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연도 알 수 없음

불로 단련한 금을 사라 2186

LNCK 2009. 11. 16. 21:22

◈불로 단련한 금을 사모하자          계3:18           인터넷설교 녹취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3:18



◑불로 단련한 금


▲‘불로 단련한 금’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

여러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마치 ‘불로 단련한 금’처럼, 믿음의 시련이 극심한 분들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수월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

가정적으로도, 사업적으로도.. 어떤 심각한 갈등도 없고,

순풍에 돛단 듯이.. 쉽게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있다.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유난하고 특별하게 어려움이 많은 분들이.. 있다.

질병으로 인해, 가정문제로 인해, 또는 사업적인 문제로,

그야말로 ‘팔자가 억센’ 교우도 있다.


불로 단련한 금’은.. ‘불을 통과해서 정련된 금과 같은 믿음’을 가리키는데,

뜨거운 불속에서 불순물이 제거되고, 대장장이가 망치로 두드리는 아픔을 참으면서

비로소 정련된 그런 깨끗한/강한 믿음을 뜻한다.

우리 중에는 이렇게 ‘불로 단련한 금’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도 있다.


▲베드로 사도는 ‘불로 단련한 금’ 같은 믿음을.. 귀하게 여겼다.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즉, ‘불로 단련한 금’은 ‘믿음의 시련’이란 뜻이다.  1:7

정결한 믿음의 수준에 이르는 것이.. 마치 대장간에서 풀무불을 통과하는 것처럼

매우 고난이 많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도 ‘믿음의 대가’를 크게 지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과거의 구소련 공산권에서, 지하교회에서 예수를 믿던 사람들은

혹독한 믿음의 대가를 치러야 했었다.

또한 얼마 전까지 중국에서도, 믿음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가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신사참배 반대와, 625한국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불로 단련한’ 다음에 ‘정금 같은 믿음’을 가졌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에,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편지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극심한 핍박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엉뚱하게도 세상 자랑/돈 자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17

 

그렇게 자고하고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3:22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신다.  :18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전혀 엉뚱한 자랑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보신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리고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서, 라오디게아 교회, 말세의 교회는

‘정금 gold’은 있으나 ‘정금 같은 믿음faith’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금’을 보시지 않고, ‘금 같은 믿음’을 보신다.


▲‘정금 같은 믿음’으로 단련된 사람의 예를 들면, 요셉이다.

야곱의 12형제가 다 믿음이 있었고, 이스라엘 12지파가 되었지만,

그 중에서 요셉은 특별히 ‘정금 같은 믿음’으로 뽑힌 사람이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안이숙 사모님 등이

특별히 ‘정금 같은 믿음’으로 그 시대에 뽑혀서 쓰임 받았던 분들이었다.        ※관련글: 불씨만 있어도


그런데 ‘이삭’처럼, 또 일생을 평탄하게 믿음 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이.. ‘이삭’을 그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본 받기 원한다.

그의 삶이 순탄하고 평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삭과 야곱의 비교


▲이삭

우리가 알듯이, 참으로 편하게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이삭이 특별하게 연단을 겪었다는 기록은.. 성경에는 안 나온다.

우물을 빼앗겼다가도.. 땅을 파면 다시 물이 나오고,

그 해의 소출을 백배나 거두는 등..


뭐 자식을 못 낳아도.. 아브라함처럼 백 세가 되도록 기다렸다는 말도 없고..

(이삭이 62세에 두 아들 낳음, 창25:26)

또한 아내를 얻기 위해서.. 14년간 노동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냥 아버지가 알아서 아내를 얻어 주었다.

결혼 생활도, 아내가 여럿이 아니었으니, 아내끼리 다투는 일도 없었고..


물론 우물을 빼앗기거나,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했던 위험은 겪었지만,

그래도 야곱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평탄하게 살았다. (창25~27장)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마치 이삭처럼,

가정생활이나 비즈니스가 그렇게 순탄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제(설교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렇게 순탄한 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게 좋은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 구약성경에 ‘이삭’이란 단어가 흔하게 나오지 않는다.

이후에 ‘이삭’이라는 말이 아모스 서에 2번 나오는데,    암7:9, 7:16

‘축복에 물들어서,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 나온다.


거기서 아모스 선지자는 ‘이삭의 산당들아’ 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꾸짖었다. 암7:9

‘이삭’이란 말은.. 창세기를 제외하고, 여러 군데 나오지만,

별로 의미 있는 말로는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입으로 내가 험악한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일생이 환난의 연속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이후로, 이사야서 등 선지서에 무수히 등장한다.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많이 등장한다.


또한 다윗의 시편을 보더라도,

아브라함과 이삭보다도, 야곱의 이름이 월등히 더 많이 등장한다. 한 예를 들면,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시20:1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야곱이 ‘환란 가운데, 결국 승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의 삶이.. 비슷하게 환란을 겪는 다윗 같은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사야서에도, 포로로 잡혀갔다가 회복되는 유대 백성들을

‘야곱’이나 ‘이스라엘(야곱의 새 이름)’으로 일컫는 말이 종종 나온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환경적/물질적 축복/평탄한 삶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정금 같은 믿음의 시련’을 더 귀하게 여기자는 것이다.

야곱의 삶이 그랬다는 것이다. 



◑되돌아보니 ‘불 같은 시험’이 축복이었다.


▲야곱의 환란이 더 좋은 이유

50살을 살고 나서, 제 삶을 뒤돌아보니,

(이삭 같은) 평탄했던 시절도 하나님의 은혜이었지만,

(야곱 같은) 불 같은 시험을 당하면서 믿음이 연단을 받던 그 시절이..

더욱 더 큰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푸른 풀밭, 잔잔한 물가로 인도받던 시절도..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던 시절은.. 하나님의 더 크신 은혜였다.

제 삶을 되돌아보니 그렇다. 아마 여러분도 저와 똑같은 고백을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서 속히 ‘잔잔한 물가’에서 벗어나시기 바란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야.. 비로소 내 믿음이 정금처럼 단련된다.

(물론 우리는 제 발로 못 찾아가지만, 주님이 강권적으로 그 길을 찾게 하신다.)


지금까지 제 삶 가운데, 가장 감사한 것을 꼽으라면

주님이 저로 하여금 ‘불을 통과하게’ 하신 것이다.

그것만이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으로 내가 얻게될 줄 믿는다.  벧전1:4


그런데 자기가 지금까지 아무 고통과 문제 없이 편안하게 지내온 것은

아마 지금은 ‘이삭같이 내가 평탄하다’고 자고할지 모르나,

나중에 최후에 ‘불 시험’을 통과할 때.. 아마 지푸라기, 나무처럼 다 타버리고,

아무 것도 남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3:12~14


그러므로 ‘현재의 불시험’이 은혜요, ‘야곱의 환란’이 더 좋은 것이다.

그래서 ‘불로 단련된 금 같은 믿음을 사모하시기’ 바란다.       ←설교 제목



◑환란을 통과한 사람은.. 종말과 재림을 기다린다.


▲불같은 시험을 통과한 요한은, 종말의 계시(요한계시록)를 받았다.

사도요한이.. 평탄한 시간에.. 계시록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밧모 섬에 유배당하면서,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는 중에,

하늘이 열리면서, 요한계시록을 받을 수 있었다.


여러분, 사람이 편하고 평탄할수록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종말 신앙을 갖지 않는다.


(일제시대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고대한 것처럼)

극심한 환란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종말과 재림을 사모하게 되어있다.


사도요한이, 밧모 섬 유배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계시록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너무 현세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종말과 재림, 내세.. 이런 것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오늘의 삶이 ‘이삭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치병에 걸리고, 극심한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

혹은 회교권에서 신앙의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게 되어 있다. 그것도 매일!


환란이 참 기독교 신앙, 정금 같은 믿음으로 단련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내세/종말 지향적인 성도, 본질적인 성도가 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전후서 등에서 종말에 관한 말씀을 전한 것도

(데살로니가서는 요한계시록의 압축판에 해당될 만큼, 재림에 대한 설명이 많다.)

어떻게 보면, 사도바울의 일생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아마 그의 일생이 순탄하고, 궁궐에서 호의호식 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사도바울이 종말과 내세에 대해서..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재림)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후1:4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재림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서, 재림을 사모하지 않는 이유는 ‘야곱의 환란, 불로 연단된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이 너무 편하고/나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우리 주위에

혹시 ‘불로 연단된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으면,

우리가 그들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대신/우리를 대표해서 그런 연단을 받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영접함으로써, 그 상급을 그들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 더 읽으실 분 ................................................


‘라오디게아’는.. 라오스(민중, 백성) + 디카이오스 (의義, just, righteous)의

합성어로 보인다. (나중에 ‘디카이아’는 여자 이름으로도 불렸다.)


합성해서 ‘의로운 백성’ .. 이런 뜻이 되겠고,

더 확장하면 ‘백성이 의가 되는 시대’이다. (왕이나 국가가 아니라)

이것은 공교롭게도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대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확대해석하면 그렇다.


※계시록에 나타나는 7교회를 연대기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1. 에베소(초대교회 사도시대)

2. 서머나(핍박시대)                           *콘스탄틴 황제 기독교 공인 까지

3. 버가모(기독교 공인 이후 ~ 로마제국 끝)

4. 두아디라(중세 암흑시대)

5. 사데(종교개혁시대)  

6. 빌라델비아(종교개혁이후 시대)

7. 라오디게아(말세 교회)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토하여 내친다’는 말은..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하게 사데 교회에 대해서도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1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죽었다’ 는 말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한 번 주신 구원을.. 쉽게 거두어 가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계속되는 불순종, 계속되는 범죄와 회개치 않음은

결국은 가룟 유다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예정한 것은 아니고, 그것을 바라시지도 않지만..,

인간의 계속되는 불순종에.. 불구하고 주께서 강권적으로 회개시킬 자도 있겠고,

인간의 계속되는 불순종에.. 지키셔서 그냥 ‘내버려 두실’ 자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양면을 다 볼 필요가 있다.                                                                         관리#7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