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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받으신 예수님 1939

LNCK 2009. 6. 15. 14:37
 

◈세례 받으신 예수님                  눅3:21~38                     09.02.15.설교녹취



◑순전한 기대감으로 들끓었다.


▲마음속에 상상력을 발휘해서 요단강을 가 보시라.

지금 사방 각처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꽉 차 있다.

그들은 매우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전한 기대감으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감격을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참회의 눈물로 목소리를 놓아서 울었을 것이다.


그런 순수한 자리에.. 기적도 자연적으로 뒤따랐을 것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좋은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 때 세례요한이,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을 기다리라고 말한다.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기다리라고 말했다.

당시 사람들의 신앙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순전한 기대감>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하나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절에도 그랬다.

예배의 은혜를 순전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준비찬송’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사경회나 철야기도회 때는 의례히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모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교회에 <순전한 기대감>이 사라져버렸다.

그만큼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종교화, 매너리즘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에, 제가 북경에 가서, 세례식과 성찬식을 집례한 적이 있었다.

성찬식에 쓰일 빵이 예배실로 입장하면

성도들은 벌써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집례자가 큰 빵을 손으로 딱 깨뜨리는데, 그리스도의 몸이 깨어지는 것을 상징한다.

그 때는 대부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오열했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죄송함과, 순전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 그런 성찬식이었다.


성찬식이 끝나고 세례식이 있었는데,

세례를 받는 분들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으로 벌벌벌 떨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전한 경외감>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세례요한이 전파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순전한 기다림/사모함>이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


마태는 족보를, 제일 서두에 마1:1절부터 소개하는데,

-누가는 족보를, 기다렸다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는 즈음에 소개한다.

-또한 누가는 족보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누가복음의 족보와 마태복음의 족보를 비교하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거의 같지만

다윗 아래로부터 달라진다.


마태의 족보는.. 다윗-솔로몬-르호보암 등 왕으로 이어지는 족보다.

누가의 족보는.. 다윗-나단(다윗의 19명 아들 중 1명)-맛다다로 이어진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반 머물 동안 6명을 낳았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머물면서 13명을 낳았다.

그 중 밧세바와 사이에 3째 아들이 나단이고, 4째 아들이 솔로몬이다.


▲1. 마리아의 족보  .. 보통 인간의 족보라는 뜻

많은 신학자들은, 누가가 엉터리 족보를 기록했을 이유는 당연히 없고,

아마 <마리아의 족보>라고 추측한다. 마리아의 족보란.. 보통 인간의 족보다.


왜 마리아의 족보를 누가는 기록했을까?

마태가 ‘왕들의 족보’를 기록한 이유는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실제를 말하자면, 예수님과 요셉 사이에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누가는 차라리 <마리아의 족보>가 더 예수의 핏줄에 가깝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 <마리아의 족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분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특별한 왕의 족보가 아닌, 그냥 ‘보통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참고로, 모계사회의 족보, 핏줄이 외삼촌을 중심으로 해서 내려가는 특징이 있는데,

누가복음이 그런 모계사회의 외삼촌 핏줄을 기록한 것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음.

만약에 마리아의 족보라면.. 여자 조상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삼촌 조상의 이름이 계속 나오게 되어 있음.. 모계사회의 특징 )

 

▲2. 이 사실은, 이 족보가 위치한 자리를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누가의 족보는, <수세를 받으신 사건>과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사건>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위치하는데,

<인간으로 수세를 받으시고> - <보통 인간의 족보로 태어나시고> - <보통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시다>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즉 <보통 인간 예수>를 강조하기 위해,

특별히 <수세 사건>과 <광야 시험>사이에 <족보>를.. 누가는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3. 족보는.. 타락한 인간의 본질이 <죽을 수밖에 없는 허무한 자, 부패한 자>임을 나타낸다.

동시에 구세주의 필요성을 강력히 요청한다.

 

하나님이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생김새를 닮은 인형’을 하나 만드셔서,

인형처럼 두고 보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창조의 능력과 통치의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

마치 하나님과 방불한 권세를 아담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자유의지를 갖고서, 선과 악 사이에서

스스로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는..

그런 완전한 독립적인 존재로..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다.


아담을 그렇게 존귀한 존재, 권세 있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이다.

그저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할 존재로, 아담을 프로그래밍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은 선 대신에, 악을 선택하고 말았다. 선악과를 따 먹었다.

그렇게 태어난 자손은, 그 죄의 영향으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하나님은 셋을, 아벨 대신에 태어나게 해주셨다.

셋은 에노스를 낳았는데,

‘에노스’란 말의 뜻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 부패한 자, 허무한 자>이다.


셋은, 아담 집안의 내력을 보면서, 타락한 인간의 본질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 부패한 자, 허무한 자>였다.


그래서 누가는, 아담~아브라함까지의 족보를.. 마태와 달리 삽입한 것일까?

아담부터~아브라함까지의 족보는..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다.


어쨌든 셋, 에노스까지만 살펴보았지만, 그 뒤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족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 부패한 자, 허무한 자>의 족보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현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동시에 구세주의 필요성을 강력히 나타낸다.

<자기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 부패한 자, 허무한 자>인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구세주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누가의 족보>의 세 번째 이유라고 본다.

그래서 그 족보의 끝에서 예수님이 등장한다.

그 족보의 끝에서, 예수님은, 먼저 완전한 (보통) 인간으로서,

그 보통 인간이라는 증거로.. 세례부터 받으시는 것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메시야


▲세례 받는 행렬 중에, 줄서서 끼어 계셨던 예수님

요단강에 세례 받으러 나온 사람들 중에는 각양각생의 사람들이 다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줄 속에, 예수님도 한 사람으로서 끼어 계셨다.


그렇게 간절히 기대감을 갖고서 모두들 <내 뒤에 오실 그 분>을 기다렸는데,

정작 사람들은, 너무나 가까이 그 분이 계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

성공적인 것, 거창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어쩌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임하기도 하신다.


▲예수님은 너무나 겸비하게,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다.

산들이 진동하기는커녕, 열방이 벌벌 떨기는커녕

굉장한 대격변이 일어나기는커녕, 예수님은 너무나 조용하게 오셨다.


유대교에서 또한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를 멸시하기 위해서

자기들 회당 벽에 이렇게 글을 써서 걸어놓는다고 한다.

‘신은 누구를 낳지도 않았고, 누구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예수님을 겨낭한 말로서, 예수가 신神일수 없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신이, 거룩하지 못한 존재와 접촉하는 것 자체가

더럽고 경멸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거룩한 신이, 더러운 인간과 접촉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뒤집어 말하면, 우리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그 크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정말 죄많고 더러운 인간과 접촉하셨다는 것이다.


1994년에, 인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청년이 한 자매를 만나서 서로 사랑이 싹텄는데,

둘이 서로 신분의 차이 때문에 도저히 결혼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수드라(가장 낮은 계급) 계급의 청년이,

그 수드라 보다 더 낮은 ‘불가촉천민’ 계급과의 결혼이 어렵게 된 것이다.

(*불가촉 천민 - 그들과 닿기만/접촉만 해도 불결해 진다는 계급의 사람들)


그래서 이 남녀가 멀리 도망쳐 가다가, 결국 붙잡혔다.

남자는 돌에 맞아서 사망했고,

여자는 불붙은 장작 위에 태워져서 사망했다.


이렇게 20세기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기의 정결함>을 보존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분리의식을 끝없이 갖는다.

그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람들이 .. 바리새인 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셔서

당시 사람들이 접촉할 수 없다며 떼어 놓았던

문둥병자, 창녀, 세리.. 이런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접촉하셨다.


▲예수님의 구원 방식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 방식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 죄인의 모습(성육신)을 입으셨다.

세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 세리의 친구가 되셨다.


창녀와 바리새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 그들과 같이 식사하셨다.

그들과 같이 싸잡아 죄인으로 비난당하시는 것을 ... 회피하지 않으셨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 죄인처럼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오늘날 ‘교회가 깨끗해야 전도가 된다’고 하다가.. ‘분리주의’로 나가면 .. 잘못이다.

교회가 깨끗해야 하지만 ... 동시에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또한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거창하고 화려한 곳에

대단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도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는..

어쩌면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성령의 역사는.. 적어도 자기 스스로 .. 거창하고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는다.

만왕의 왕이 스스로 ‘볼품없는 사람’이 되셨는데,

볼품없는 사람이 ‘무슨 군주’처럼 자신을 치장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혹시 그럴 수 있을지 모르나.. 기독교에서는 안 된다. 본질에 정반대된다.


오늘날, 눈에 크게 안 띄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주축이요, 힘’이다.

이런 분들은, 자기 신세 한탄 말고, 보통 사람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래도 성공하고 싶은 분들은 ... 사업business 쪽으로 전업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사역자는 .. 본질적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십자가 지고 희생하고 죽는 방식이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