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변화 시24:6 08.02.29. 설교 부분 녹취
*원제목 : 느헤미야의 눈물
◑변화 받은 인생의 예표, 야곱
▲이삭은 어쩌면 자기 일생에 승승장구 ‘성공’만 했다.
결혼도 무난했고, 사업은 한 해에 1백배의 성장을 거두기도 했다.
이삭은, 형 이스마엘이 괴롭히는 것 말고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물 빼앗긴 사건 외에는 그랬다.)
그런 형 이스마엘의 괴롬힘의 고난도,
아버지 이삭이 일방적으로 자기(이삭) 편을 들어주어서.. 형 이스마엘을 내쫓아 주셨고..
그래서 일평생, 정말 평탄하고 유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야곱의 삶을 보면, 이삭과 정 반대였다.
평탄한 삶이 아니라, 고난의 삶으로 일평생 일관했다.
형 에서가 괴롭힐 때, 아버지가 자기를 안 도와주고, 오히려 형 에서 편을 들었다.
‘야곱아, 네가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거라!’
(아버지 이삭 때와 정반대다. 그 때는 아버지가 형 이스마엘을 내쫓아 주셨건만...)
야곱에게는 사랑하는 여인(라헬)이 있었는데,
결혼 처음에 언니(레아)와 바뀌었다.
14년을 고생하면서 끝까지 사랑하는 여인 라헬에게 매달렸는데...
집착했던 그 여인은.. 오히려 길에서 일찍 죽고 말았다.
모든 게 지지리도 안 풀리는 인생이었다.
얍복 강가에서, 형 에서의 위기와, 그에 따른 목숨 건 기도..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거기에다 말년에는 심한 가뭄으로 먹을 양식이 없는 위기를 겪으면서,
하는 수 없이 오래 터 닦아 왔던 삶의 보금자리를 버리고,
애굽으로 온 가족이 이민을 떠난다.
(물론 하나님이 가라고 명했지만, 그런 완전 이민은 삶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험악한 삶을 살았다’는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야곱은 죽을 때까지 정말 ‘나그네 인생’으로서 고생스럽게 살았다.
▲시편과 이사야에서 찬양되는 사람은 야곱/ 평탄한 삶을 살았던 이삭이 아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시편에서 말하기를
언제나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거기에 ‘이삭의 하나님’은 안 나온다.
이사야서도 마찬가지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하면서.. 언제나 야곱의 이름을 부른다. ‘이삭’이 아니다. 사41:14
‘야곱의 얼굴을 구하라’ 시편에서 다윗이 말한다. 시24:6
왜 성공한 다윗이 이런 말을 하는가? '이삭의 하나님을 구하라'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윗에게는, ‘인생의 성공이나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변화>가 중요한 포인트였다.
▲야곱의 이름은 ... 변화된 사람
그는 눈물로 축복을 구했지만, 그 축복마저도 아픔을 통해 주어졌다.
그는 너무나 아프게 환도뼈를 얻어맞고는, 축복을 받았다.
많이 아픈 고통을 통해, 많이 변화된 사람이.. 진짜 복된 사람이다.
야곱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야곱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단 한 가지를 얻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변화된 새 이름이었다.
야곱은 크게 순탄하거나 성공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의 사후 대대로 <그는 변화 받은 인생의 예표>가 되었다.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이름도, 야곱의 변화된 이름에서 나왔다.
이삭은, 사랑과 결혼도 순탄하고,
비즈니스도 다 성공했지만
그의 새 이름은 없었다.
그는 성공했지만, 크게 변화 받았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변화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성인이었다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 히브리 민족의 이름은,
성공한 이삭을 따라 ‘이삭 민족’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했지만, 변화 받은 야곱을 따라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다.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변화이다. ←이 설교문 제목
여러분, 많은 실패 가운데.. 여러분 각자가 변화 받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란다.
이삭이 아니라, 야곱의 삶을 사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란다.
◑그 외 주요 논지
▲사명은 역사history보다 더 중요하다.
사도행전 후반부에 펠릭스 총독이 나온다.
세속 역사책에 보면, 그 때가 주후62년경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다가,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약 2년 정도 그 병영에서 갇혀 있다가 행24:27
가이사랴에서 팔레스틴을 떠나 로마로 향하게 된다. 그러면 그 때가 주후 약 64년경이 된다.
놀랍게도 바울이 이스라엘을 떠난 다음에,
2년 후인 주후 66년에
가이사랴 빌립보(헐먼산 근처, 가이사랴는 지중해 해안 도시, 서로 다름)라는 도시에서
우연한 기회에 이스라엘 독립운동이 발발한다.
주후 66년경에 발발한 그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의 진압군이 파병되었고, 예루살렘은 몇 년 버티다가 주후 70년에 완전 함락된다.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할 때까지
예루살렘의 도시와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은 보류되었던 것이다.
그가 팔레스틴을 떠난 것이 주후 64년이고,
2년 후인 주후 66년경부터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이스라엘 멸망의 시작)
그 독립전쟁은 4년 만에 주후 70년에 막을 내렸고,
그 후 2천년간 이스라엘은 나라가 없이 떠돌게 된다.
그 전에도 로마 군단이 수도 예루살렘을 포위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로마 군단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 하기까지는,
사도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이스라엘을 떠나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결코 멸망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명은 역사보다 중요하다.
바울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서 복음 전하는 사명을 마치기까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멸망은.. 보류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자기 사명을 다 마치기 전에는, 데려가지 않으신다>고 말을 하는데,
바울이 복음을 다 전하기 까지는, 이스라엘/예루살렘을 결코 무너뜨리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다 마치기 전에는, 역사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바울서신의 말씀들을 사모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가, ‘바울처럼 살겠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러분, 사도바울과 함께 (기숙사) 같은 방 쓰는 것을, 한 번 각자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그 분은 종종 잠도 안 잘 때도 있었다. 가끔씩 굶는 때도 있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11:27
거기에다가 가끔씩 돌이 날아올 때도 있고..
바울사도와 같은 방 쓰기가, 정말 참기 어려우실 것이다.
어떤 때는 그의 설교가 길어서, 누가 떨어져 죽는 일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바울서신서의 말씀을 읽고 즐기지만,
내가 그와 동행하는 삶을 만약 내가 실제로 살았더라면.. 나는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믿음이란.. ‘바울이 무슨 말씀을 했는가?’ ..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전하는 그의 삶에 매료되어
오늘날 21세기에, 그 분이 가셨던 길을 나도 뒤따르는 것이다.
그의 서신서를 이해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제자의 자격은.. 지적 이해력/광범위한 지식이 아니다.
제자의 자격은.. 그 분을 민첩하게 따르기 위해서..
(자기 삶에 걸리적 거리는) 뭔가를 버리는 것이다.
현대 교회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세상의 것을 <더 가지라>고 강조하지만,
주의 제자들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가진 것들을 <더 버려야>만 했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8:34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은, 진리가 아닌, 여론이다.
진리는 외롭고 고독한 것이다.
마치 광야의 모래 바람을 맞아서 흙색으로 서 있는 외로운 가시떨기처럼,
그 나무의 초록색을 알아보기가 심히 어렵다.
진리를 알아보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회개의 눈물로,
그 떨기나무에 묻은 흙먼지들을 씻어 내리지 않는다면
그 먼지 속에서 초록 잎사귀의 진리를 얻기는.. 매우 어렵다.
▲주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를 연단하신다.
<학위>를 사랑하는 이는.. 평생 학위 때문에.. 아까운 인생을 낭비한다.
<이성>을 사랑하는 이는.. 그 이성 때문에.. 평생에 자기 열정을 허무한 데 소진한다.
<성공>을 사랑하는 이는.. 가장 높은 정점에 올라도.. 인생의 허무함을 깊이 깨달을 것이다.
우리 일생의 목표는 <명예, 이성, 성공> 등이 아니라 <변화>이다.
▲탈북자를 돌아보시라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신24:1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구출할지니라) 신24:4
저는 이 말씀이, ‘탈북자들에 대한 주님의 명령’이라고 본다.
만약 ‘원수의 양’(탈북자, 북녘동포)이라고 해서 밉다고 건져주지 않으면,
어쩌면 하나님은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실 수도 있다.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그것을 유기하고 사용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신다.
그 양의 <소유주>에게 묻지 않으시고,
빠진 양의 <목격자>에게 그 책임을 물으신다.
그러므로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지 마시라.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도리어 책임지게 된다.
돈을 1백만 원을 벌든지, 1억을 벌든지
그 버는 돈보다, 더 가치 있게 쓰는 인생이.. 복 받은 인생이다.
얼마를 벌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미니스트리를 하면서도, 돈을 쫓아가는 사람은.. 그것은 본질상 비즈니스다.
그러나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사명을 쫓아가면.. 본질상 ministry(사역)이다.
주님은 각자 우리 중심을 보실 뿐이다.
▲느헤미야는 자기 친척 중에 하나냐 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다녀온 소식을 전해 주었다.
‘가 보니,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은 불에 탔고, 거기 남은 거민들의 삶은 어렵더라’ 느1:3
그 때 느헤미야는 밥을 먹지 못하고, 눈물 가운데 기도를 토해 낸다.
느헤미야의 위대한 점은,
유명한 설교자에게 반응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구역식구의 말에.. 자기 눈물을 쏟았다는 점이다.
그의 위대한 점은,
아주 평범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점이다.
주님은, 오늘날 그런 느헤미야를 찾으신다.
그가 누구든지, 주님이 그를 통해 말씀하시면.. 겸허히 듣는 사람이다. ▣ 물질과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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