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영'에 대해 알기 롬8:14 09.08.09.설교 녹취/많이 정리
어느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님의 강의식 설교
나는 ‘사람의 영’으로 인도받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사람인가? ... 한 번 살펴봅시다.
◑‘사람의 영’으로 인도받기
▲‘사람의 영’이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영’은 ‘성령’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반대된다.
교회가 ‘성령/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받지 못하면,
반드시 ‘사람의 영’에 의해 인도받고 만다.
그 결과는 우리 주변에서 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분쟁, 당파, 대적 등등..
그래서 ‘사람의 영’이 어떤 것인지,
지금 우리 주변에 나타나는 현상을 취합해서
한 번 사례를 분석해 보면서, 그 실체를 밝혀 보려고 한다.
‘성령/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많이 이루어졌으므로,
여기서는 ‘사람의 영’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의 영’은 성경에 간접적으로 나온다.
‘성령/그리스도의 영’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일단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쉽게 말하면 ‘인간적인 생각/사람의 혼soul의 생각’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영’에 의해
지배받는 그런 어떤 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어떤 사회학적인 현상이랄까...
사람이 혼자 있으면 그런 일이 안 일어나지만,
사람이 모여 있으면, 반드시 ‘사람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사람의 영’으로 인도받는 사람은
자기 ‘지. 정. 의’에 의해서 판단하고/말하고/행동한다.
우리가 다 배우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서.. 이렇게 인간의 지정의로 행동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만,
여러분, 그러나 그 인간의 지정의도 본성으로 타락한 가운데서 생긴 지정의 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지정의로 겉으로는 교양있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그 본성은 절대 선하지 않다...
▲1. ‘소속감 남용’은 사람의 영
이단은 물론이요, 일반 모임 단체에서도
그 단체에 소속되는 것이 선이요,
그 단체를 떠나는 것은 일종의 악으로 간주된다.
이런 ‘소속감’이 심한 경우에는,
조직폭력이나 이단 같은 단체에서는 *여기서 이단은.. 명백한 이단을 뜻함
그 단체를 떠나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한다.
소속감이라는 ‘사람의 영’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맹신적인 행동을 자행한다.
신앙 공동체에서도 ‘소속감’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기도 하는데,
그 공동체에 소속하면.. 복을 받고,
거기에 소속하지 않으면.. 화가 임하리라는 말을.. 필요이상으로 강조한다.
이게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
우리 교단, 우리 교회에 소속하면.. 복을 받고
다른 교단, 다른 교회에 소속하면.. 복을 받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같은 기독교지만, 교단끼리, 교회끼리 서로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우리나라가 1970년대까지 그런 경향이 심했고, 지금도 빈국에 가면 그런 배타주의가 똑같이 심하다.
자기 교단이 아니면, 같은 기독교라도 서로 배타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이런 모든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인도받지 못하고
‘사람의 영/혼적인 생각’에 의해 인도받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범위를 더 좁히면 ‘소속감’이다.
예를 들면, 두 대기업 사원들은, 상대 회사를 필요 이상으로 적대시 할 수 있다.
지방색도 ‘소속감’에서 나온다.
세상은 거의 다 ‘혼적인 생각/인간의 영’에 의해 지배받는 사회이기 때문에,
자기 그룹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은.. 일단 배타적이 된다.
그러나 신앙공동체는 ‘성령/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세상공동체와 달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앙공동체라도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지 못하면,
‘사람의 영/세상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고.., 그러면 잘못된 소속감을 갖게 된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리더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소속감’이란 멍에를 지워서, 사람들을 인도해 가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과 똑같다’는 말이 들리는 것이다.
오늘도 사실 이 ‘소속감’ 문제는 뜨거운 감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큰 교회로 옮기는 이유는 ‘소속감의 자유/해방’을 원하기 때문이다.
요지는, 신앙공동체에서 ‘사람의 영'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소속감’을 행사하려다가는.. 오히려 덧난다.
오직 ‘예수의 영’과 그 권위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속감’만 말할 때
사람들은 거기에 진정 복종하게 될 것이다.
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실험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오늘날 만약에 ‘소속감 요구 없이 전도하는 전도자’가 있다면
어쩌면 하나님 나라에 더 열매를 많이 거둘 것이라고 본다.
빌리 그레함, 휫필드 처럼 그리스도를 강력히 전도하지만,
소속감을 꼭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전도가, 복음전파-구령의 한계를 넘어서(여기까지는 어쩌면 쉽다)
자꾸 자기 공동체에 소속시키려는 데서 (여기서부터는 어쩌면 어렵다)
그것이 오히려 복음전파의 열매를 축소시킬까봐 우려된다.
또한 ‘우리 공동체에 소속 안 될바에야, 그런 전도는 관심 없다’... 이것도 곤란하다.
현실이 이렇지는 않지만, 마치 이런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빌리 그레함’같이.. 전도는 하되, 소속감까지는 가지 않는
그런 ‘복음 전파자’(엡4:11)들이 이 시대에 많이 등장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대부분은, ‘교회 등록시키는 전도’방식만 행하고 있는데,
그것이 필요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전체의 전도를 축소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빌리 그레함/휫필드 같은 ‘순회전도자’들이 오늘날 많이 나와야 한다.
(전도를 하되, 꼭 우리 교회에 나오라는 식은 아닌 순회전도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이다.
'저 분이 목회를 떼 내면 더 많이 전도할 수 있을 터인데,
목회에 발목 잡혀, 전도/영혼구원을, 자기 역량의 10% 밖에 발휘 못하는 모습을 가끔씩 보는데...
참 안타깝다.
▲2. ‘좋은 사람/싫은 사람’을 구분하는 사람의 영
하나님은 사람을 각각 다른 성향으로 창조하셨다.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단 것을 싫어하고 매운 것이 좋다는 사람이 있다.
그런 성향의 차이, 성격의 차이 때문에, 또한 본질적인 우리 죄성으로 인해
사람은.. 친형제라도, 또는 부모자식 지간이라도.. 서로 좋아하기도 하고/서로 싫어하기도 한다.
이렇게 내게 좋은 사람, 내게 싫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영/사람의 혼’에 의해 지배받을 때 .. 그렇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성령/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받으면,
사람을 내 기호에 따라서 차별하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형제요, 지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영원히 좋을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사람의 영/사람의 혼’으로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보아도,
결국 그 속에서.. 또 서로 싸우고, 갈라진다.
'사람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다.
어떤 신학자는, 목회자의 설교를 ‘사람의 심장’에 비유한다.
심장에서 신선한 피가 공급되면, 그 피가 모든 실핏줄까지 타고 흐르면서
몸의 각 기관이 모두 다 건강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심장에서 신선한 피가 공급되지 않으면,
결국 몸의 5장6부를 위시해서 각 기관들이 차츰 산소와 영양 공급이 안 되면서, 병들기 시작한다.
그 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분쟁’이다.
목회자의 설교가 ‘성령/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전달되면,
몸의 모든 기관들이 ‘성령/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받는다.
그 때 분쟁이 사라지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싫어하는 사람이 사라진다.
그렇지 못하고 ‘사람의 영’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공동체는
분쟁/분열/당 짓기... 이런 것들을 절대 피할 수 없다.
‘사람의 영’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3. ‘직분’ 남용'은 사람의 영
교회 직분이 철저한 봉사직 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서구의 일부 교회에서는 20대, 30대 청년이 ‘장로elder’를 맡기도 한다. (이것이 꼭 좋다는 뜻은 아님)
그 직분의 개념이 ‘봉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양의 유교적 문화 가운데서는
‘목사’ ‘장로’ .. 이런 직분이 ‘감투’가 되기도 한다.
어떤 무시할 수 없는 서열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 안 해도 우리가 다 안다.
다만 그 정체가 ‘사람의 영’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자는 것이다.
신앙공동체에서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떠나가시면, ‘사람의 영’이 지배하게 된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 중 한 가지가.. 교회 직분이 감투/서열/권력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영’이 강력히 지배하는 신앙공동체는
아무도 직분을 감투로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봉사로 생각하고, 오직 서로 섬기는 일에만 열중한다.
이 분야가 더 심하게 발전(악화)되면,
교회 직분을 얻기 위해 헌금을 많이 하게 되고 (얻은 다음에는 헌금이 확 준다)
지도자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요직에 앉히게 되고,
그래서 요직을 차지하기 위해, 지도자에게 잘 보이고, 청탁을 하는 등
이런 ‘사람의 영/인본주의’ 현상이.. 특별히 조직이 클수록 더 강력하게 나타나기 쉽다.
과거에 지도자에게 식사대접, 양복, 봉투, 자동차 사드리고 한 것이
순수한 뜻으로 그렇게 한 분도 있지만, give and take 식으로 한 분도 있다.
또 지도자가 은근히 그런 것을 give and take 식으로 요구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교회가 겉으로는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힘은 ‘사람의 영’이 될 수 있다.
여기에 가장 잘 결합되는 파생상품이 ‘물질의 영’이다.
‘사람의 영’이 역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물질의 영’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돈 가진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된다.
▲4. ‘교리’ 남용'은 사람의 영
원래 신약성경이 씌어졌던 1세기에는 ‘삼위일체론’ 같은 교리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그것은 적어도 3~5세기에 하나씩 차츰 정립되어 갔다.
바울의 마게도냐 환상으로 인해, 복음이 유럽/헬라지역으로 서진하게 되면서부터
복음이 자연적으로 헬라철학과 융합되게 되었다.
이것은 장점도 많았지만, 동시에 단점도 있었다.
초대교회 때, 아직 교리적 정립이 없었을 때는
(그로 인해 혼란이 있었을 수도 있었으나)
어쨌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성령의 인도’.. 이런 것을 잘 따랐다.
그렇지만 교부시대에 헬라 철학을 도구(논리학 등)로 해서
기독교가 합리적/논리적/이성적인 설명이 가능하도록 ‘신학화/교리화’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많은 이단적 가르침들을 분별해 내고, 그것을 차단할 수 있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성령의 인도’ 등
어떤 신비적(좋은 의미로) 요소들이, 그 때로부터 점점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그 때 이후로 기독교는,
교리도 있고, 학문성도 있고, 지적인 발전도 계속 이루어왔지만,
반대로 성령의 나타남, 초자연적 역사... 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예외로, 중세 영성가의 신비주의가 잠시 있었고,
종교개혁 이후엔, 독일 경건주의(17세기)에서 약간 간헐적인 뜨거움이 있었지만,
교부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기독교는 약 98% 주류가.. 이성/신학/교리가 주도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 미국의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난 오순절운동의 역사로부터
‘초대교회 이후 잃어버렸던 신비/성령/초자연적 표적/감정적 뜨거움’을
다시 되찾자는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거의 19세기 만에 실로 놀라운 현상이다.(그래서 이제 재림이 가까웠다고 보는 분도 있다. 행2:17등)
사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은사중지설 - 은사와 표적은 성경완성 이후 끝났다- 이 맹위를 떨쳐서,
어떠한 신비적 체험도 이단시 했다. 미국에서도 1960년 이전까지 오순절 운동은 이단 취급 받았다.
그런데 아직도 ‘은사중지설’을 신봉하는 소위 정통파들이 있어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방언, 예언, 하나님 음성 듣기... 이런 것들을 멸시한다.
그러나 지금 대세는 1980년도 이후 일어난 은사주의운동 Charismatic movement 이
특별히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기독교를 뒤덮으면서
딱딱한 교리 보다는, 생기 있는 성령의 은사 쪽으로 대세가 기울고 있다.
어쨌든 ‘교리’와 ‘성령의 나타남’이 서로 적당한 균형과 견제를 이루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남’이 빠진, 딱딱한 철학적인 ‘교리’의 틀로서
기독교를 세워 나가겠다는 것은.. ‘사람의 영’이 될 수 있다.
(물론 ‘은사주의’도 과하게 치우쳐 나타나면.. 마찬가지다.)
▲5. ‘선악과’는 사람의 영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선악을 분별하게 된 것이 뭐가 나쁜가?
이제 선악을 분별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더 잘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주셨을까?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이 나쁘다기 보다는
선악을 분별하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드는 것이요, ‘사람의 영’의 극치가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선’
내가 판단하기에 이것은 ‘악’
(물론 객관적 선악의 기준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똑같이 선악과를 따 먹는 꼴이 된다.
아니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기
중요한 것은 그 안에 ‘혼’이 어떤 상태인가? (혼 : 학벌, 외모, 성격, 됨됨이)
이런 것도 꼭 필요하다.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그 안에 ‘영’이 어떤 상태인가? (성령으로 인도 받는 사람인가?)
이런 것을 꼭 따져봐야 한다.
▲크리스천이 된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4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개역) 갈5:25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는 설교와 전도를 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4
▲핍박을 당할 때, 특별히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내게 역사하신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4:14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성령의 기름)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141:5
그 외에도 스데반의 순교 때 그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본 것,
사도바울의 빌립보 감옥에서 매를 맞은 후에 나타난 간수의 전도 등, 이런 예가 성경에 많다.
▲마치는 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다고 해서
‘사람의 영/사람의 혼’으로 인도받는 삶을 깡그리 무시하면 안 된다.
그러면 현실을 무시한, 정말 이상한 신비주의자가 되고 만다.
우리는 자기의 지.정.의.를 올바로 사용해서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판단/말/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지.정.의.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
‘타락하고 변질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신앙의 세계는, 그런 현실과 이성의 세계를 뛰어넘는
‘성령의 인도/그리스도의 영의 인도’가 반드시 있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그 결과는.. 육신의 썩어질 열매뿐이다. 10년~30년 신앙생활 해도.. 허무하다.
그러나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그 결과는.. 단 1년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도 물론 뿌듯하다. 삶의 행복을 느낀다.
기독교가 그 사회에서 뿌리내리면서 핍박이 사라지고 안정권에 접어들게 되면,
무슨 이유인지 '성령의 인도'가 사라지고, 대신에 '사람의 영'이 판치게 되는 역사를 보아 왔다.
윗 글의 목적은, 적어도 '사람의 영의 인도'가 무엇인지..
그것을 규명하고, 우리가 현실을 깨닫자는데 있다. ▣ 영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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