지, 절대 꺼지지 않고, 아침까지 타오르게 된다. 출30:7


▲어두운 세상 속에서 불을 환하게 밝히시는 하나님

천지창조 때, 온 세상이 흑암 속에 뒤덮여 있었을 때,

‘빛이 있으라’ 하시면서.. 하나님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을 창조하셨다.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땅이 캄캄해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시대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빛>을 밝히 비추어주셨다.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tu서 어두운 세상을 밝혀 주셨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4~5


▲역사 속에서 이 불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원수 사탄은, 이 ‘하나님의 등불’을 꺼뜨리기 위해 때로는 격심한 박해를 일으켰다.

그러나 로마시대 성도들은,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 동굴로 깊이 피신하면서

그 등불을 이어갔다. ‘하나님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터키의 갑바도기아 지역에 가도, 지하동굴 도시를 잘 볼 수 있다.

그 지하도시 속에서도,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때가 되자, 그 불씨가 살아나서, 온 세상을 뒤덮는 놀라운 큰 불길이 되었다.


중세시대에도 교권이 너무 득세해서, ‘하나님의 등불’이 꺼뜨려지는 때가 되었어도

하나님은 종교개혁을 일으키셔서, 그 등불을 다시 살려내셨다.

역사속에서 결코 꺼지지 않았다.


▲한국까지 이어져온 하나님의 등불

그 ‘하나님의 등불’이 120년 전에, 우리나라에도 도착했다.

온갖 미신과 악습의 어둠에 붙잡혀 살던 우리 민족에, 복음의 등불이 밝게 비추었다.

이 등불을 꺼뜨리려고,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준동을 했는지...

일제시대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이 불을 꺼트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고, 더욱 찬란하게 타올라서

오늘날까지 이 등불은 계속 이 민족위에 비추고 있다.


(적용) 우리는 자꾸 암담한 세상을 보면서 절망한다.

내 인생의 암담한 현실을 보면서도 쉽게 절망한다.

그러나 지금도 타오르고 있는 하나님의 등불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흑암의 세력이 준동하더라도, 하나님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고 빛난다.

그 등불을 인하여,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새로운 소망을 발견해야 한다.


10년 전에는, 경제위기로 인해, 이 나라와 복음의 불이 위태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그 등불이 결코 꺼지지 않았듯이.. 우리 각자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꺼진 적이 한 번도 없다.



◑2. 하나님의 등불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세상에 비추어진다.


▲성소에서 섬기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었다.

하나님의 집에서 섬겼던 사무엘이..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등불이 되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 여러분,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등불’이며, 오늘 ‘이 시대의 역사의 등불’이 된다.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관련글 클릭 : -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사무엘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어두운 밤을 밝힐 계획을 갖고 계셨다.


골리앗의 출현으로 모두가 벌벌 떨고 있었다.

그 때 이스라엘의 등불은 사울 왕이 아니었다.

아무도 주목해 보지 않았던 어린 소년 다윗이, 바로 이스라엘의 등불이었다.


▲중세 암흑시대에는, 힘없어 보이던 수도사 한 사람 마르틴 루터가 등불을 환히 비추었다.

이전에 아무도 주목해 보지 그 한 사람이, 그가 그 시대의 역사의 등불이었다.

그 한 사람을 통하여, 복음의 빛은 다시 활활 불붙기 시작했다.


세상 역사가들이 ‘암흑시대’라고 말하던 그 때에,

마르틴 루터를 통해 비춰진 하나님의 등불로 인해

이후 유럽의 역사는 다시 씌어지게 되었고,

중세의 왕정이 막을 내리고, 근세로 이어지는.. 역사의 한one 변혁의 주체가 되었다.


▲비행기를 타면, 모든 승객들은, 한 사람에게 자기 생명을 맡긴다.

조종사 한 사람만 잘 하면,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가는 반면,

혹시나 그가 잘 못하면, 모든 승객들의 안전이 위협받는다.


그런데 그 조종사 한 사람을 훈련시키는데,

어떤 사람의 계산에 의하면.. 무려 87억원이나 든다고 한다.

한 사람에게 그토록 많은 투자를 해서, 조종사를 길러낸다고 한다.


우리 하나님이, ‘한 사람’을 길러내시는 방식을 보시면.. 그와 비슷하다.

정말 그 한 사람을 길러내시기 위해.. 정말 많은 투자를 하신다.

그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적용) 오늘도 마치 비행기조종사처럼,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가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응답 받는 사람은

그 한 사람은 오늘도 한국과 세상을 새롭게 하는 희망이 된다.


우리는 작게, 우리 가정에서부터, 내가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한 사람이.. 우리 가정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내 가정의 등불이 되어 계속 살다보면, 자연히 공동체의 등불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각 가정의 등불’들이 모인 교회는.. 이 시대의 희망의 등불이다.

이 세상에 희망이다. 옆 사람과 이렇게 인사하시라, ‘당신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미국에서 한 주일학교 교사가, 동네에서 놀고 있던 4명의 아이들을 전도했다.

그날부터 매 주일날 교회에 출석하면서, 아이들은 믿음으로 성실하게 자라났다.

그 때로부터 50년이 지나서, 연로해진 이 교사는, 자기 생일을 맞게 되었는데,

그날 조촐한 생일파티 그 자리에, 4장의 전보가 도착했다.


한 장은,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선교사에게서 온 축하전보였고,

한 장은, 미 연방은행 총재에게서 온 생일축하전보였고,

한 장은, 미 대통령 보좌관에서 온 축하전보였고,

한 장은, 후버 미 대통령으로부터 온 생일축하전보였다.


이 네 사람은, 50년 전에 동네에서 같이 뛰놀다가

한 주일학교 교사의 전도를 받고,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계속했던 것이다.

한 명의 보통 사람, 주일학교 교사가.. 놀라운 일을 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등불’이었다.


▲하나님의 집에 있던 사무엘과 같은 여러분들 되시기 바란다.

사무엘이 ‘하나님 전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돌보다가

그는 당시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집으로 더 가까이, 더 자주 나오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한 사람이 나와서, 교회에 ‘하나님의 등불’(여러분)이 꺼지지 않도록 하고,

나아가 더 환히 비춰주셔야 한다.


더 많이 여러분의 각자의 등잔에 성령의 기름을 공급 받으시기 위해,

더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란다.

그래서 더 활활 타오르는 하나님의 등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린다.



‘하나님의 등불’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calling을 들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삼상3:10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끈기 있게 등불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그냥 자기 결심과 의기투합 정도로 살다가는.. 그 등불이 곧 꺼지고 만다.


사무엘이 그 시대의 등불이 되었던 이유는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음성을 듣는’ 체험이 있었다.


여러분, 성경 말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소망으로 충만해진다. 새 힘이 생긴다.

지난 한 주간 동안에도 우리는 절망의 소리를 한없이 들었다. ‘장사 안 된다, 힘들다’

그 때마다 힘이 더 빠지고, 더 절망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절망하다가도, 새 힘이 불끈 생긴다.

그 새 힘이.. ‘하나님의 등불’로서 계속 자기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한 음악 애호가의 열심

바하의 최고의 걸작은 ‘골드베르크를 위한 변주곡’으로 꼽힌다.

그런데 어떤 음악 애호가가 이 곡을 감상하는 자세를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내가 성경을 읽는 자세와 한 번 비교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그 곡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 먼저 마음을 준비한다.

내가 어느 날 그 곡을 듣기로 계획을 세우면,

그 이전 며칠 동안은, 다른 음악은 절대 듣지 않는다.

그 곡만 잘 감상하기 위해서다.


물론 지하철이나 길에서 여러 음악이 들려오지만, 가급적 나는 내 귀를 막아버린다.

그동안 내 귀를 아끼며 깨끗이 비워 두는 것이다.


마침내 그 날이 돌아오면, 당연히 일찍 귀가한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은 가급적 일찍 재우고, 아내까지 일찍 재우고,

화장실도 꼭 미리 다녀온다. 음악 듣는 동안에 조급하면 안 되니까!


드디어 오디오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전화기, 휴대폰 다 끄고, 전등불까지 끈다.


드디어 레코드판을 올려놓고 듣기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멈추어서 듣지 않는다. 단숨에 다 듣는다.

(그 변주곡은 총32곡이라서 꽤 길다.)


그 곡을 들을 때는, 온 몸의 감각을 고추 세운 채

건반악기의 한 음, 한 음을 명쾌하게 따라가야 한다.”


▲이 글을 읽다가, 나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설교를 준비할 때), 이런 정성된 마음으로 하는가?

내가 정말 내 귀를 깨끗하게 비워두고, 다른 잡다한 것 안 들으려고 조심하면서,

그 시간에 집중해서 말씀의 음성에 내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부끄러웠다.

누구는 바하 음악 하나 듣는 데에도 온 몸의 감각을 곧추 세우고,

한 음 한 음 놓치지 않고 따라 간다는데,

내가 과연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는 어떠한가?... 마음이 이상해졌다.


우리가 설교를 듣는 자세는 과연 어떠한가?

1년에도 수 십 번, 10년이면 수 백 번인데,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닌가?

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무덤덤하게 말씀 앞에 나아온 것은 아닌가?

 

위 음악 애호가와 같은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자기 소명과 사명을 깨닫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등불’로서 자기 시대를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소명과 사명을 가진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어떤 암담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고서 벌떡 일어선다.


여러분, 오늘 힘이 다 빠지셨는가? 환경이 너무 절망적이신가?

하나님 말씀에 자신의 온 신경을 고추 세우시고

사무엘처럼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자세로 나아가시기 바란다.

상황이 절망적이 아니라, 사실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음성)을 듣지 못해서

지금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자는.. 다 살아나게 되어 있다.


▲여러분, <조스>라는 식인 상어 영화를 기억하실 것이다.

저 영화는, ‘상어’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사실은 ‘사람’에 관한 영화이다.


그 영화에 3종류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식인상어 사냥꾼 : 사냥해서, 상어를 제거해 주고, 돈을 벌려는 사람이다.

-식인상어 박사 : 상어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지역 경찰관 : 지역 주민을 상어의 위험으로부터 지키려는 사람이다.


여러분, 누가 식인상어 조스를 잡았는지 아시는가?

제일 나약한 것 같은 케릭터로 나오는 ‘경찰관’이다. 

우락부락하고 힘깨나 쓸 것 같이 나오는 ‘사냥꾼’이 아니었다.

상어에 대해서 잘 아는 ‘박사’도 아니었다.

<오직 주민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불에 탄 경찰관이.. 결국 ‘등불’이 되었다.

영화는 ‘사명감을 가진 자가 제일 무섭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을 뜻하는가?

‘사명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돈의 힘을 믿는 사람보다, 지식의 힘을 믿는 사람보다.. 사명감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등불로서, 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고, 사람들을 살려내려면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결코 지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명감은, 사무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음성을 듣는’ 체험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그런 음성을 들으려면,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위에서 한 음악애호가의 예를 든 것처럼, 아주 자세를 곧추 세우고 들어야

비로소 <음성이 들린다>는 것이다.                                                                                              ▣ 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