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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의 올바른 뜻 2023

LNCK 2009. 8. 7. 18:06

느헤미야로 통해 본 중보기도의 올바른 뜻                  느1:1~13           08.11.06.설교녹취

 

 

느헤미야는, 비참한 예루살렘의 현실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느1:3

이 때 느헤미야는 비통한 심정으로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1:4


▲우리가 알고 있는 중보기도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기도이지만

교우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우리는 ‘중보기도’라고 여긴다.


그래서 자기 수첩에, 교우들의 이름과

그들의 기도제목을 쭉 적어놓고,

그 이름과 기도제목을 보면서, 그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린다.

그래서 그의 학업, 직장, 사업, 진로를 위해서 <중보기도> 해 준다.


그리고 어느 교회는 <중보기도 팀>이 있어서,

조직적으로 어떤 ‘자기란 직접 관련이 없는 제목’을 놓고서 <중보기도>를 드린다.

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중보>의 원래적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를 뜻한다.

중보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먼저 <중보>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함이 필요하다.

 

    ※중보의 예

삼하13장에 보면, 다윗의 장자 암논이 자기 이복여동생 다말을 범한다.

그런 일을 계기로, 다말의 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외갓집으로 도망갔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다윗 왕의 마음에

압살롬에 대한 적개심이 차츰 누그러지면서, 그에 대한 그리움이 싹트게 된다.

삼하13:39,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마음이 간절하다고 했다.


요압 장군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았다. 삼하14:1

그래서 요압 장군이, 다윗 왕과 압살롬 사이를 중재한다.


그런데 쉽게 압살롬을 데려오지 못하는 것은 ‘공의’ 때문이다.

형을 죽인 죄(공의)와/ 아들에 대한 마음(사랑)이 다윗 마음속에서 갈등이 된다.


이때 요압은, 드고아의 여인을 이용해서

‘불쌍한 과부 엄마를 살리기 위해, 형제를 죽인 아들을 데려와야 한다’는 논리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던 다윗의 마음에 속 시원하게 답을 준다.

압살롬을 데려올 수 있는 명분을 준 것이다. 아주 지혜롭게!


요압이 기가 막히게, 중보한 것이다.

즉, 다윗 왕의 마음을 잘 알아서, 왕의 마음에 근심/짐/부담이 없도록

아주 지혜롭게 어떤 문제를 해결해 버린 것이다.

 

즉, 중보기도란, 중보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하나님 마음 편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주체가 하나님)

 

반면에, 오늘날 우리의 중보기도는 (중보기도의 주체가 인간)

하나님의 마음에 관계없이, 내가 알아서 내가 좋은 방향으로 기도하는 것인데...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느1:3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포로가 귀환한 상황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멋지게 회복시키실 수도 있는데,

<공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범과로 인하여... 그들을 파격적으로 돕지 못하시고,

지금 미적거리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

다윗이 범죄한 압살롬이 다시 회복되기를 원한 것처럼

하나님은 범죄해서 포로가 되었다가 겨우 귀환한 이스라엘이

옛날 영광을 다시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지금 딜레마에 빠져 계신 것이다...


▲중보하는 느헤미야


1:10,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을 때에

느헤미야가 나서서, 하나님의 측근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재(중보)하고 있다.


위 10절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는

마치 압살롬을 위해 요압이 다윗에게 변호하듯,

하나님의 <사랑>을 자극하고 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중보>와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A형제의 취업시험’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

하나님의 마음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이,

무조건 ‘A형제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 준다.

그러면서 이것을 ‘중보기도’라고 생각하지만,


원래 ‘중보’ 또는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측근으로서 잘 알아서 보살펴 드리는 것’을 뜻한다.


마치 요압이 다윗 왕의 마음을 잘 알아서 압살롬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것처럼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마을을 잘 알아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한 것이   느1:10 

성경적 의미로서 ‘중보’요, 그런 기도가 ‘중보기도’인 것이다.


‘중보자’ 역시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중보기도는

내가 하나님과 A형제 중간에 서서

‘A형제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것인데,

‘취직을 위한 기도, 건강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일차적 관심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왕/주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아야 한다.

중재자인 내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중보하는 A형제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의 방향을 보고, 예민하게 알아차려서..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이다.


A형제가 원하는 것(취업, 결혼, 재태크)이 무조건 잘 되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중보기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할 가능성이 별로 없으니까 그렇다.


A형제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려서

그 뜻과 그 마음의 원대로 이루어지도록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기도하는 것이 <올바른 중보기도>라는 것이다.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광야에서 멸망시킬 것 같으면,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제하여 주소서’ 하면서까지 간절히 기도한 것은,


우리 생각에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모세가 기도한 것 같지만

모세가 알아차린 것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가장 마음아파 하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모세는 기도한 것이다.

그렇게 마음 아파하시니, 차라리 대신에 저를 멸망시켜 달라고!


항상 우리의 기도의 관점과 초점이

사람 편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서..

보고, 판단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중보기도이다.


▲적용, 참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그 집안에 영생을 주시고, 참된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그 집안의 사업이 망하기를 더 원하실 수도 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기도하는 것이.. 참된 중보기도이다.

무조건 사람의 생각에 좋은 대로 기도해 주는 것은.. 샤머니즘적 기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기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며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의 움직임을 보면서, 기도하며, 말씀을 전파했다.

그러니 자기나라 안에서는 ‘역적과 간첩’이 된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이 정하신 매를 맞고서라도 돌이키라’는 것이다.

이왕 ‘매를 맞을 바에는 순순히 맞는 것이 더 좋다’는 식으로 예언했는데,

악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 자녀를 위해서/교회를 위해서/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시는가?

먼저 하나님의 측근이 되어, 하나님 마음의 동향을 파악하시라.

무조건 내 소원대로, 내 생각에 좋을 것 같은 방향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하고/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올바른 중보기도이다.

그런 느헤미야와 같은 중보기도자들 다 되시기 바란다.


▲마치는 말

중보기도를 하면서, 교우들을 위해 기도해 드릴 때

‘내가 생각하는 그의 필요들’

‘그 A형제가 생각하는 그의 필요들’

쉽게 말하면 ‘소원 성취’의 기도제목들,


그것을 수첩에 적거나, 종이에 적어서

기도 시간에 대신 기도해 주는 것은

성경적 의미의 중보기도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중보기도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이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측근이었지만,

영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측근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렸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호소했다.

이것이 진정한 중보기도이다.


우리도 이렇게 중보기도자가 되자.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아드리는,

느헤미야와 같은.. 하나님의 측근이 되자.



.................................. 더 읽으실 분 .................................


▲본문의 배경

느헤미야 1장은, 1차 포로귀환(주전537, 스룹바벨의 귀환) 과

2차 포로귀환(주전458년, 에스라 귀환)이 끝나고

약 14년이 지난, 주전 444년 즈음이라고 본다.


이미 성전이 재건되었고,

에스라가 율법을 통해, 율례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아주 열악했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다. 1:3~4


▲참된 중보기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만 할 수 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1:5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아드리는 사람만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아드리려면,

하나님이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되심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돈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다른 세상 현실들을 두려워하면서,

정작 하나님은, 우리가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1:5


느헤미야는 술맡은 관원장으로서, 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면서

아닥사스다 왕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임을 잘 알았을 것이다.

‘술 관원장’은, 술뿐만 아니라, 왕이 먹는 음식 전체를 관장하며

왕의 침실 시중까지 드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약간의 실수나 불미스런 사건만 있어도.. 당장 처형이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런 왕궁의 황제의 두려움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되심을 고백했던 것이다.

그런 황제의 두려움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 두려운 하나님을.. 고백했던 것이다.


▲천년의 사랑(신앙)을 회복하려는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본문에서, 천 년 전에 <모세의 언약>을 꺼내고 있다.


1: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1: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1:9,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모세 당시로부터 천년이나 지났지만,

‘천년을 지속하면서도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헤미야는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고 있다.                                                                   ▣ 기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