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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에 들어갈 때에만 깨닫는다 1960

LNCK 2009. 6. 28. 09:25
 

◈성소에 들어갈 때에만 깨닫는다                  시73:1~28                    09.05.31. 설교녹취


◑아삽의 신앙적 갈등과 질문


▲시73편은, 아삽이 쓴 시라고 성경에 씌어있다.

아삽은 대상25:1절에 보면, 성전에서 찬양대를 지도했던 찬양인도자였다.

아삽은 다른 시편도 더 지었다.

이렇게 시편을 써서 성경에 기록할 정도면, 깊은 영성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찬양인도자들은, 찬양으로 예배를 수종들던 사람이기도 했지만,

또한 예언자들이었다. 예언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면, 그들은 예언으로 찬양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들은 시편 성경에 포함되었다.


▲아삽은, <악인의 형통>을 보고 크게 시험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①악인의 형통

시73편의 내용을 보면,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질문을 쏟아내고 있다.

다분히 회의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다.


1절,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절,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더욱이 악인들은, 자신들을 징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

11절,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아삽의 실족과 불평은 12절에서 극에 달한다.

12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②악인은 형통한데, 자기는 도리어 곤고함

그래서 아삽은 깊은 회의에 빠진다.

13절,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악인의 형통에 비해, 아삽은 너무 안 풀리는 자신을 보면서.. 한탄한다.

14절,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이렇게 종일토록 얻어맞고 잠만 깨면 받는 것이 책벌일 바에야? :공동번역)


③그렇지만 자기 입을 조심한 아삽  

15절,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나도 그들처럼 말하며 살고 싶었지만 그것은 당신 백성을 배신하는 일이겠기에)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 아삽은, 자기의 회의를 다 발설하고 싶었지만

예배를 인도하는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다른 백성들이 다 실족할 것 같아서.. 아삽은 자기 입을 꾹 다물고 조심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 고생이 심했다.


16절, 혼자 생각하며 깨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이 아프도록 고생스러웠습니다. (공동)


아삽은, 자기 마음에 그런 격심한 신앙적 회의와 갈등이 있는데도,

자기 직분 상(찬양인도자)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직분이 호구지책이라서 괜히 부정적으로 말했다가 밥줄 끊어질까봐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자기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려고 그랬는지... 어쨌든 혼자서 냉가슴 앓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보면, 대충 대충, 대강 대강 하면서도

잘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 같은데,

자기는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데도... 아삽처럼 곤고한 성도님들이 많으실 것이다.


그러면 회의에 빠진 아삽이 얻은 해답을, 한 번 같이 성경을 읽어봅시다.



◑아삽이 깨달은 해답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해답을 얻었다.


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요,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다.

즉 깊은/친밀한 하나님과의 교제관계에 들어간 것을 뜻한다.


그가 ‘악인의 형통’을 보고 실족했었는데,

이제는 사람/상황/환경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주목하고, 그 임재 앞에 대면하게 된다.


이것이 key이다. 그 때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 도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 도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한 구름(임재)’에 내가 압도될 때 ... 내 시각/생각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그 영광의 빛’앞에 설 때 ... 내 세상적 시각과 판단이 사라지게 된다.

이 때 비로소 내 영안이 열린다.

내가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

이 모든 반전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일어난다.


▲1. 아삽이 성소에서 새롭게 깨달은 점1 - 저들의 결국


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악인의 형통’을 보고서, 아삽은 마음이 괴로웠다.

하나님께 대한 회의와 질문이 자기 마음속에 많았었다.


아삽은 성소에서.. 이제 <영원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 시각으로 보니.. 악인이 땅에서 <잠깐> 잘 되는 것은 ..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여러분, 세상 불신자들도 ‘인생은 잠깐, 나그네’라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잠시 잘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부동산을 늘이며 부자가 되는 것도.. 마치 옛날 아이들의 ‘땅따먹기’ 놀이와 같다.

거기에 너무 치심하면 안 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대면하지 못하면

자꾸 세상이 커지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대면하여 보면

세상은 작아지고, 하나님이 크게 보이신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꾸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에 시험이 드는 이유가 뭔가?

‘세상이 너무 크게/화려하게/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자기 신앙이 병든 것인데,

오히려 하나님이 주무시고/무기력하신 분으로.. 오해하고 불평한다.

‘냐는 우째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하며...


‘저들의 결국’을 아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들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타까워할 일이다.


18절,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절,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저들의 부귀는 일장춘몽)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영생>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영생>을 얻지 못하는 악인이, 이 세상에서 형통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눅9: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영생)과 바꾸겠느냐  마16:26

  

▲2. 아삽이 성소에서 깨달은 점2 - 자신의 참 모습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비참하게 노래하던 아삽이

성소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에,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23절,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여러분, 부귀, 영화를 누린다고 .. 사람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사람의 행복은.. 오직 영혼의 만족에서 온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만약에 부귀와 영화가 부족해서 ..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 속는 것이다.

부귀와 영화가 넘치는 사람(솔로몬 같은)에게 물어보시라, 정말 행복하시느냐고?


부귀와 영화는 사람을 거기에 ‘중독’되게만 만든다.

있는 사람이 더 밝히게 된다. 아직 부족하다고... 결코 채울 수 없다.


오늘날 교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이런 ‘본연의 신앙적 행복’을 가르치지 않고

‘부귀와 영화’가 행복을 준다고, 그래서 더 부르짖으라고... 일각에서 가르친다.

그것은 심하게 말하면..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것이다.


▲어렵고 위태한 때가 닥쳐도,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드신다.

사람의 참 행복은 ..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라고 고백할 때이다.

내 속 영혼의 텅 빈 공간에,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질 때..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8~39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주는 사람... 세상에 두려울 것이 전혀 없다.

다윗이 그 담대함으로,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시편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잔치)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원수의 목전에서 나를 높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느낀다는 <불안>

그것의 해소는 <부귀, 영화>가 아니다.

<주의 손>이 자기를 붙으신다고 확신하는 사람만이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된다. ... 그래서 이것이 <참 복>이다.


▲망가진 도로는, 하나님께로 달려 나가는 지름길

미국 복음성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God blessed the broken road  하나님은 망가진 길을 축복하셨어

That led me straight to you 그 망가진 길은 나를 하나님께로 곧장 보내주었어!


내 인생길에 여러 가지로 경험했던 ‘망가진/실패한’ 일들

그 일들이 오히려 내가 하나님께로 직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간증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는데,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의 군대가 뒤에서 추격해 왔기 때문이다.

만약에 바로의 군대가 뒤따르지 않았다면,

물이 벽처럼 서 있는 홍해 바다 속으로, 들어갔을 리가 없다.


고전10:2절에, 그들은 거기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홍해를 향해 들어갔던 것이다.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으면서’ 비로소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3. 아삽이 성소에서 깨달은 점3 - 축복의 진정한 의미

 

25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복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하늘에/땅에 다른 복은 없다.

 

26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아삽은,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축복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자기 육체와 마음은 쇠약해 가지만... ‘주님 그 자체의 축복’은

자기 마음속에 더욱 반석과 같이 영원히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환경/처지에 어떤 요란, 소동이 생겨도 ...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으시니까!

‘반석’이란 뜻이 무엇인가? ...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고, 자기 복으로 삼는 사람은... 결코 요동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참 복’이며

그것은 ‘성소에 들어갈 때에만’ 깨닫는다.                                                       ▣ 예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