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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하나님의 자비로 1952

LNCK 2009. 6. 23. 10:50
 

◈아버지의 자비로                         눅6:27~36                       09.05.31.설교녹취



◑신앙생활은.. <매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반적인 사실을 먼저 여러분과 나누려고 한다.


▲신앙생활은 어려우면서도 쉽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일주일에 한 번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별 다른 어려움이 없겠지만,

정말 하나님의 백성답게 철저히 신앙생활 하려고 하면... 쉽지 않고, 어렵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신앙생활이 그리 어렵지 않는 것 같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물론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예수 없이 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쉽고 가볍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내 힘으로 해보려 할 때.. 그렇다.


신앙생활을.. 내가 하려고 하면 힘들다.

멍에는 큰 소와 작은 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함께 메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작은 소(나) 한 마리가 혼자서 낑낑 메고 가려하니까.. 힘든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큰 소와 작은 소 두 마리가 함께 멍에를 멜 수 있는가?

예수님과 내가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님께 딱 붙어서 가는 것이며,

딱 붙어서 동행하는 것이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그리 힘들지 않다.

말씀을 듣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으니까.. 신앙생활이 힘들지

듣고 순종한다면..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


오늘이 성령강림주일인데, 성령님께서 하시는 중요한 사역 중 한 가지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이다.  요14:26                         

그래서 그 말씀을 순종케 하신다. 그 사람이 ‘성령의 인도 받는 사람’이다.


▲신앙생활은..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잘 못 듣는다는 것이다.

왜 못 듣는가?

내 고집, 내 편견, 내 지식 때문에 못 듣는다.


또한 말씀을 들어도 순종을 못 한다. 왜 못 하는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또한 환경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내가 겪게 될 어떤 현실이 더 두려우니까.. 살살 피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말씀을 순종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고, 손해 볼 각오가 필요하지만

그것에 순종하는 길이.. 가장 지름길이요, 가장 편한/쉬운 길이다.

이 때 ‘하나님의 영광’이 제자에게 임하게 된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제자이다.

예수님의 음성은.. ‘듣는 자’에게 들린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눅6:27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다. 그래서 사사시대에 역사를 바꾸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빌립 집사도 성령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다. 그래서 광야로 가서 에티오피아 관리를 전도했다.

그 일을 통해 북아프리카 복음화에 교두보가 놓여졌다.


사도바울도 언제나 민감하게 성령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다.

대표적으로 ‘드로아의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로 나아간 것이

복음이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 쪽으로 서진하게 되는.. 역사의 변혁을 가져왔다.


▲오늘 하나님 음성 못 들으면.. 그것으로 꽝이다.

불교에는 어떤 경지가 있다고 한다. 득도하는 경지인지, 부처가 되는 경지인지...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는, 그런 경지가 어떤 의미에서 없다고 본다.

아무리 교회의 수장首長이라도 타락할 수 있다. 영성은 그의 지위하고 별 상관없다.


아무리 3~40년 경건하게 살던 사람이라도,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오늘 넘어질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 매우 철없이 보이는 청소년도

오늘 그가 주님의 음성을 올바르게 듣고 순종한다면

그는 매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내가 어떤 경지에 올라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차별된 존재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타락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목사, 장로가 되어서 그런 생각이 들든지

-내가 큰 교회를 지어서 그런 생각이 들든지

-내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해서 그런 생각이 들든지

-내가 기도해서 사람들이 많아 치료되어서 그런 생각이 들든지

-책을 잘 써서 그런 생각이 들든지

-내 신앙연조가 이제 50년을 넘어서 그런 생각이 들든지 ... 다른 어떤 경로로든지


‘내가 어떤 경지에 올라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차별된 존재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오늘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작년에 내가 그 음성을 많이 들었다’가 아니다.

‘10년 전에 내가 놀라운 역사를 많이 일으켰다’가 아니다.

<오늘> 음성을 듣고 순종하지 못하면... 나는 타락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원로들의 그간 쌓아온 경륜과 노고를 깊이 존경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분을 이해해 드려야 한다.

‘그 분도, <오늘> 하루 순종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분이라는 것을...’

마음을 다해 존경하고 본받아야 하지만

혹시 그가 실족하는 일이 있을 때.. 이해해 드려야지, 실망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신앙의 노장도, 단 하루도 경계를 늦출 수 없다면

저 같이 젊은 목회자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음성을 분변치 못하거나, 분변해도 거기에 불순종하면

그냥 꽈당 넘어진다.’

문제는, 넘어지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다시 일어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오늘 그 음성을 듣고, 오늘 순종>하는 일이다.


▲중세 교회가 타락한 이유

(천주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보다

사람과 교회의 전통을 더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 사람은 무슨 수도원장이니까 권위가 있을 거야’

‘저 교회는 3백년 전통을 가진 교회니까 권위가 있을 거야’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사람’과 ‘교회’의 권위에 너무 순종한 나머지

‘하나님 말씀 자체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 결과는 타락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사람’과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자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매일 순종하지 않으면

그 어떤 높은 권위의 ‘사람’도, ‘교회(의 전통)’도 ..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해 우리가 경각심을 갖고서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 각자 자신을 매일 조율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무오설’을 주창한 것은

당시에 편만하던 ‘교황무오설’에 반박하고 나온 것이었다.

개혁자들은, 권위를 존중하되, 종교적 권위 역시 ‘보통 사람(죄인)’에 불과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최고 권위’임을 인정했던 것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의 후예들이다.

개혁주의란..

①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비추어, 개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②어제의 은혜를 우려먹으면서 오늘을 사는 자가 아니라,

그 개혁(말씀을 통한 자신 스스로의 개혁)은 오늘도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한 번 개혁한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 개혁해 나가자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의 모토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오늘 본문 눅6:27~36절로 이제 들어가면, 본문의 주제는 다음 구절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6:36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켰느냐/안 지켰느냐’ 등

율법의 외적, 형식적 문제로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기준을 훌쩍 뛰어넘어서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너희들의 행동에 기준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규정한 율법적 조항을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다고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자기 스스로 신앙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주일날 안 빠지고, 새벽기도 안 빠지고...’ 그런 외적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같이, 나도 자비한지...’ 이런 내적 본질로 따져봐야 한다.


▲1. 자격 없는 사람을 사랑해야, 나도 주님께 자격 없지만 사랑받는다.  눅6:27~30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분노가 일어나야 한다.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분노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씀을 제게 주십니까?’ 라며 분노해야 한다.

(진짜 분노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갈등하는 사람이 말씀에 순종한다.)


위 말씀은, 한 마디로 ‘자격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아니 도대체 자격 없는 사람을 어떻게 나보고 사랑하라는 건지...?’


그러나 우리는 자격 없는 사랑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내가 ‘그 자격 없는 사람’을 대하는 정도로,

만약에 하나님이 ‘자격 없는 나’를 대하신다면

만약에 내가 그에게 베푸는 그 자비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자비가 내게 임한다면

<너무너무 끔찍하다>는 사실을.. 나는 잊어서는 안 된다.


긍휼 없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약2:13


▲2.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 자기를 항상 상대화 시켜야 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6:31


우리가 남을 종종 잘 비판한다.

그러나 상대화시키면, 그도 나를 잘 비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어쩐지 그것은 싫게 느껴진다.


저는 제가 누군가로부터 거절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 후로 일생에 제 신념이 되었다.

앞으로도 누가 나를 거절하더라도.. 나는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거절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공감 받지 못하고, 누군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 나는 기정사실로 여기게 되었다. 겸손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럴 때마다 또한 나 자신을 살펴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게 사람을 거절하며 대하기 때문이다.

항상 ‘그가 거절당해야 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내가 그를 거절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그를 대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특별히 내가 거절을 당하면, 그 일을 계기로 나 자신을 더욱 깊이 보게 된다.


▲3. 나 자신을 세상 사람과 차별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   눅6:32~34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우리는 죄인이지만, 죄인이 아니다.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지만, 그래서 여전히 죄를 짓지만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과는 차별되는 사람들이다.

그런 세상 사람들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어지는 말씀도 같은 뜻이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눅6:35~36                                              ▣ 크리스천 삶(리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