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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1999

LNCK 2009. 7. 24. 16:20

◈오직 예수                             마17:1~8                         -인터넷설교 스크랩, 출처-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마17:8

(하늘로부터)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눅9:37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다볼 산입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신 산이라고 하여서 오늘날은 변화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산꼭대기에서 변화되셨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났습니다.

옷도 빛처럼 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습니다... (본문설명 중략)



◑1. 사람들보다 예수님만


베드로와 제자들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와 엘리야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낸 절대자입니다. 건국자입니다.

모세 없는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중에 선지자입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성경은 말라기이고

말라기 마지막 4장은 엘리야로 끝나고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4:5


모세는 율법을 이룬 사람의 대표이고, 엘리야는 예언자의 대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두 분이 예수님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감탄하여 땅에 엎드렸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오직 예수님만 남고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은 이렇게 끝납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마17:8


교회에 와서 사람이 보이면 안 됩니다.

목사나 장로나 친구가 보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흔히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뭐 저래?> <장로가 뭐 저래?> <교인들이 뭐 저래?>

라면서 회의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리고 사람 때문에 왔다가 사람 때문에 떠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목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장로도 그럴 수 있습니다. 교인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을 향하여 가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지 말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불같이 화를 내신 이유

요2:13~22절, 성전정화 사건은 예수님께서 진노하시는 부분입니다.

그저 화를 내신 정도가 아닙니다. 채찍을 내리 치시고 상을 엎으셨으니

무서울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적이 거의 없으십니다.

 

사실 저는 지난 한 주간동안 이 말씀을 설교하기 위해서

제가 그동안 지낸 세월 중에 가장 고통스럽고도 어려운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사랑의 예수님, 은혜의 예수님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예수님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예수님을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 와서 위로를 받고 싶으신 분이 오셨다면

충격을 받고 마음이 얼어붙을만한 말씀입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설교 준비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며,

제 자신과 교회를 심각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잘했어! 좋아! 훌륭해! 너무 멋있어.” 하실까요?

 

아니면 혹시 예수님께서 이 설교단을 확 뒤집어엎으시면서 (성전 정화 때처럼)

“O목사, 아니 무슨 설교를/목회를 그렇게 해?” 하시지는 않으실까?

성가대와 찬양팀 멤버들을 좇아내지 않으실까요?

기획위원회에 모인 장로님들에게

“도대체 교회 일을 이렇게 결정하고 의논하는 법이 어디 있어!”

그러시면서 기획위원회 책상을 우리 주님이 뒤집거나 채찍으로 치시지는 않으실까?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본문이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두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화가 나신 것입니까?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그 사람을 향하여도

“하나님, 저들이 알지 못해서 저러니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셨던 예수님이,

그 때 당시 세상 사람들이 다 멸시하고 내버렸던 죄인, 세리, 창녀, 문둥병자들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품으셨던 예수님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으신 것이 도대체 무엇인 지 우리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전의 타락 때문입니다.


②예수님보다 사람을 높이는 일 때문입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며칠을 무릎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정말 채찍으로 치시고

상을 뒤엎어 버릴 그럴 모습이 우리 교회에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며칠을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나가서 구했지만,

제가 영적으로 무디어서 그런지 예수님께서 진노하실 일이 생각나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것이 깨달아지는 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그것이 주님이 주신 말씀인지 분별하고 그렇다면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보다 사람을 높이는 일입니다.


모두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라고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 마음대로 되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 마음대로 되고 있습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예수님 당시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처럼 전혀 가책도 없이

“나보다 우리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하면서

교회의 주인 노릇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누구 마음대로 되는 교회입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목사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하는 교회는 ‘목사 교회’지요.

장로가 원하는 대로 되는 교회는 ‘장로 교회’지요.


어느 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교회는 사람의 교회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는 담임자인 저부터 장로님을 포함한 모든 교우가

이 교회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 사람이 앞서는 것은 철저히 막기를 원하고,

주님의 뜻을 구해 나가는 일에 철저하게 서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 우리 주님의 큰 책망을 받을 일이 없지만,

사람들이 모인 까닭에 우리 안에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교회를 인간의 자기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교회 직분을 자기 명예로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철저히 예수님께서 머리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어야 합니다.


 

◑2. 환경보다 예수님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산 위는 집을 짓기 좋은 환경입니다.

베드로는 좋은 환경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집을 짓기에 가장 좋은 곳은 산위입니다.

지중해 바람을 신선하게 맞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든 동네가 산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 할 것이요.

산 위에 그만큼 사람들이 집을 많이 짓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산위에 초막을 셋 짓자고 말했습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유명하신 세 분과 함께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변 환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결론은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사람도 안 보이고 초막도 안 보였습니다. 오직 예수였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대결하여 이겼습니다.

예수님은 변화 산에서 두 분과 서계셨습니다.


산은 역사가 일어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 곳에 환경을 보며 베드로는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오직 예수님이었습니다.

환경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환경은 망해도, 예수님은 망하지 않습니다.

1871년 미국 시카고 도시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소가 외양간에서 난로를 건드려 쓰러뜨린 것이 화재원인이었습니다.

당시 무디 목사님이 선풍적으로 시카고에서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가 잿더미로 변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도시 성도가 무디 목사님을 위로차 찾아 와서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으셨군요.”


그 때 무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한 분만은 남아 있지요. 그 분이 다 하실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불타지 아니한 오직 예수님을 모시고

전보다 더 큰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환경적으로 망해도

여러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았던 코리텐 붐 여사

네덜란드의 코리텐 붐 여사는 나치 정권하에서 학살당하는 유대인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발각되어서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언제 처형당할지 모르는 암담한 감옥 속에서 지냈습니다.

나치 정권이 무너진 후 감옥에서 석방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이 세상을 보았다면 나는 감옥 그 모진 고문 속에서 살지 못 했을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절망이었습니다. 환경을 보면 낙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니 희망이 생겼습니다.

열차가 터널을 지날 때 어두워도 참고 있어야 합니다.

터널을 지나며 어둡다고 뛰어 내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참고 지나면 터널을 빠져 나올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처한 환경을 보지 말고, 예수님만 보아야 합니다.


큰 건물/큰 재정을 자랑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의 위기 중의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과 마찬가지로

재정에 대한 탐심이 교회 안에 너무나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사실 돈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여길 정도로 우리 안에 돈에 대한 욕심과

돈을 믿는 마음이 너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지어놓고 보니까 진짜 자랑스럽습니다.

누가 오면 선뜻 예배당을 자랑하고 있는 우리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예배당 건물 자랑하는 것을 참 싫어하셨습니다.

 

마2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을 보며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성전을 보십시오.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답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마24:2

 

이 성전이 다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에요.

그 무너질 성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우습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워낙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안목만 있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예배당 큰 것을 자랑하는 우리를 봅니다.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를 세운 것을 자랑하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드러내야지, 건물을 자랑하는 것은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보다 건물을 더 크게 보았던

그 때 사람들과 똑같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교회 건축 때문에 재정적인 압박감이 있습니다만,

우리 교단에서 교세나 예산 규모가 열 번째 가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우리의 자랑입니까?

앞으로 지금보다 더 성장하고 커져서 첫 번째 가는 교회가 되면

그것이 더 큰 자랑이 되겠습니까?


건물을 자랑하고 예산을 자랑하는 것,

돈이 있어서 할 수 있고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결정하는 것은

우리 안에 세상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증거입니다.

정말 두려운 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신비보다 예수님만


제자들은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 1500년 전 사람인 모세를 보았습니다.

이미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입니다. 신비를 부인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세 제자는 두려워서 엎드렸습니다.

여기에 초막 셋을 세워서 같이 살고 싶었습니다. 신비에 머물러 살고 싶었습니다.

신비 체험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신비체험은 많이 할수록 좋지만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신비를 체험한 장소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신비를 체험한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신비체험은 좋은 것입니다.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누구에게 은혜 받았다고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그 분을 통하여 은혜를 주신 것뿐입니다.

그 곳에서 은혜 받았고 그 곳에서 병고침 받았다고 그 장소에 집착하여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주시고 병고침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늘 주님만 보아야 합니다.


▲신비의 체험은 두려움을 줍니다.

변화산 체험을 한 제자들은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마17:6~7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그 두렵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한 젊은 수도사가 나이 든 원장에게 찾아가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제가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동안에

많은 시간 명상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 가만히 쳐다보던 원장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네 안에 계시단다.”


젊은 수도사가 깜짝 놀라서 또 물었습니다.

“아니 내 안에 계시다니요?

그런데 저는 왜 하나님을 못 뵈옵는 것입니까?”


그 때 원장이 술 취한 사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네는 술 취한 사람이 왜 자기 집을 못 찾고,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지 아는가?

술 취했기 때문이네.”


원장이 다시 말했습니다.

“무엇이 너를 취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내어라.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취해 있지 않아야 하느니라.

취한 것으로부터 깨어야 하느니라. 그래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느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정말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사십니까?

그 분을 늘 만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며 사십니까?

이 수도자처럼 도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는 그런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에 취해 있는 지를 먼저 아셔야 합니다.

성도도 세상에 취해 버리면, 하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신비적 방법으로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신비적으로 만나 주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매우 좋은 일입니다)

내가 신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주님과 컨택contact 하려는 것은 .. 잘못되기 십상입니다.

 

세상에 취하지만 않으면, 신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습니다.            (설교 2편 조합)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