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연도 알 수 없음

냉수한그릇 - 강력한 회심이 나타나야 구원 1983

LNCK 2009. 7. 13. 20:27

◈강력한 회심이 나타나야 구원 받습니다          고후13:5     -인터넷 설교 스크랩, 정리, 축약, 동영상 보기- 

                                                                                     -폴 워셔, <현대교회를 향한 10가지 기소장> 중 2/4-

 


 

 

◑4. 네 번째 고발, 중생의 교리에 대한 무지   


▲너무 특정 교리만 주장하지 마십시오. 두루 보시기 바랍니다.

칼빈주의자도 있고, 아르미니우스파도 있고, 그 중간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칼빈과/ 웨슬리와/ 레이븐 힐과/ 토저와/ 스펄전과.. 모두와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입장을 취했든 간에

‘구원’은 어떤 설교자에 의해 단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광대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나는 <구원이 하나님의 일이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여러 입장의 강조점이 약간씩 다르지만,

너무 한쪽만 강조해서 가르치거나/배운다면.. 어쩌면 우리는 극단적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이 필요하지만, 너무 거기에 기계적으로 얽매이면, 복음의 진리에서 이탈할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의 중생하게 하시는 일에는

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 타락한 상태의 인간으로부터..

사람을 새롭게 재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중생하게 하시는 일이, 천지창조보다 더 놀라운 역사라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 구세주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영혼이 영원한 죽음에서, 새롭게 살아나고,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캠벨 몰간이 그 위엄 있는 강대상으로 설교하러 올라갈 때

그는 이렇게 스스로 되뇌었다고 합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들 앞의 양같이..”

그러니까 자신을 완전히 죽여서, 온전히 성령의 도구가 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몰간은, 광대하신 중생시키시는 성령의 나타남이 없이는

자기가 하는 모든 말이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대언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이 도살당한 양처럼 죽기 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강력한 설교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설교에 ‘중생시키는 성령의 나타남’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아주 메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에 서 있는 에스겔입니다.

그 뼈들은 아주 메말라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에스겔처럼 예언해야 합니다. 

“마른 뼈들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 이 마른 뼈들에게 불어 살게 하라!” 겔37:9


이 말라 죽은 영혼들 위에, 생기가 불어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 이것을 굳게 붙잡는다면

이 나라에서 전도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이 행해지고 있는 조작manipulation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기를 선포할 것입니다.


중생의 교리에 대해, 웨슬리와 휫필드가 전한 것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이 직면했었던 상황에서, 그들이 전했던 말씀을 연구해 보십시오.


당시 기독교 문화에 속했던 영국과 미국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이 철저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었습니다. 왜 그렇게 믿었습니까?

아마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았고요, 가끔씩이라도 교회에 참석했고,

자기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기는 그렇다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중생은 그 시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권위가 주어진

어떤 교리와 맞바꾸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의 삶에서 거의 마귀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속마음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웨슬리가, 휫필드가 나타났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바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영적 삶의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고후13:5

당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함을 받은 것을 확실히 하십시오. 벧후1:10

여러분은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지난 몇 십년 동안 (이상한) 전도자들 때문에

거듭남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바꾸어져 버렸습니다.


<거듭남은.. 단지 언젠가 당신이 한번 결단을 한 적이 있고,

그것이 진지했었다>는 것만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 휫필드가 강조한 '거듭남'과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재창조'의 증거가 없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않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결단주의 decisionism 또는 지식적 동의는... 참된 중생/구원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것은 무엇입니까?

구라파나 미국 같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동적으로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기독교 문화 속에서 자라갑니다.

 

그는 타종교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일평생 기독교인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저는 그것을 ‘유아세례/모태교인의 위험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 그것이 위험한가 하면,

그런 종교적 문화에 눈이 가려져서

자기 일생에 <정말 진지한 회개> 한 번 하지 않고,

자기가 크리스천 된 것을/구원 받은 것을.. 의심없이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거듭해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그저 ‘죄에 대해 죄송한 마음’ 정도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뼈저리게 죄의 권능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고,

자기 삶이, 과거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권능을 절감하며, 죄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것은, 위로부터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런 것을 사모하는 마음/기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인도자를 입술로만 따라하는 ‘영접하는 기도’는

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지옥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불확실한데, 자기가 구원 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말합니다, “폴 와셔 형제, 당신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럼 나에게 성경을 보여주십시오.

누구든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전도하고/구원 받았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나한테 성경을 펴서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 적어도 한번은 ‘영접기도’를 했고

어떤 목회자가 그들에게

‘당신이 과거 어느 시점에 정말 진지하게 영접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그럼요. 나는 영접했기 때문에 구원받았고, 확신합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귀처럼, 불순종의 자식처럼 매일 살아갑니다.

일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결단주의 decisionism’ 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과거에 예수를 영접기도 할 때

그 때 자기 자신의 결심/영접기도가 진지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결심이 그 때 진짜로 진지했다면,

여러분은 그 때 이후로,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하는 삶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만약 계속 불순종의 삶을 매일 살고 있다면,

여러분이 그 때 받은 중생/구원은.. 확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그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시험하십시오. 자신을 살펴서 여러분이 믿음 가운데 있는지 보십시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13:5


▲구원의 증거는.. 매일의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매일의 삶에 증거가 없으면.. 불신자와 똑같이 살면.. 참된 구원이 아닙니다.


나는 구원이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은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그러나 중생(믿음)의 증거는

여러분이 중생하던 순간의 진지함이 아니라

여러분의 매일의 삶에서 계속해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오늘날 60~70%의 미국인들이, 자기들은 중생했고/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루에 몇 천 명의 아기들을 죽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비윤리성 때문에, 전 세계에서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정면으로 설교자들에게 돌립니다.

 

 

◑5. 다섯 번째 고발: 비성경적인 복음으로의 초대


▲피상적 구원 초청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삶에 대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뭐라고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구요? 와, 굉장한데요.

나도 나를 사랑하거든요! 와, 이거 놀랍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세요?

나도 내 삶에 대해 놀라운 계획이 있는데요.

그러므로 만약 내가 그를 내 삶에 받아들이면

내가 최선의 삶을 지금 갖게 될 거네요? 이거 완전 놀라운데요.”


그것은 성경적인 전도가 아닙니다. 그것 대신에 다른 것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과 진리가 풍성하시도다.

그는 인자하시며,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신다.

그러나 그는 죄인에게 결코 형벌을 면치 않으실 것이다.  출34:7, 민14:18등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지만,

형벌 받을 자의 죄악은 결코 사하지 않으시고, 형벌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과 아울러 ‘진노의 하나님’도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사람이 성경적 기준이 없다면

자신의 죄에 대해 어떤 것이라도 깨닫지 못 합니다.


우리가 청중들에게 세속적인 것들을 부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소한 것들만 이야기한다면

청중들이 진짜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올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라고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에 ‘당신은 당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완전한 가르침으로 설교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부터 그에게 복음은

그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십자가 죽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심각한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면.. 안 됩니다.

몇 년 전에 나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였습니다.

의사가 들어와서 “이봐요, 바바라, 당신은 당신에게 암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안 그렇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너무나 심각한 문제를, 마치 아무런 문제가 아닌 듯이

의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사람은.. 사실 ‘암 판정’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피상적/표면적으로 대합니다.

무게도 없고 엄숙함도 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죄를 강력하게 책망합니다.

우리는 강력한 문제를, 강력하게 얘기해 주어야 합니다.

“선생님, 당신에게 끔찍한 병폐가 있고, 영원한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단지 (부드럽고 친절하게)

“선생님,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서는, 죄를 강력하게 책망합니다.

“여러분이 한때 사랑했던 죄가, 지금은 미워지고

한때는 사모해서 품기를 원했던 그 죄로부터

지금은 마치 용을 피해 도망가는 것처럼 피해 도망가고 싶습니까?”하는 것입니다.


▲너무 복음을 소프트하게 전하니까, 제 아이들을 여름 캠프에 보내고 싶지 않고 싶습니다.

여름 캠프에 가면,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보여준 다음에

어떤 사람들이 서서 말하기를 “예수님이 너무 훌륭하지 않니?”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너희 어린이들 중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니?” 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누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기 원하니?”

“오, 저요!”


그리고 그 아이들은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종의 기독교 문화, 적어도 교회 문화 속에 자라고 있기 때문에

얼마 동안은 잘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강력한 말씀/신앙 교육이 없으니까, 사춘기 이후에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그들이 15~16세 때, 자기의지가 생기는 때가 되면

자기에게 매였던 줄을 끊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성인과 다름없는 죄악 가운데 살고

우리는 그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여전히 친절하게 말합니다.

“너는 크리스천이지만, 단지 지금 잠시 크리스천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을 뿐이야.

타락하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강력하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까 너는 그분에게서 떠나간 것 같구나.

너 자신을 살펴봐라. 너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아라.  고후13:5

네가 정말로 회심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구나.”


▲천국에 가기 이전에, 먼저 예수님을 원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부흥을 위해서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초(아마 신학적 기반을 뜻함)도 바로 세워놓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멀쩡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고 성경이 우리 앞에 있는데도

이런 문제들을 고치지 않아야 합니까?


천국에 가고 싶으십니까?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문제는 "천국에 가고 싶은가?"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열망하십니까?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정말 소중해졌습니까?

당신은 그분을 갈망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가고 싶은데, 자기 삶에 그리스도는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자기 삶에 간섭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을 원하십니까?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정말 소중하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갈망하는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이지,

단순히 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매일 죄와 씨름하는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도 죄와 씨름합니까?"

"예. 날마다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이 죄에 빠질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어떤 분들은, 크리스천이 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다 용서 받았다고,

자기는 변화되어서, 더 이상 죄와 씨름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잘못입니다.)


"크리스천이 평생을 열매 없이 세속적으로 평생동안 살면서도

진짜 크리스천 일수 있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내 일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순간들 중 하나입니다.

(아래 내용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겸허하게 들어봅시다.)


내가 캐나다에서 설교하고 있었을 때인데

거기는 알라스카에서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에는, 사람보다 북극곰이 더 많이 살았습니다.

거기 교회에는 성도가 15~20명쯤 모이는 작은 교회였고, 나는 설교 중이었습니다.


내가 강대상에 서자마자, 60대 초반쯤의 산같이 커다란 사람이 들어왔는데

정말 산처럼 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교회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두들겨 팰 수도 있을 만큼

험상궂게 생겼습니다.


내가 설교하면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잠시 겁이 났지만,

나는 다 때려치우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내가 본 가장 슬픈 인간이었습니다.

그냥 복음만 전하고,

그리고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곧장 그에게로 걸어갔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이 당신의 영혼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나는 내 평생에, (당신같이) 그렇게 슬프고 낙심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자 그는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는데

그 안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엑스레이 사진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의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나는 3주 후에 죽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나는 평생 소 목장에서 일하며 살았습니다.

거기는 산을 지나서, 경비행기나 말을 타야지만 갈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교회에 간 적이 없습니다. 성경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고 있고

누가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평생 어떤 것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지금 나는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오늘 저녁에 설교한 내용을 이해하셨나요? 복음을요?” 

“예.”


     자, 그 순간 거의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럼, 예수님을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도록 초대하시겠습니까?”

     그게 그들이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이해는 하셨군요.”


그가 말했습니다. “이해했지요. 그런데 그게 전부입니까? 그냥 그게..?

애라도 그건 이해했을 겁니다. 누구라도 말입니다.

내가 이해하고 기도하는 게 전부입니까? 아니면..?”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3주 후에 죽을 겁니다. 나는 내일 여기를 떠나야 합니다.

내가 비행기 표를 취소하겠으니 우리가 여기 머물면서

당신이 회심하거나, 아니면 죽어서 지옥에 갈 때까지

기도와 말씀으로 씨름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그저 지식적 동의로가 아니라,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영접해야 한다는 뜻.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로 영접인지 판별은 여전히 어려움.

다만 눈물, 애통, 넘치는 기쁨, 사죄의 확신, 덩실거리는 찬양 등이 동반함.

그러나 여전히 판별은 오직 하나님만 하시는 것임.

다만 설교자는 ‘값싼 은혜는 구원이 아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시작했습니다.

나는 구약과 신약의 속량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루고 있는

모든 구절들을 여러 번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3:16을 읽으면서, 잠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그 사람에게 회개에 관해, 믿음에 관해, 확신에 관해 질문하면서,,

그리고는 마침내 그날 저녁 그저 지친 채로, 아무런 돌파구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결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요한복음 3:16을 다시 읽으십시오.”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백만 번은 읽었을 것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위대한 구원의 약속중의 하나입니다.

그 본문을 다시 읽으십시오.”


그리고..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그의 산같이 커다란 손으로, 그의 무릎 위에 나의 성경을 들고 말했습니다.               ▣ 거듭남, 회심     


“알겠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아,,아,,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폴 형제님, 내 모든 죄는 다 사라졌습니다. 나는 영원히 구원받았습니다!”     (2/4끝, 3/4예정)

 

*관련글 : 찰스 콜슨,  억측 1720 http://blog.daum.net/rfcdrfcd/15971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