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따라 난 자가 핍박받는 이유 갈4:29 08.01.18.설교녹취/편집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4:29
◑사울 왕보다, 다윗이 먼저 회개하기 원하셨다.
▲부딪힘을 통해, 나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된다.
나 자신이 육체를 따라 행하고 있는가, 성령을 따라 행하고 있는가?
나 자신이 ‘육체를 따라 행하는지’, ‘성령을 따라 행하는지...’
다른 사람과 부딪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본성을 테스트하신다.
다른 사람과 부딪힘/갈등을 통해서,
내 속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것을 꺼내어서,
내 실상을 나로 하여금 보게 하신다.
내가 ‘육체대로 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육체대로 행하는 고약한 자’를 나에게 만나게 해 주신다.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사울 왕과, 성령을 따라 행하는 다윗
예를 들면, 하나님은 다윗이 온전해지기 원하셨고,
사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리운 자였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울 왕을 고치려고 하신 적이 없다.
오직 사울 왕을 통하여.. 다윗을 더욱 거룩한 사람으로 고치기 원하셨다.
욥의 세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보다,
욥이 회개하고 돌이키기 원하셨다.
이것이 성경의 법칙이다.
그러나 세상 드라마는 이렇지 않다.
다윗은 주님을 잘 믿으려 하는데,
사울 왕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빙자하여 다윗을 괴롭힌다.
이 때 세상 드라마는,
나중에 사울 왕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서
결국에 모두가 잘 되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대립하더라도,
결국에 시어머니가 자신을 뉘우쳐서, 그 관계가 해피 엔딩이 되고,
부하직원과 직장 상사가 서로 대립하더라도
결국에 직장 상사가 돌이켜서, 그 관계가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세상 드라마는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드라마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드라마는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를 더욱 고친다.
다윗과 사울 왕 관계에 있어서, 사울 왕은 일단 버려두고, 다윗을 더욱 고치신다.
욥과 세 친구의 관계에 있어서, 세 친구는 일단 버려두고, 욥을 더욱 고치신다.
▲하나님은 도망 다니는 다윗을, 회개케 하셨다.
쫓아다니는 사울을 회개케 하신 것이 (일차적으로) 아니다.
다윗은 억울할 것이다.
저렇게 자기를 무고히 쫓아오는 사울 왕이 회개해야 될 것 같은데,
기름부음이 폐하여진 왕이
기름부음이 임한 자기를 쫓아오는데..,
회개는, 무고히 자기를 쫓아오는 사울 왕이 몇 배는 더 해야 될 것 같은데,
다윗은.. 무고히 쫓겨 다니면서.. 도리어 정작 자기가 회개하게 된다.
다윗이 광야에서 회개한 증거는,
그가 사울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만약 다윗이 자기에게도 내재되어 있는 광기를 회개하지 않았다면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사울을 공격해서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가
두 번째 결정적 기회에서는, 사울의 옷자락 마저 베지 않는다.
다윗이 광야에서 쫓겨다닐 때 회개했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주님을 제일 열심히/많이 섬기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제일 많이 회개한다.
정작 회개해야하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으로 난 자가 함께 섞여 있을 때,
본질이 다르므로 서로 반드시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있는데,
정작 회개해야 할 자는.. ‘성령으로 난 자’이다.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자가.. 회개한다.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자를 괴롭히는 자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된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자가.. 먼저 회개하는 것이다.
자기를 괴롭히는 자와의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를 회개로 인도해 가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주변 사람들을 통해 환경의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은,
의인이요, 주의 택하신 자들이.. 회개하라는 것이다. 세상 죄인들이 아니다.(일차적으로)
▲하나님은 사울 왕을 통해서, 다윗의 숨은 모습을 보여주신다.
만약에 사울의 핍박을 받지 않고서, 다윗이 왕이 되었더라면,
아마 다윗 왕도 사울 왕이 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의 극심한 핍박을 통해서
자기 내면에도 저런 포악성과 사악함이 감춰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평소에 자기가 전혀 못 보던 모습을, (여러분, 사람은 다 비슷비슷하다)
사울 왕을 통해서 시청각 교육을 톡톡히 받게 된 것이다.
‘아, 나도 저럴 수 있겠지...’
‘그래, 내게도 질투심이 있고, 시기심이 있지, 최고로 인정받으려는 마음도 있고...’
그러면서 다윗은 점점 ‘사울에게 투영된 자기 인격의 모난 부분’을 깊이 보게 된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을 뉘우치고, 회개하게 된 것이다.
사울이 자신을 쫓아오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결코 회개하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극심한 고통을, 그것도 오래동안 주시는 것은
내가 뭔가 회개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나를 괴롭히는 그 대적을 통해서, 그에게 투영된 나의 실상을 보게 하신다.
그들의 공격을 통해서
또한 삶의 고난의 환경을 통해서
평소에 전혀 내가 회개치 않고 지나왔던 것들,
평소에 전혀 죄라고 여기지 않고 지나쳐 왔던 것들을,
하나님은 낱낱이 드러내서, 내가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회개란...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 길에서 행위가 돌아서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보통 우리들은
대적을 통해서 말도 안 되는 고난을 겪을 때
‘대적이 회개하기를’ 바란다.
‘대적이 천벌을 받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대적이 쉽게 회개하지도 않고,
대적이 아무리 기다려도 천벌을 받지도 않음을 보면서
스스로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나..?’
잘못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 왕보다, 다윗이 먼저 회개하기를 원하셨다.
욥의 세 친구들보다, 욥이 먼저 회개하기를 원하셨다.
마찬가지로, 내 대적들보다, 하나님은 내가 먼저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내 깊은 곳을 들춰내어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대적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내 고난의 기간이 길게 길게 끌어지고,
만약에 사울 왕으로도 안 되면, 하나님은 더 무시무시한 대적을 데려오실 것이다.
나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주의 일꾼으로 쓰시기 위해서!
▲시험도 끝나는 날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해서 인격이 온전해지면
더 이상 하나님이 나를 테스트 하실 필요도 없고,
또 더 이상 나의 인격이 크게 다듬어질 필요가 없는 순간,
하나님은 그런 소모적인 싸움을 멈추게 하실 것이다. (라고 추측해 본다.)
◑어느 선교사의 깨달음
선교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사건 중 하나는,
현지인들이 (그가 목회자이든지, 평신도이든지, 불신자이든지)
외국인들에게 불리한 법적 우위권을 악용해서
선교사가 구입한 토지/건물/재산을 빼앗아, 자기 소유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다.
피해를 당한 선교사 입장에서 보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아니, 자기들을 도와주러 간 주의 종인 나를... 이렇게 대접하다니...’
그때쯤 되면, 자기 마음속에서 ‘저주기도’가 나오기도 한다.
‘하나님, 비가 많이 올 때 홍수가 나서, 저 놈의 집이 다 떠내려가게 하소서’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그의 집이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천벌을 쉽게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의롭게 판단하시겠지만)
6개월, 1년, 2년이 지나면서 선교사는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
‘저가 나에게 이렇게 속이고, 대적하는 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께 늘 속이고, 대적하는 것이란 것을!’
내가 그런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늘 어물쩡 넘어가니까
내가 그게 죄인 줄도 아예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현지인 대적을 일으켜서,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실상’을 비디오로/시청각교육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도, 이땅에 죄인들을 구하러 내려오신 선교사이시다.
그런데 자기가 얼마나 많이 예수님을 배신했는지, 죄를 지으며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평소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는데,
그런 일을 당하면서, 자신이 똑같이 예수님께 저지른 죄악들이, 비로소 눈에 보이면서
그런 일을 계기로.. 도리어 자신이 회개하게 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후에
그 선교사는, 하나님께 자신의 대적함/완악함/패역함을 철저히 회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현지인 대적자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하나님께 대적하고/완악하고/속이는 잘못들을
절대 회개하지 않고 대충대충 넘어가면서 살 뻔 했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니까.. 계속 그렇게 반복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을 대적한 그 현지인들은 어쩌면 ‘희생양’이었다.
그런 마음이 드니까, ‘홍수에 떠내려 갔으면 좋겠다’던 현지인들에 대한
진정한 용서의 마음이 그 때 비로소 생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던 죄’에서도
선교사는 회개하고 돌이키게 되었던 것이다...
...................................... 더 읽으실 분 .........................................
▲어느 시대나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의 따라 난 자’가 섞여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이제도 그러하도다...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가 늘 한데 섞여서 활동한다.
그래서 이스마엘(육체를 따라 난 자)이
이삭(성령을 따라 난 자)를 어렵게 한 것 같이
어느 시대에나 교회도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
▲내가 이스마엘이 되면 안 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4:29
‘이제도 그러하도다’는 말씀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교회에서는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연단을 받는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연단시키는 사람인지,
한 번 각자 자신을 돌이켜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 우리는 ‘연단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연단 받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다른 사람을 연단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 되는 것이다.
▲자기의 신앙체험/은사가 전부가 아니다!
아직 미숙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한 영적 경험이 최고이고,
그것이 없는 사람을.. 아주 무시하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잘 깨닫는 은사가 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잘 깨닫지 못하는 말씀을,
기가 막히게 잘 풀어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 ‘설교시간에 횡설수설 하는 사람’을
무시하기 딱 알맞은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다.
제가 옛날에 그랬다.
그러나 저는 거기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은 조심해서 그렇게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여러분, 내가 경험하지 않은 다른 것을 경험하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구제로..
금식으로..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힘든 봉사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보고, 성령체험을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 깊이 주님을 알고 교제하는 사람이 .. 있다.
내가 가진 신앙은, 내가 발견한 신앙의 깊이는,
지구상에서 정말 요만큼밖에 되지 않는다. (매우 작다) ▣ 죄, 복된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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