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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섭리적 인도 2083

LNCK 2009. 9. 15. 11:06

◈주님의 섭리적 인도           행12:13~17              09.08.16.설교녹취



◑주님의 섭리적 인도를 받았던 베드로 사도


베드로 사도가 처형을 앞두고,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오직 하나님만 아셨다.


▲베드로의 의연한 순교를 기다리던 성도들

옥에 갇혀서 처형을 기다리던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의 내용

베드로가 살아서 무사히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가진 성도로서,

주님의 증인(순교자)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 비는 것이었다.  -관련글 클릭-

 

그런 와중에, 갑자기 한 밤 중에, 베드로가, 자기들이 모인 집의 대문 밖에 서 있으니,

거기에 모인 성도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2:16


주님의 생각은, 성도들의 생각과 달랐다.

주님의 생각은.. 베드로의 석방이었고,

기도하던 성도들의 생각은.. 베드로의 순교였다.


▲자신의 의연한 ‘증인의 삶’을 기다리던 베드로

자신의 처형을 코앞에 앞둔 베드로는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행12:6절의 ‘누워 자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코이마오’인데, 신약에 18번 나온다.

    그 중에 3번은 ‘잠자다’로, 15번은 ‘죽다’로 나온다.

    그러니까 ‘코이마오’는 잠을 자되 '마치 죽은 듯이 깊이 잠들다‘는 뜻이다.

    그날 밤 베드로는, 감옥에서 잠을 잤지만, 선잠을 잔 것이 아니었다. 죽은 듯이 깊이 잤다.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겼으므로 평안하다’ ... 이런 뜻이기도 하고,

‘주님이 그에게 그런 평안의 잠을 주셨다’ ... 이런 뜻도 된다.


기도하던 성도들처럼, 베드로 자신도, 

자기 앞에 당한 현실을.. 담대함과 자부심으로

증인(순교자)의 삶을 사는 기회로 의연히 받아들이기를, 기도하며 기다리고 했는데,

주님의 생각/섭리는, 사람의 생각과 달랐다.


그렇게 죽은 듯이 잠 든 베드로를.. 천사를 보내어 기적적으로 구출해 주셨다. 행12:7

이 일은, 베드로 자신조차, 스스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감옥을 빠져나와 천사가 떠나고 길에 혼자 남겨졌을 때,

비로소 사도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이것이 주님의 손길이었음을 인식했다.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2:9~11


이 말씀은, 베드로가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전혀 뜻밖의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주님의 생각/섭리는.. 사람의 생각과.. 종종 많은 면에서 다르다.

성도들은, 그냥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갈(끌려갈) 뿐이다.          ←설교문의 주제 


비로소 베드로는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뜻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놀라서 웅성거리는 좌중을 조용히 하게 한 후에,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했다.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엑사고)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2:17


여기서 ‘나오게 하다’는 헬라어로 ‘엑사고’인데, <데리고 가다, 인도하다> 라는 뜻이다.

행7장에 스데반의 설교가 나오는데, 그 중에

‘모세가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엑사고) 하고 40년간 광야에서...’  7:36


즉 '엑사고'는 자기 멋대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를 뜻한다. 출애굽해서 나온 하나님의 섭리처럼.


요10:3절에도,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엑사고)

이 구절 역시, 제 멋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섭리적 인도를 뜻한다.


다시 본문 행12:17절로 돌아가서,

베드로가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엑사고) 일

마치 출애굽 같은/ 마치 목자가 양을 불러 인도하여 내는 것처럼

어떤 주님의 강한 섭리적 인도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 주님의 섭리를.. 베드로는..

거기에 모인 성도들에게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떠나 (섭리적으로) 다른 곳으로 가니라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2:17


여기서 베드로가 ‘떠나 다른 곳으로 간 것’도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에 의한 것이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냥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인도해 가신 것이었다.


왜 다른 곳으로 떠났는지, 어디로 떠났는지...

그 이유는, 본문에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섭리적 인도’라고 믿을 뿐이다.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2:17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스스로 간증하지 않고,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에게 대신 간증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계속 남아 있을 이유(간증할 일)가 있었지만

그 일을 다른 사도에게 부탁하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는 말이다.

 

주님이 섭리적으로 그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셨듯이

또한 주님이 섭리적으로 그를 다른 곳으로 인도해 가셨다는 뜻이 된다.


이 구절 행12:17절은, 베드로 사도의 행적의

사도행전에서 공식적인 마지막 기록이다.

이후로 사도행전의 카메라는, 베드로에게서 바울로 옮겨진다.


베드로 사도는 행15장,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잠시 나타나

‘이방인의 할례와 율법 준수’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할 뿐

사도행전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행12장에서, 베드로 사도의 삶을 종합해서 말하면,

그는 섭리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는 섭리적으로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그렇다.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인다.  ←이 설교문의 주제 

그 섭리는, 때로는, 인간의 상식과 예상을 전혀 뒤집는 것이 될 때도 있다.


이런 섭리적 인도에 의한 삶을

빌립 집사에게도 그대로 보게 된다.



◑주님의 섭리적 인도를 받았던 빌립 집사


▲빌립의 사마리아 이주에 담긴 섭리

빌립은 원래 예루살렘 교회의 7집사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는 섭리로 인해, 사마리아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사마리아 성의 복음화에 주역이 된다.


원래 예루살렘에서 빌립이 했던 일은.. 주로 구제사역이었다.

그런데 사마리아 성에 와서 빌립이 했던 일은.. 주로 설교/복음전파 사역이었다.

그의 사마리아 도피는.. 사마리아 성의 복음화를 위한 주님의 섭리였다.


▲가사로 내려가라는 주님의 섭리

팔레스틴의 지도를, 알기 쉽게 우리나라 지도에 견주어 설명하면

예루살렘은.. 광주 즈음이고,

지금 빌립이 살던 사마리아는.. 대전에 해당한다.

주의 천사가 내려가라는 ‘가사’는.. 완도 쯤에 해당된다.

 

사마리아에서 가사까지는.. 거리적으로도 상당히 걸어가기 먼 거리였고,

더군다나 거기는 사람이 살지도 않는, 메마른 광야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성령의 인도에 순종해서 가사로 내려갔더니

거기서 에티오피아 고위관료를 만나서 전도하게 된다.


▲가사에서 가이사랴로 이주한 빌립


행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위 성경은, ‘빌립이 성령의 인도로 또 길을 떠났다’고 되어있다.


빌립은 거기서 해안선을 따라 북상해서, 가이사랴에 정착하게 된다.

가이사랴는, 한국 지도에 견주면, 태안 쯤 된다.

그 가이사랴에서, 빌립집사는, 사도바울과 만나게 된다. 행21:8


빌립집사는..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길을, 자신이 계획해서 걸어가지 않았다.

주님이 인도하시고, 성령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끊임없이 순종하며 나아갔을 뿐이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위인들 치고,

자기의 계획대로, 자기가 원하는 길을 걸어갔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았을 뿐이다.



◑다른 믿음의 위인들의 예


노아는, 단 한 번도, 자기가 하나님께 방주를 만들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부르셔서,

방주를 짓게 하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그를 우뚝 세우셨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자신의 후손이 가나안 땅에 살 계획을 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르셔서, 가나안 땅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살아가도록, 그의 삶을 섭리적으로 인도하셨다.


모세는, 바로 왕과 맞서서 싸울 계획을 세운 적이 없었다.

게릴라전이라도 벌이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아서 훈련을 한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삶이었다.

더욱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그림자(모형)’이 되게 하는.. 섭리를 이루셨다.


다윗도 왕자로 태어나지 않았다.

제왕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멸시하는 한낱 목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으로 인도하셨고, 순종한 결과

그는 모든 크리스천의 표상이 되었고, 그 역시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었다.


모두가 자기가 계획하고, 자기가 원하고,

자기가 그린 그림대로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


자기는 전혀 꿈도 꾸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 가운데서, 그 섭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었다.


사도바울 역시,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살아갈 것을

한 번도 계획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반대 편에 속해 있었으나,

주님의 은혜로 그를 불러내시고, 주님은, 그의 삶을 섭리적으로 인도해 나가셨다.


본문의 베드로 자신도, 자기가 옥에서 구출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주님께서 섭리적으로 그를 구출해 주셨고,

또한 그는 섭리적으로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빌립도 마찬가지였다.

예루살렘→가사→가이사랴로 갈 때, 언제나 주님의 섭리를 따라서 움직였다.


▲마치는 말

우리에게도 각자가 걸어갈 길이 있다.

그 길은, 주님께서 섭리적으로 인도해 주시는 길이다.

내 생각과 많이 다를 수도/같을 수도 있는 길이다.


다만 우리는 말씀의 인도가운데서

혹은 빛의 인도함 가운데서

혹은 성령의 인도가운데서

그 길을 성실하게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손과 손이 악수하듯

주님의 섭리적 인도의 손길과

우리의 순종하는 발걸음이 함께 만날 때,

오늘날 우리도,

사도행전의 29장을 새롭게 써 나가게 될 것이다.

 

※관련글 :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이 가장 복되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