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한 다윗, 연약한 바울 고후13:4 연도 알 수 없음, 인터넷 설교 녹취
◑한 없이 연약해진 다윗의 기도
▲시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우리는 보통 ‘긍정적으로’ 아래와 같이 기도한다.
‘주님이 주님의 때에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이 주님의 얼굴을 제게로 늘 향하여 은혜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다윗도 아마 평소에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환경의 풍랑이 너무 강하게 몰아칠 때는
위 시13:1절에서 보듯이, 기도의 톤이 ‘부정적으로’ 바뀐다.
내가 몸이 약간 아플 때는 ‘주여,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희망적으로 기도한다.
그러나 몸이 너무 심하게 아플 때는,
‘주여, 왜 제게 이렇게 하십니까? 제가 이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하는 식으로
자기 내장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주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깊은 고뇌와 고난을 주셔서
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내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기도를 드리게 하시는데...
▲13:2,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이런 낙심과 낙망의 깊은 심연에 빠진 기도를,
다윗처럼 우리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설교로 권장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그런 기도를 드리게 될 때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윗처럼, 바울처럼 쓰실 때는
이렇게 극심한 고난과 환란을 주셔서.. 나의 완전한 항복total surrender을 받아 내신다.
그래야 하나님이, 다윗/바울/나를 자유롭게 쓰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완전한 항복total surrender이, 처음에 고백하는 그 순간에는 괴로울지 모르나,
오히려 그 고백을 하고 나면, 자기가 더 자유롭고, 더 능력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런 완전한 항복total surrender이 일생에 단 한 번이 아니었다.
그는 생애에 종종 그는 이런 완전한 항복total surrender의 기도를
그의 시편 곳곳에서 드렸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사망의 잠을 잔다’ .. 다윗이 이제 곧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윗은 지금, 주님이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리신 것처럼 느끼고 있다.
도무지 자기 기도가 언제 응답될지.. 다윗은.. 응답을 기대하는 마음도 다 사라졌다.
그리고 자기 원수가 더욱 득세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13:2b
▲13: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다윗이 아무리 기도해도,
자기 원수가 자기를 이기고 있다.
그래서 다윗의 믿음이 심히 흔들리고,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요동될 때에...
이렇게 다윗은 자기 마음을 토하며(속의 것을 다 끄집어내며)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다윗을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시는 것일까?
저 설교자는, 그 해답을 고린도후서의 바울의 고백에서 찾아본다. ↓
다윗의 고뇌와 바울의 고뇌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연약해진 바울의 기도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바울의 명 설교가 몇 편 나온다.
대표적으로 ‘13장 사랑장’이다.
또 ‘15장 부활장’에서도, 부활에 관한 명설교로 성도들을 가르쳤다.
그 외에도 성만찬에 대해(11장), 은사에 대해(12장),
방언에 대해, 결혼과 독신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명설교를 남겼다.
그런데 그런 명설교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는 별로 차도가 없었는지
사도바울이 다시 편지(고린도후서)를 써서 보낸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에 보면,
사도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제 추측이지만, 마치 사도바울이 목회전략을 180도 수정한 것처럼 보인다.
전서에서, 화려한 가르침을 통해 목회하려다가, 별 효과를 못 본 것 같다.
이제 후서에서, 자기의 연약함을 통해 목회하고 있다.
그 자기의 연약함의 구체적인 내용을 장별로 살펴보면,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지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는 식으로
이렇게 자신 있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다.
여러분,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바울의 불굴의 투지가 엿보인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아도.. 간수장을 오히려 전도하고,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버려져도.. 다음날 다시 벌떡 일어나 전도하러 떠나고
배가 유라굴로 풍랑에 쫓겨서, 밤낮을 구분할 수 없이 14일 동안 표류해도..
바울은 강심장처럼 안심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에 보면,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바울의 연약함이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그런 위대한 사도로서의 자기 간증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행전의 승리하는 기록 가운데 나타나지 않은
‘아시아에서 당한 큰 어려움, 살 소망이 다 끊어진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 1장부터 연약한 자기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일까?
여러분, 우리나라 교회는 지금 한 시기(1막)를 지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기독교는 조국 근대화와 발맞추어
‘성장’, ‘능력’, ‘큰 꿈’을 강조하는 명설교들을 맛보아 오면서.. 교회의 부흥이 왔다.
바야흐로 지금의 인터넷 시대에,
틀기만 하면, 명설교들이 봇물처럼 넘쳐나고 있다.
그래도 지금의 한국교회는.. 전혀 아무런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것은 설교자인 제 생각인데)
앞으로도 우리가 각종 집회를 통해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겠지만,
마치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명 설교와 은사의 능력을 맛보아 알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지는 못 했듯이,.
그래서 한국교회에 생명력이 다시 회복되기 위해서는
(생명력이 진짜 중요하다. 이것이 없으니까 서구의 교회가 몰락한 것이다.)
더 이상의 명설교보다 뭔가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생각이지만,
고린도전서로 안 되면, (바울이 시도한 것처럼) 고린도후서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즉,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한국교회에 필요한 지도자는
‘명설교가’이지만, ‘자기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고후1장에서, 사역을 다 접게 될 것 같은 위기, 즉 사형선고를 당했다고 했던 바울은,
2장에서, 또 다른 연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드로아에서 사역의 문이 자기에게 열렸지만,
형제 디도가 자기 곁에 없다고
드로아 사역을 포기하고, 바울은 마게도냐로 갔다고 했다.↑
아니, 하나님의 사역을, 누가 곁에 있으면 하고/없으면 못 하나?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그랬다고, 디도가 없어서 사역을 포기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은 사도행전에 안 나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아마 그런 것 같음)
▲제(설교자) 개인적 회복 간증
저는 이스라엘에 선교하러 가서, 예루살렘에 몇 년 체류하는 동안,
한국에서도 듣지 못했던, 세계적인 명설교자들을 많이 접했다.
그들이 대부분 예루살렘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구상에서 접하기 어려울 만큼,
전 세계에서 세계적으로 쓰임 받고 있는 분들을
제가 예루살렘에서, 참으로 많이 만나 보았다.
아프리카, 유럽, 남미에서 능력으로 쓰임 받는 주의 종들,
그런데 제가 그들의 그러한 명설교를 듣고,
제 한 영혼이 회복됨을 스스로 체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은혜를 주셨던 계기는
(그 세계적인 종들의 명설교가 아니라)
고린도후서의 참으로 연약해진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또한 시편에서 참으로 연약해진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연약한 내 모습이 그들에게 투사되면서)
나는 점점 회복되어져 갈 수 있었다.
▲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사도바울은, 고후7장에서, 마게도냐로 왔지만, 더욱 큰 어려움이 닥쳤다고 한다.
‘차라리 드로아에서 사역의 문이 열렸을 때, 포기하지 말 것을...’ 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라고 고백하고 있다.
▲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자기의 연약함을 계속 고백하는 것일까? 1장, 2장, 7장에서 계속.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모습은 너무나 씩씩하게 그려져 있다.
돌에 맞아도, 뱀에 물려도, 달려갈 길을 다 가기에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행20:24
용감하게 고백했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는, 정반대의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고린도후서는 바울 자신이 기록.. 저자가 달라서일까?
아니면 사도행전은 외면적 모습을, 고린도후서는 내면적 갈등을.. 시각이 달라서일까?
어쨌든 아주 연약한 체험을 계속 설명한다. 왜?
▲우리 민족의 후반전(2막)이 지금 다가오고 있는데,
즉, 남북 통일이 다가오고 하나 되는 역사가 앞으로 일어날 것인데,.
우리 민족이 강해져서 그런 통일과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후서의 바울처럼) 연약하고, 부끄럽고, 가장 부족할 때..
그런 상태로 돌아갈 때,
그런 연약함의 고백을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 민족의 통일과, 그 통일로 시작될 2막을 허락하실 것이다.
이것은 기도 중에 제(설교자)가 확신한, 하나님께 받은 개인적 체험이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약한 내면이 있고,
아무리 약한 사람도, 또 어떤 면에는 강한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우리 각자가, 자기의 강한 면들을 주로 부각시키고, 보여주고,
약한 면들은 가급적 감추고 보이지 않는 식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왔다.
그런데 제가 전망하는, 앞으로의 부흥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전후한 2막은
1막에서 보여주었던 그런 ‘강함’보다는 (고린도전서 식보다는)
2막에서 앞으로 보여줄 ‘약함’을 통해서 (고린도후서 식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것이.. 내가 기도 중에 받은 어떤 깨달음이다.
▲수많은 설교가 선포되고, 수많은 대형집회를 해 나가는 우리나라에
주님의 앞으로의 해결책은
명 설교와 유명한 집회가 아니라
자기가 실패하고, 연약하고, 참으로 부족함 사람임을 고백하고
아무 힘이 없는 그런 사도바울과/또는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민족과 교회를 새롭게 일으킬 것이라고.. 저는 전망한다.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foolishness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12:11, 내가 어리석은 자 a fool 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기가 어리석은 자, 곧 바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12:9,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2장에서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자랑하고 있다.
그 가시 때문에, 자기가 도리어 능력 있고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증거한다.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약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해서 다시 사셨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고, 그래서 in Christ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다.
그래서 in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이다. 그래서 그 능력으로 강해질 것이다.
▲마치는 말
하나님의 강함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나타난다.
내가 연약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계속 비참한 인생을 살 때라도
하나님의 강함은,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춘기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모두 초비상이다.
아무리 훈육을 하고, 교훈을 주어도.. 오히려 덧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춘기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부모가 자신의 사춘기 시절의 연약함을 토로하며, 자기 고뇌와 실패를 나눌 때이다.
물론 그런 것도, 어떤 의도를 갖고 하면 가증스런 것이 되겠지만,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그런 간증은.. 많은 감동과 역사를 일으킨다.
지금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연약함을 토로하며
고린도교회에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연약해진 바울의 고백'이.. 고린도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강력한 바울'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다윗을, 사도바울을
계속 그렇게 약하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 역시, 약함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사셨다.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것이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약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서 강해졌다. 고후13:4
다시 말하면, 다윗, 사도바울, 예수님, 우리들 모두가
참 능력은 약함 가운데, 죽었다가 부활해서 얻게 되는 강한 능력이다.
그래서 앞으로 통일을 전후한 우리 민족의 2막이 시작될 때에도
하나님이 들어서 쓰실 사람은
명 설교를 하고, 강한 사람이 아니라,
다윗처럼, 사도바울처럼
심령이 상하고, 육체가 편치 못한 사람들을 들어서 쓰실 것이다.
그들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부활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분류기호 : 7384
※고린도후서 저작 시기와 장소는, 어떤 신학자에 의하면, 마게도냐/빌립보라고 보는데,
고후7:5절에 마게도냐에 머물렀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사도행전에 대입하면 행20:3~6절 이후 상황이라고 본다.
즉 행20:6절에, 바울이 드로아에서 7일을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후2:12~13에서 말하는 ‘디도에 관한 에피소드’는 안 나온다. ▣ 부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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