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내미시는 손 롬11:1~12 08.01.20.정목사님 설교녹취
◑내가 목회자로서, 섬기는 영혼의 소중함과 고결함을 내게 가르쳐준 일화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지, 지금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10여 년 전, 목사 안수를 받은 직후, 그 때를 되돌아보면, 한 가지 부끄러운 것은,
그 당시에 정말 ‘영혼들에 대한 사랑과 섬김’보다, 제가 개인적으로 더 고민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 진로’에 관한 것이었다.
‘부목사로 있어야 하나, 개척을 해야 하나, 어느 지역으로 가야 하나, 유학을 가야하나?’
그런 시기에, 어느 날 아침 일찍 경찰서에서 제게 전화가 왔다.
‘한 50대 여자분이 길에서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 분이 누군지 신상파악이 전혀 안 되고, 주민등록증도 없고,
그런데 단 하나, 소지품으로 성경책이 있는데, (아마 새벽기도 다녀 오시다가)
그 안에 메모지에, ‘정O신 목사님’이라고 제 이름이 적혀 있으니,
경찰서로 좀 와서, 죽은 사람의 신원을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경찰서에 가서, 그 여자 분의 시신을 보니
제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분의 성경책 속에 끼어있었다는 그 메모지도 보았는데,
제 이름이 종이 제일 위에 씌어있었고, 그 아래에 몇 가지 기도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맨 먼저 제 설교내용을 간단히 요약한 것과
-저와 제 가정을 위한 중보기도제목들이 두세 가지 적혀 있었다.
그날 오후쯤에, 지문 감식을 했는지, 그 분의 신원이 밝혀졌다.
그 여자 성도님은 청량리 회기동에 사시는 분인데, 집 근처 교회를 다니시고,
딸이 안산에 사시는데, 딸네 집에 오면
안산의 딸집 근처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셨다.
제가 12년 전에, 안산동산교회 부목사로 섬기던 시절에,
우연히 새벽예배에 오셨다가 제 설교를 듣고서, 제 이름을 메모지에 적어두시고,
‘저 목사님을 위해서 내가 이런 중보기도를 해야 되겠다’고
그 분 나름대로 기도제목을 몇 가지 적고,
(저는 그 분과 일면식도 없었지만) 저를 위해 계속 기도를 해 주셨던 모양이다.
▲이 사건은, 우연일수도 있겠지만, 제게 무척 의미심장한 사건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분의 죽음을, ‘객사’한 것처럼 무의미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제게는 그 사건이 굉장한 의미를 심어주었다.
어떤 한 분이, 나와 일면식도 없는 분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 때 제가 한참 제 진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내 진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디에 가든지,
‘내가 이런 귀한 영혼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내 인생을 집중해야 되겠구나’
하는 귀한 교훈과 감동을 주었다.
내 생애에 어떤 전환점을 마련해 준, 참 귀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그 분은 참 허무하게 돌아가신 것 같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 인생에 어떤 특별한 전환점을 주셨다는 사실이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 분의 죽음은 너무나 값지고 소중한 것이었다.
성도의 영혼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내가 섬기는 성도의 영혼은 얼마나 고결한 것인지...
그러므로 내가 성심을 다해 섬겨야 한다는 귀한 교훈을...
그 분의 죽음을 통해, 내가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이스라엘을 절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롬10:21
하나님이 손(팔)을 벌려서,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용납하시기 위해서
하루 종일, 손을 벌리셨다는 것이다.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우리도 가끔은 비슷한 경험을, 자녀를 통해서 하게 되는데,
자기(자녀)가 잘못해 놓고서,
오히려 자기가 화를 내면서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에 들어가 버린다.
그런 자녀와 화해하기 위해서, 부모는 먼저 손을 내 민다.
그러면 그 상황을 지켜 본 이웃은 ‘저 못된 것, 내버려두라’고 말하지만,
부모 심정은 ‘아닙니다. 그래도 저 애의 마음은 착해요’ 하면서 오히려 자기 자녀를 두둔한다.
부모는 끝없이 반항하는 자녀를 향해 손을 내민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은 버리지 않는 손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 롬11:1~2a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거역함과 거스름이
하나님의 내미신 손을 거두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우리)이 아무리 거역했어도
하나님은 내미신 손을 끝내 거두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1. <버리지 않는 손>의 첫 번째 증거는 바로 나, 사도바울이다.
나(사도바울)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 롬11:1b~2a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로, 바울은 먼저 자기 자신을 든다.
위 구절에 자세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서 옥에 내어주던 바울 자신이 돌이킨 것을 보면
하나님은, 거역하는 이스라엘에게 내미신 손을, 절대 거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나를 봐, 거역하고 불순종하던 내가 변화된 것을 봐!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 죄인들을 향해 내미신 손은,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아!’
라고, 내 삶을 통해 간증할 수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신 증거2. - 7천명을 남겨두셨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11:2~3
엘리야 시대는 <부정우세의 법칙>이 만연하던 시절이었다.
※부정우세의 법칙이란,
긍정이 부정을 이기는 힘보다, 부정이 긍정을 이기는 힘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다.
어떤 세워진 것을 무너뜨리는 힘은, 약간이면 충분하지만,
그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은, 엄청나게 몇 십~몇 백 배로 더 많이 든다는 것이다.
2007년도 말에 태안 앞바다에 기름유출 사건이 있었다.
기름이 유출된 것은 단 이틀이었다.
그러나 그 기름을 제거하고, 자연을 다시 원상태로 복원하는 데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과 시간이 더 걸린다. '부정우세의 법칙'이다.
또한 10명 중에 9명이 나를 찬성해도, 반대하는 그 한 사람 때문에
그 모임에 가기 싫은 것이 ‘부정우세의 법칙’이다.
엘리야가, 자기 눈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니까, 도무지 가망성이 없었다.
당시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다 죽여 버리는 시대였다. 11:3
자기들이 유일하게 살 길(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을, 자기들 발로 차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멸망의 길을 자처해서, 바알 우상을 섬기던 시절이었다.
아마 이들은 아합과 이세벨의 권력에 의해 놀아난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진정으로 바알이 좋아서 섬겼다 라기 보다는,
바알을 섬기는 권력자에게 밉보였다가 자기 직위/밥줄이 위태로워지니까
하는 수없이 바알에게 머리 숙인 자들로 보인다.
우리나라도 고위공직자가 정권이 바뀔 때 살아남기 위해서
‘공무원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말을 해서,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자기 주관, 소신은 깡그리 없고, 정부 방침에 무조건 따라서 간다는 뜻이다.
정권이 바뀌면, 바뀐 정권의 코드에 자신을 무조건 맞추겠다는 소리다.
(아주 극소수 공직자만 그렇지, 대다수 공직자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요즘도 그렇다면, 옛날 절대왕정시대에서는 어떠했으랴?
어쨌든 ‘나만 남았다’는 엘리야의 항변은.. 엄살은 아닌 것이다.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선지자/지도자 모두는, 이세벨에게 잡혀서 죽었든지
아니면 바알 우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 같은.. 그런 암울한 시대였다.
이스라엘 전국이 바알 우상으로 물들여졌던..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시대였다.
그래서 엘리야는 ‘나 한 명 남았는데, 사람들이 나마저 죽이려고 합니다!’ 호소한다.
이 때 하나님의 대답이 이렇다.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11:2~4
7천명을 문자적으로 볼 수 있고,
상징적으로 볼 때는.. 7이 완전수이고 10이 만수(충분히 많은 수)라고 볼 때,
7x10x10x10은 ‘완전하고 매우 충분히 많은 숫자’가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참 이스라엘의 ‘완전하고도 충분한 숫자’를 남겨두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남기신 7천명의 예
①중국에 남겨두신 7천명
중국은 1966~1969년까지 진행되었던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중국 전역에서 기독교가 거의 말살되었다.
‘기독교를 외세의 앞잡이’로 매도해서, 성경을 불태우고, 교회를 모두 문 닫고,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중국에서 기독교가 완전히 사라진 듯 했다.
그야말로 뿌리째 뽑힌 듯 했다.
그런데 문화혁명이 끝나고, 중국이 차츰 개방되기 시작하면서 알고 보니
저 깊은 땅속에 묻혀 있던 기독교인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30년 전에는 5천만 명으로 추산하더니, 지금은 1억~1억5천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을 보더라도 우리가 알게 되는 교훈은
‘하나님은 7천명을 반드시 남기신다’ 이다.
②북한에 남겨두신 7천명
분단 전에 북한의 평양, 정주, 선천 등지에
크리스천의 비율이 인구의 80%가 넘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 일부가 피난 와서 세운 교회가, 한국의 큰 주축을 감당했다.
그들 중 일부가 남한에서 그 놀라운 부흥의 주인공들이 되었다면,
그들 중 상당수가 남아있는 북한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북한이 아무리 기독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핍박하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완전하고도 충분한 숫자 7천명’이 반드시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남북이 통일되든지, 아니면 북한이 개방되는 날
우리가 깜짝 놀라게 되리라고 본다.
중국에 대해 놀랐던 것 이상으로, 북한에 대해 놀랄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7천명을 남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당신의 구원 역사/세상의 복음 전파를.. 오늘도 계속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거역하고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신다.
한 때 징계를 하실 지라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③우리 각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하고,
도무지 구제받을 가능성이 1%라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의 손을 내미시고,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구원의 완전하고도 충분한 숫자’를 반드시 남기신다.
엘리야가 그 7천명을 보지 못했듯이,
우리 각자도 단지 그 7천명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 7천명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반드시 일으키실 것이다.
④제 개인적 간증을 드리면, 제 인생에 큰 위기가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신학대학원 1학년을 마쳤을 때
한 개척교회 전도사로 섬기고 있었는데,
같이 사역하던 선임 전도사님과 심한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사임했다.
또한 다니던 신학교는 연일 데모에 휩싸여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왜 신학교에 왔던가?’ 하며 후회가 극심했다.
당시에 나는, 문제와 갈등의 원인이 사실은 내 속에 있었는데,
그 원인을 모두 외부적 원인으로 돌리고 있었다.
게다가 일찍 결혼한 아내는, 둘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계속 공부해야 할(돈이 많이 들어갈) 학생으로서,
그래서 내 한 몸도 힘든데, 가족까지 부양해야 할 가장으로서,
나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학교를 당장 그만두고, 직장을 찾아보아야 할 그런 급박한 시기였다.
그 때 아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신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생각/결심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세요!’
그런 와중에 어떤 옛 친구가 ‘계속 네 생각이 났다’며 만나자고 하더니
봉투를 주는데, 꼭 한 학기 등록금을 건네주고는, 바로 가 버렸다.
나는 그 순간 ‘마치 하나님이 남겨 두신 7천명’처럼
이제 나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아서, 신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구하려고 했는데,
그 친구 덕분에 등록금을 내고, 신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금 이렇게 목회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나를 구할 방도를 다 마련해 놓고 계셨던 것이다.
사실 제 경험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저보다 더 혹독하고 힘겨운 위기 상황에서
주님이 남겨두신 ‘알지 못하는 7천명’을 통해 구출 받은,
여러분 각자의 더 놀라운 간증이 있으실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징계하고 야단을 치지만
그 자녀를 위해서 간식을 준비하고, 공부할 책을 사 주는 것처럼
혹시 우리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래서 징계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 위기에서 구출할 ‘내가 모르는 7천명’의 도움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내미신 손’을 거절한 자들이 있었다.
▲7절, 우둔하여진 사람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롬11:7
‘우둔하여진 자’라는 뜻은.. 굳어졌다. 차갑게 식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거절한 자들은.. 그 영혼이 차갑게 식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들이 뼈다귀 곰탕을 푹 끓이실 때가 있다.
그런데 그 곰국이 식어버리면, 기름이 응고되고 굳어버린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식는 것은, 굳는 것이다.
마음이 식으면, 딱딱해진다. 그래서 어떤 소리도 자기 귀에 들리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소리가 내 귀에 들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는.. 식어져버린 상태이다.
반대로, 곰국이 뜨거워야.. 부드러워지고, 음식이 되어서.. 먹는 사람을 살린다.
뜨거워야 사람이 부드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으로 뜨거워지면,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반대로 성령이 소멸되어서 식어지면, 딱딱하고 경색된 사람이 된다.
▲8절, 혼미한 심령의 사람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롬11:8
그들이 이전에 보지 못할 눈, 듣지 못할 귀가 없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런 눈과 귀를 새로 주셨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보지 못하는 눈, 듣지 못하는 귀를 갖고 있었는데,
그래서 볼 것은 못 보고, 안 봐야 될 것은 보고 있었고,
들어야 하는 것은 듣지 못하고, 안 들어도 될 것은 오히려 듣고 있었다.
심령이 혼미하니까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그런 상태를 내버려두셨다.
왜 내버려두셨는가?
→하나님의 손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을 거절하면, 혼미한 심령이 되면서, 판단력이 흐려진다.
무엇이 옳은지/그른지 판단하지 못하고, 좌충우돌한다.
봐야 될 것을 못 보고, 봐서 안 될 것들을 오히려 본다.
예를 들면, 그 심령의 갈급한 상태는 보지 못하고
그가 맨 스카프.. 그가 입은 옷.. 이런 것들만 본다.
▲이런 거절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두려운 현실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9~10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밥상’은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너무 중요하다.
여러분 밥을 먹을 때, 입맛이 전혀 없고, 모래알 씹는 사람..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사람의 가장 기초적 행복이 ‘식욕’인데, 그것을 못 느끼고, 오히려 식사시간이 ‘죽을 맛’이라면
그는 저주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먼저 밥상이 축복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도/가정도 행복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내미시는 손을 거절한 사람은.. 밥상부터 저주받는다. 무서운 말씀이다.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 : 이방인에게로!
▲1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11:11
하나님이 복음을 이방인에게로 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미워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질투라도 해서 주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또 이스라엘을 질투해서 더 많이 주께로 돌아오고...
이렇게 서로 질투해서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1:12
▲마치는 말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막 살면 안 되지만,
본의 아니게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막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그 모든 상황을 추스려서
우리 인생이 주께로 돌아오며,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막 살면 절대 안 된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절해도, 하나님은 좀처럼
우리를 향하여 그 내미신 구원의 손을 거두시지 않으신다. 롬10:21~11:2
... 지금도 원망/낙심/좌절 속에 있는 우리에게 손을 내미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7천명을 남겨놓고 계신다.
내가 모르는 방식이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롬11:2~11:6
그런데도 그 하나님의 내미시는 손을 거절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굳어지는 마음과 혼미한 심령의.. 인생의 고난을 겪게 된다. 11:7~11:10
그러자 하나님은 이제 복음을 이방인에게 주셔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시기해서라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신다. 11:11~11:12
하나님은 촛대를 버리시고, 다른 촛대를 일으켜 세워서, 시기하게 해서라도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마치는 일화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 가족이 서울 강동구 길동의 조그만 지하 셋방에 살았다.
1월 달 한겨울에 아침에 제가 일어나 보니,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팠다.
비틀거리며 마루로 나와 보니, 싱크대가 열려 있고, 그릇들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저는 처음에 도둑이 들었나 싶었다.
그래서 안방 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대문/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맨발로 길바닥에 쓰러져있는 엄마와 누나가 보였다.
우리 가족이 밤새 연탄가스를 맡은 것이다.
아침에 어머니가, 자기보다 덩치가 큰 딸(제 누나)을 방에서 끌고나가서
바깥에서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하고,
부엌의 식초를 꺼내서 딸의 코에 대다가.. 어머니도 함께 쓰러져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얼마 동안 그렇게 한겨울에 길 바닥에 쓰러져 계셨는지 알수 없지만
아마 좀더 계셨더라면.. 동사하셨을 것이다.
이 장면을 목격한 제가 너무 놀라서, 엉엉 울면서, 엄마와 누나를 흔들어 깨었다.
저도 식초를 손에 묻혀서 엄마와 누나의 코에 갖다 대기도 했다.
그 때 제가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딸의 손을 꼭 붙들고 함께 쓰러져 계시는 어머니>이었다.
<죽어가면서까지 딸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계시는 그 어머니의 손!>
제가 하나님의 손을 본 적은 없지만,
그 어머니의 꼭 붙든 손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일 때, 누나가 엉뚱한 소리를 하면
제가 ‘아직도 연탄가스가 덜 빠져 나가서 누나가 저런 소리를 한다’고
농담하며 놀리기도 한다.
여러분, 하나님의 손은
절대 그 자녀를 놓지 않으시고, 내미신다...
그 내미시는 손을 잡으시고, 마음으로 영접하시기 바란다.
한 가지 더, 그런 하나님의 손은
사람 눈에 직접 보이지 않으니까
반드시 성도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이 보여진다는 것이다.
제가 우리 어머니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을 본 것처럼...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 ▣ 삶의 통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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