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마7:6 -설교스크랩, 출처-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마7:6
▲이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는 분명히 복음이요, 말씀인 것이 틀림없는데,
그런데 ‘개’와 ‘돼지’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설령 개와 돼지를 찾아낸다고 해도
‘왜 개와 돼지에게 던지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안 풀릴 때는, 항상 성경의 앞뒤를 읽어 보면 좋아요.
▲본문 직전의 ‘들보와 티’의 비유
‘진주와 돼지의 비유’ 바로 앞에 ‘들보와 티’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5
들보는.. 내 삶의 중심축이 되는 것이 들보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심각한 죄악인데,
내가 중심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 말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죠.
‘티와 들보’(자기 중심적으로 비판 말라)는 말씀에 이어서
곧바로 ‘진주와 돼지’를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두 말씀을 연관지어 해석해야 합니다.
특히 마5~7장을 산상수훈, 한 개의 거대한 설교라고 볼 때,
관련해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진주와 돼지의 비유’도.. 주석 책에 명쾌한 해석이 없어요.
그래서 관련지어서라도 해석을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들보와 티’ 와 ‘진주와 돼지’를 연관해서 해석하면...
네 눈에서 들보를 빼라는 것은,
예를 들면, 중심축(들보)이 있어서 회전목마가 돌아가는데
네가 들보=판단의 기준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들보=판단/시각의 기준, 회전축을 뽑아버리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기준/안경/척도를 만들지 말고,
더 나아가면 ‘가장자리 인생이 되어라’는 뜻입니다.
‘들보와 티’의 비유가
<판단, 비판>에 있어서 중심축이 되지 말고, 가장자리 인생이 되라는 뜻이라면
‘진주와 돼지’의 비유도 연관지어 해석할 때
<복음을 전할 때> 네가 중심축이 되지 말고, 가장자리 인생이 되라는 뜻으로
해석을 해 봅니다. 두 비유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자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봅니다.
내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너무너무 행복해 졌어요.
내가 너무 좋으니까 내 자식 놈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요. 그러니까 달래봅니다.
‘너 대학에 못 들어가도 좋으니까 복음만 잘 받아들여라.’
그래도 자식이 복음을 콧방귀도 안 낍니다. 절대 안 받아들여요.
그러면 부모가 화가 나서 야단을 칩니다. 그러다가 싸웁니다.
‘너 이 자식아, 내가 다른 엄마들처럼 언제 공부하랬어?
복음만 받아들이면 된다는데 그것도 안 해?
그럼 이 자식아 뭐 하고 살래? 복음도 안 받아들이고 네가 잘 살 것 같아?’
하고 막 싸웁니다.
이 상황이 바로 개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거예요.
그러면 내 자식이 개와 돼지냐? 그런 뜻이 아니라,
개와 돼지에게 복음을 주입하려고 안달하는 내 마음 상태가
내가 주축이 되어서 복음을 가르치려고 주입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아무리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내가 주축이 되어서, 내 주도적으로 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내가 복음이 좋아도
내가 중심축이 되어서 복음을 매니지먼트 하게 될 때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내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돼지에게 진주가 좋은 것을 설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돼지 앞에 진주와 똥 두 개를 갖다 두면, 돼지는 반드시 똥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똥 돼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옛날 제주도에는, 아예 화장실 아래 돼지 우릿간이 있습니다. 바로 받아먹으라고!
돼지에게 ‘왜 똥을 먹느냐?’고, 진주가 좋은 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돼지가 ‘아! 진작 얘기해 주지!’ 하며 진주를 갖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죠.
마찬가지로 내가 복음을 내가 누구에게 전달하고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내가 깨닫고 노력하고 설득하려고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너무 주도적으로 주입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눅14:23 약간 다른 각도이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해 봅니다.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밝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마7:6
그렇게 했다가는, 오히려 내 마음만 찢어지고 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머리는요, 진짜 대단해요. (외람된 표현이지만)
대단하다는 말을 쓰면 안 되는데, 대단하다는 말 밖에 안 나와요.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벽에 부딪치면 주석을 뒤지는 게 아니라,
땅바닥에 납작 엎드립니다. 난 못하겠다고...
엎드려서 위에서 받아야지,
내가 그것을 헤쳐 나가서 뒤지고 찾아 깨달으려고 하면... 해석을 못 해요.
개와 돼지가 깊은 뜻을 담고 있는지..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복음을 전하려다가 불신앙에 빠지는 것을.. 예수님이 간파하고 계십니다.
‘개와 돼지’가 누구인지 규명할 필요는 사실상 없습니다.
사람들 중에 ‘개와 돼지’로 분류 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행악자들을 개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라고 합니다만,
-주님도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개에게 자녀들의 떡을... 운운 하셨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람을 개로 분류하지는 않습니다.
이 비유자체가, 너희가 마음에 복음을 아무리 그것이 중요하고 좋다고 여겨도,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강요하고, 주입하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그것이 개와 돼지에게 거룩한 것을 던지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돼지에게 찢기고 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복음을, 내가 주체가 되고 중심이 돼서 전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갖게 될 때,
그 때 ‘개와 돼지에게 진주가 좋다고 설득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이죠.
▲복음을 강요하는 것은, 불신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는 해야죠.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모두 맡겨야 합니다.
자식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해야 합니다.
내가 너무 주축이 되고, 너무 강권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불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무슨 불신앙인가 하면.. 하나님의 주권/전적 은혜를.. 내가 넘어서는(오버하는) 불신앙입니다.
통일교 같은 명백한 이단들에게 멀쩡한 대학생들이 넘어가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수긍을 하고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기에, 이단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고, 믿는 것은 전적인 은혜의 역사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나는 변두리 여야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축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강요하거나 그럴 수 없어요.
예를 들면, 순장님들은 제자반이나 사역 반을 계속 하시니까, 날마다 부딪치죠.
순원들 때문에 늘 마음이 상합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일 때, 순장의 마음이 상하느냐 하면,
내가 복음을 전해서 어떤 가시적 성과를 원할 때... 그렇습니다.
그것은 자기 잘못입니다. 결과가 나타나서, 내 어깨에 힘을 주려고 하다가.. 큰 코 다칩니다.
▲모세의 지나친 열심
성도들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할 때... 불신앙적인 측면이 나타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가장 좋은 예가, 백성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다가 안타까워 하다가
하나님께 화를 당한 사람 -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해서 광야에서 보여주신 역사가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보고서
모세가 화를 냅니다. 그리고 반석을 두 번 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가 불신앙’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민20: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모세의 불신앙)
왜 모세가 불신앙입니까?
모세가 백성과 하나님사이에 서 있습니다.
‘화를 냈다’는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쪽으로 너무 마음을 붙이고 있다는 말이에요.
애착이 필요이상으로 너무 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그 사건을 다시 한 번 언급하시면서
모세가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민27:14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하나님 쪽으로 붙기를 원했어요.
하나님 쪽으로 붙으면.. 기쁨과 감사의 기운을 받지요. 주의 거룩함을 드러내지요.
그런데 모세는 백성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불신앙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애착심이 너무 컸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말씀도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되, 너무 안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주변인으로/종으로서 곁에 서 있어야 합니다.
지팡이로 바닥을 치거나, 막 화를 낼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내가 주권자의 자리에 앉아있을 때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죽이는 사람들과 하나님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돌로 쳐 죽이는 사람 쪽으로 마음을 붙였다면,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안 받아들이고 나를 쳐 죽여?
알았어. 너희가 지옥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런 식으로 말이 나왔을 텐데,
스데반은 하나님 쪽으로 마음을 돌립니다.
그러자마자 하늘의 거룩하신 빛이 얼굴에 나타나면서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말을 해요.
자식과 남편이 복음을 안 받아들이면.. 화가 나고 마음이 상합니다.
마음이 찢기고 상한 것은.. 내가 주축이 될 때 그렇습니다.
자식을 하나님 보다 더 마음에 붙이고 있다는..
복음을 전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불신앙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후략) ▣ 전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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