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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십니까?

LNCK 2009. 9. 10. 19:56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십니까?     약4:5~8   04.08.01. 스크랩, 정리

 

 

여러분,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혹시 어떤 분이,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께 뭘 얻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주객이 전도(바뀐)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만 하려는 심리입니다...

  

▲친밀감이 없으니까.. 이혼의 위기가 옵니다.

23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아온 아내가, 이혼을 결심하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오랜 기간의 결혼 생활을 이제는 청산하려고 합니다.

남편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과묵하고, 신실하고,

작은 어려움이 있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제게 결코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에 큰 벽을 쌓고 있어서, 그와 함께 있으면 때로 숨이 막혀 오기도 합니다.

남편과 함께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그와 함께 살기를 포기하고 떠나려 합니다.”

 

여러분, 친밀감이 사라진 부부는, 지금 함께 살고 있다 해도

언제든지 이혼의 위기에 봉착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이야기 속의 남편은 왜 아내에게 자신을 열어 놓지 않았을까요?

왜 높은 방어벽을 아내에게마저 쌓았을까요?

 

분명히 남편에게도 아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남편의 중심을 들여다보면,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이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 주면

아내가 업신여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나약한 남편이라고 깔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남편은 늘 아내에게 일정한 간격과 거리를 두면서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남편의 방어벽 때문에.. 아내는 떠날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남편의 삶에 도무지 끼어들 자리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사람과 평생 살 수 있을 것인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친밀감이라고 하는 것은 부부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부부는 열정이 사라지고 나면 우정으로 삽니다.

부부는 ‘성관계’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우정’이 그들에게 있을 때.. 평생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이것은 신앙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한 마디로 ‘주님과 친밀감’입니다. 4:8

예수님을 아무리 믿어도.. 예수님과 친밀감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친하지 않은 친구와 만날 때처럼, 예수님을 만나도 어색합니다.

예수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해도, 기도해도.. 서먹서먹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과 친밀한 삶의 자리에 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외롭습니다. 마음이 시립니다. 마음이 춥습니다.

 

친밀감이 없는 신앙은, 마치 친밀감이 없는 결혼처럼 밋밋하고

때로는 건조한 사막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도 인격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본문 야고보서 4:8절에서 야고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하나님께 가까이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가까이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의 삶에 가까이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사랑해 오신

짝사랑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게 좀 가까이 와라! 내가 너를 좋아한다. 나는 너와 만나고 싶다.

너와 대화하고 싶다. 내 앞으로 좀 가까이 와라!’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상관없는 존재라고 그를 뿌리쳤습니다.

지금도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2. 질투하시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약4:5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우리 인간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존재에게 그 사랑을 거절당하심으로

가장 먼저 사랑의 아픔을 겪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만들고 내가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내 사랑은 거절하는구나...’

하고 하나님께서 통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습니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너한테 그냥 다 주고 싶다.’

 

또 우리가 멀리하면 섭섭하게 생각하고 눈물로 호소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약4:5절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만큼 우리를 사랑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다른 어떤 우상을 사랑하면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막 질투하시고, 시기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질투를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안타깝고 뼈아픈 경험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그런 질투와 애정으로

애타게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나와 친밀한 교제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내 마음이, 이런 질투심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굳어져 있다면

내 속에 과연 주님이/성령님이 계시는지.. 정확히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안 계시니까, 그런 질투심도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요즘 말로 표현하면 윈윈(win-win) 법칙입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상생의 원리입니다.

서로가 사는 것입니다. 서로가 이기는 것입니다.

 

‘내게 가까이 오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가까이 가겠다.

너도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고, 나도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너도 이익이 되고, 나도 이익이 될 것이다.

너도 승리하고, 나도 승리할 것이다.’

 

여러분! 이런 인격적인 관계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TV 뉴스를 봐도, 신문을 봐도 우리 사회에는 갈등과 미움뿐입니다.

노사관계를 봐도 그렇습니다.

왜 함께 더불어 가지 못하고 그렇게 원수처럼 분노하는 것입니까?

 

정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야간에 우리의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함께 토론한다고 하면서

왜 그 마음속에는 미움과 저주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주위의 모든 관계는 윈윈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승리하면 누군가는 패배당하는 철저한 경쟁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원리는 다른 것입니다.

‘너도 승리하고 나도 승리한다. 너도 존재하고 나도 존재한다.

너도 큰 목적을 이루고 나도 큰 목적을 이룬다.

너도 나를 채우고 나도 너를 채운다. 너도 기뻐하고 나도 기뻐한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총을 누리고/나누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윈윈/상생의 사랑’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 인간의 서로간의 사랑도 이렇게 되어야 마땅한데,

우리가 서로 이기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한 쪽은 이기지만, 다른 쪽은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윈윈이 되지 못합니다.

 

가장 숭고하다는 부모의 사랑도 잘못하면.. 부모의 욕심이 크면

자녀가 도리어 상처를 받는 것을 봅니다.

 

친구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연인 관계도.. 진실한 사랑은.. 윈윈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내 욕심만 채우려하고, 내 요구만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 하는 것은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도리어 상처만 남는 사랑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너무 주저하지 마십시오.

 

‘혹시 나 혼자 하나님을 짝사랑하다가 버림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렸다가 너 같은 것은 보기도 싫다고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지레짐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부터 우리를 짝사랑하셨습니다.

본래부터 우리 앞에 가까이 와 계십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돌아서기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조금만 다가오면 주님은 열 배 백 배로

우리 앞에 가까이 다가옵니다.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나의 친구다.”

이렇게 우리를 초청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한 아브라함이 “내가 믿겠습니다.”

그 한마디를 고백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두고

“아브라함은 나의 벗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고통을 이겨 나가는 욥을 보면서 “봐라! 욥이 바로 나의 벗이다.”라고

선포하신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나 욥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보통 사람들입니다. 실수도 있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벗'으로 칭함 받은 것은.. 저와 여러분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될 수도 없는 작은 믿음 하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사랑하는 벗으로 맞아 주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마음으로부터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와야 합니다.

(언어를 몰랐던 헬렌 켈러가 언어를 깨닫게 된 계기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임해야 합니다.)

 

헬렌 켈러의 자서전에 보면,

설리번 선생이 일곱 살 난 헬렌 켈러를 지도하게 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듣지도/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장애인이었습니다.

설리번 선생을 만나기 전까지 이 소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짐승 소리를 내면서

모든 것을 마구 내던졌습니다. 식탁에 접시들을 팽개치고,

자신의 몸뚱이까지 마루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헬렌 켈러의 어머니에게 “아무래도 당신 딸은 백치요.

참 미련한 딸이요.” 그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설리번 선생은 사랑과 정성과 헌신으로 이 헬렌 켈러를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헬렌 켈러가 자기 손에 물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면서

설리번 선생은 다른 쪽 손에다가 ‘water’, 즉 ‘물’이라는 말을 써 주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그 당시를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내가 우물에서 펌프에 쏟아지는 물을

작은 컵으로 받고 있을 때에 일어났다.

앤 설리번 선생님은 펌프로 물을 푸면서

컵을 채우고 남은 물이 내 손바닥을 적실 때

또 다른 손바닥에 ‘water’라고 하는 말을 써 주었다.

 

갑자기 나는 알게 되었다.

병을 앓은 이후로 처음 느끼는 벅찬 기쁨에 사로잡혀

나는 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무엇이든지 내가 만질 수 있는 것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였다.

 

의미의 불꽃이 연이어 이 손바닥과 저 손바닥에서 타올랐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내 속에서 애정이 싹텄다.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서로 ‘헬렌!’, ‘선생님!’ 하면서 우물에서부터 걸어나왔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듣지도/말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도저히 '언어'를 깨우칠 수 없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설리번 선생의 열정적 가르침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섬광처럼

'언어'에 대한 깨달음이 왔습니다. 헬렌 켈러는 너무 놀라고 기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섬광같은 깨달음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3. 친밀한 관계는 외도를 하지 않습니다. 4:8b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8절에 보면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요즘 말로 하면 ‘한번 내게 마음을 주었으면 바람을 피우지 마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바람이 아닙니다.

‘영적인 바람을 피우지 마라! 이제는 사탄을 적대할 줄 알고,

자기 몸을 성결하게 할 줄 알며,

두 마음을 품고 이쪽으로 왔다가 저쪽으로 왔다가 그렇게 살지 마라!’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남편이, 또는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이성을 찾아서 애정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노요, 불신인 것입니다.

 

모든 인격체가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면서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나 여호와만을 사랑하라. 나는 하늘의 하나님이고, 땅의 하나님이고,

온 우주의 하나님이다. 어찌하여 너희들이 바알을 섬기고 있느냐?

우상 숭배를 거두어들여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우리들에게 이야기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의 업적을 만들어 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큰 선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있기를, 하나님과 가까이 있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같이 있어 주는 것

열 살 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부자여서

모든 것을 선물로 다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생일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내일이 네 생일이구나! 뭐 가지고 싶은 것 있니? 내가 뭐든지 사 주겠다.”

그랬더니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이제 물건은 필요 없어요. 그냥 내일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저와 함께 있어 주기만 해요.”

 

그러자 바쁜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미안하구나. 내일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하는데...”

 

여러분, 자녀들을 사랑할 때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십니까?

달려가기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돈을 위해서,

업적을 위해서 사랑하는 아내(또는 남편)와 자녀들을 떠나보낼 정도로

그렇게 인생이 바쁜 것입니까?

 

하나님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 예배드릴 시간조차 없을 만큼

우리 인생이 바쁜 것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바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해라! 내 앞에 가까이 오기만 해라!

나는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나와 함께 사귀자!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

나를 즐겨 보아라! 나도 너를 즐기고 싶다.’

 

 

▲4. 나와 눈높이를 맞추신 친구, 예수를.. 이 시간에 내 마음에 초청합시다. 

그럴려면 먼저, 내가 낮아져야 합니다.  약4:6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것은,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질병의 아픔을 아시면서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받았던 고통의 그늘을 손수 경험하면서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신음하는 이 죄악의 시험 문제를 당신의 몸속에서 직접 다 겪으면서

다가오시는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니, 그분은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우리보다 더 많은 아픔을 경험하셨습니다.

우리보다 더 외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우리의 업적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품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재산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 우리를 대하고 찾아오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낮아지셨기에 우리에게 한 가지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교만한 마음으로 나를 만나지 마라!

나도 낮아졌기 때문에 너희도 나를 만나려 한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만나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 약4:6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요구하시는 한 가지 조건은 겸손한 것입니다.

 

‘내가 낮아진 그 자리에서 너를 초청했으니 너도 갖고 있는 모든 것,

네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내 앞에 나오라.’고 하는

초청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하나님과 사귀려고 할 때, 다른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업적을 많이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친히 우리의 연약한 모습으로 낮아지는 것처럼
우리도 겸손한 그분 앞에 나아가게 되면

그분은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를 친구로 영접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치는 말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필수 사항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그냥 하나님 앞에 나오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시면

하나님 앞으로 나오시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무엇일까요? 신앙은 진정한 친구를 만나는 일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최고의 친구, 영원한 친구, 이 친구를 만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그런 친구(예수)를 만나는 것이

신앙을 갖는 복인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순간이 올 때,

아무도 요단강을 건널 때, 나와 동행해 줄 친구/가족이 없습니다. 아니, 동행 못 합니다.

그 때 가장 필요하신 분은, 내 친구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내 손을 잡아 주셔서, 요단강을 건너서, 천국으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럴려면 젊어서부터, 주님과 동행하는 습관을 쌓아야 합니다. 어떻게 임종 때 하룻만에 되겠습니까?  

 

                                                                                                                  ▣ 그리스도의 임재 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