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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떠남

LNCK 2009. 11. 15. 15:21

◈믿음과 떠남             히11:8~10            인터넷설교스크랩, 정리

 

 

▲도입 일화: 최근 실명한 한 자매와 나눈 대화가 제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무도 안타깝고 안쓰러웠던 저는,

무어라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다가 겨우 겨우 운을 뗐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많이 답답하시지요?" 그러면서 제가 농담조로 그랬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천사 같은 분의 눈을 감기시다니!"

 

한 순간 엉겁결에 나온 말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면서

혹시라도 제 말에 상처라도 받지 않으셨을까 걱정하면서 자매님의 얼굴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웬걸!

자매님은 지극히 평화로운 얼굴로 해맑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정 반대예요. 요즘 하루 하루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요즘 제 육체의 눈은 감겼지만, 영혼의 눈이 떠졌다는 것 아세요?

물론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하루 온종일 선교방송 라디오를 들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답니다.

요즘 저는 오히려 육체의 눈을 감겨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진정 영혼의 눈을 뜨신 분,

이미 천국을, 구원을 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신앙의 연륜이 더해가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이.. 바로 육의 눈을 조금씩 감는 노력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영의 눈을 뜨려는 노력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이.. 바로 육의 귀를 조금씩 닫는 노력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영의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입니다. (이 단락 펀 글)


◑1. 떠나기 위해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사건인데요..

 

아브라함은 떠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같은 사건을 스데반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행7:2~3

 

사도행전에는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셨어요.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가 지시하는 그 땅으로 가라.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그 땅을 향해서 가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의 인생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성경공부모임을 인도할 때, 창세기12장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도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한번만 제게 나타나서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하나님을 잘 믿을 거예요.

송OO야 하시며, 하여튼 나타나 제 이름을 한 번만 불러 주시면

제가 예수를 잘 믿겠습니다.’

 

제가 그 분에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송사장님, 이미 하나님께서 사장님에게 나타나셨고,

혹은 이미 말씀하셨는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셨는지도 모르지요.'

 

‘사장님 우리가 지금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우리가 함께 모여서, 성경말씀을 나누고 공부할 때,

이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

이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배우시면, 송사장님도 하나님 음성을 들은 거예요.’

 

히1:1절에 옛적에 여러 선지자들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 하신 하나님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여러 사람들과 여러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형상으로 나타나실 수도 있겠죠.

또한 하나님은 초자연적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다.

 

내가 기대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할 뿐입니다.

 

지금도 이 우주 속에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라디오에 다이얼을 맞춰 보세요.

당장 소리가 들려요.

그러나 우리가 다이얼을 못 맞추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소리는 들리는데, 내가 못 듣고 있다는 것이지요.

 

행28장에, 바울이 그 당시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 들어갑니다.

전도를 해요. 어떤 사람만 믿어요.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답답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26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바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같은 메시지가 히3:15절에서 볼 수가 있는데요.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라

 

다시 말하면 성경은, 우리 마음이 준비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준비 안 되면.. 또한 못 듣는 것이지요.

 

 

 

 

◑2.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계획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여러분, 내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바로 내 인생의 꿈이 됩니다. 비전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바로 나의 계획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뭔가가 들려와요.

내 마음 속에 어떤 감동이 다가 옵니다. 그리고 어떤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내가 너를 축복의 근원처럼 써 주겠다.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해요.

 

믿음이 중요한가 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창12:1~3

그렇다고 갑자기 인생에 고속도로가 환하게 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오래 지체하기도 했고,

기근이 들자 애굽에 내려가기도 했고,

자식이 없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이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주의 ‘음성’을 들으면,

그 다음부터 요구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주의 음성을 들었어도, 환경을 보면 마구 우리는 흔들립니다.

의심하게 됩니다. 중도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음성을 들었어도,

믿음이 있어야 실제 삶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들은 음성을 붙잡고, 모든 중간에 닥치는 난관을 돌파해서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은.. 믿음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굳건하게 살아가고,

또 한 사람은 무기력하고 좌절된 모습으로 살아감을 봅니다.

‘믿음의 차이’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잖아요!  합2:4, 롬1:17

우리의 실제 삶은, 반드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의 약속을 굳세게 붙잡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내가 살 수 있습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여기서 가장 강조된 단어가 뭐냐 하면 믿음으로 by faith 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습니다.

그 험난한 길을 계속 가게 만드는 힘은.. 믿음이었습니다.

 

히4장:2절, 들은 바 말씀이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들은 자가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함이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도 기쁘고 즐겁고 활기차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고,

슬프고 인상 쓰고 죽지 못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필요이상의 꿈과 비전, 음성을 구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꿈과 비전을 보여주시고, 말씀해 주셨으면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그것을 믿고, 밀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나 매일, 매시간 말씀하실 수는 없잖아요?

 

더 이상의 꿈과 비전을 구하지 마세요.

필요 이상의 음성을 구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한 번 분명히 내게 말씀하셨으면

이제는 그 약속을 굳게 믿는 ‘믿음’이 내게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바다의 모래와 같으리라’

이런 약속의 말씀을 일생에 서너 번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10년에 1번 정도 주신 것이지요.

나머지 9년 364일 동안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히11:8~10

그 약속을 믿는 믿음!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 주님께 말씀의 지시를 받았다면,

순종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힘도.. 주님이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감당할 믿음을/ 감당할 힘을 주신다'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받은 말씀이 아니라면,

얼마 안 가서 중도에 포기하고 말죠.

주님이 감당할 힘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의 인도’, ‘꿈과 환상의 계시’ 이런 것들을 구합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구해야죠.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거나, 내 삶을 살펴보더라도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꿈과 환상의 비전도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내 믿음이 모자라서.. 늘 주저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발걸음’을 뜻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질러 외줄 타는 사람의 등 뒤에 올라타는 ‘믿음’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부딪혀 주저앉고 마는 것은,

꿈과 환상, 계시, 말씀.. 이런 것도 부족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믿음이 부족해서.. 마라톤 경주에서 중도탈락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경주를, 완전히 주파했습니다.

 

오늘 나 자신을 한 번 조용히 점검해 봅시다.

내게 부족한 것이.. 꿈과 환상, 말씀의 인도인가요?

아니면.. 내가 받은 꿈과 환상, 말씀의 비전은 분명한데.. 믿음이 약해서 절뚝거리는가요?

 

 

...................................... 더 읽으실 분......................................

 

 

◑서론 : 신앙은 떠남입니다.

 

새로운 천년이 밝아 왔습니다.

저는, 이 밝아온 새 천년, 새해의 길을 출발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미래지향적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농경문화, 과거지향적문화

미래지향적 사고방식의 반대는 과거지향적인 사고이겠지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어떤 과거로 자꾸만 회귀하고 싶은 그런 과거지향적인 사고방식

의 틀이 매우 견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아마도 서양적 사람들의 문화적 배경이 유목민이어서

계속 양떼를 몰고 옮겨 다니는 그런 전통을 갖고 있지만

한국은 농경문화의 전통에서부터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한 곳에 집을 짓고, 대대로 식구들이 살아가면서 울타리를 쌓고 자기 것을 지키고,

또 낯선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그러한 전통을 가꾸어 왔기 때문에

개방적이기보다는 폐쇄적이고

미래적이기보다는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그런 본능이 훨씬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의 과거의 욕 가운데 ‘객사할 놈’이란 욕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집을 떠나 바깥에서 죽는 것을

최대의 비극으로 생각했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뿌리 깊은 과거지향적 문화, 고향에 대한 향수

지금은 우리가 산업화의 시대, 지식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과거의 이런 농경문화적 사고의 유산은, 아직도 우리의 생각의 밑바탕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향수, 고향에 대한 향수가.. 그렇습니다.

 

한국인처럼 그렇게 고향이 끈끈한 그런 민족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4월 달쯤 선거 때가 되면,

다시 한국인들에게는 혈연과 지연이 맹렬한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사실 미래지향적이 아니죠.

우리가 이런 것을 뛰어넘어야 세계의 시민으로서 앞을 향해서 발전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자꾸 과거회귀적인 그런 본능을 깊이 지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래에 나타난 한국인의 고향회귀 정서

여러분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 카다로그를 한번 뒤져 보면

아마 대종을 이루는 제일 많은 노래의 내용들이 ‘고향에 대한 노래’일 것입니다.

‘고향무정, 고향이 남쪽이랬지. 고향이 좋아, 구름나그네, 귀국선, 귀로,

꿈에 본 내 고향, 나그네의 설움, 남행열차, 눈물에 젖은 두만강,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별의 부산 정거장,

떠나가는 배, 머나먼 고향, 비 내리는 호남선, 산 넘어 남촌에는,

새벽기차, 이별의 인천항, 한 많은 대동강, 흙에 살리라.

 

‘흙에 살리라’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초가 삼간 집을 지은 내 고향 정든 땅

아기 염소 벗을 삼아 논밭 길을 가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내 사랑 순이와 손을 잡고서 흙에 살리라

 

지나간 연말에 보니까 지나간 30~40년 동안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 했던

이런 대중가요 말고, 가곡 가운데도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것이

‘가고파’입니다. 역시 고향을 그리는 노래입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이런 고향에 대한 회귀적 본능이, 우리 마음속에 가장 깊이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대중가요나 가곡을 통해 잘 볼 수가 있습니다.

 

고향을 좋아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사고가 고향에 얽매여 있다면.. 이것은 매우 폐쇄적입니다.

개방적인 세계, 세계화의 시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애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세계 시민의 사고방식에 저해물일뿐만 아니라

신앙에도 장애요인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기독교적 삶의 양식, 사고방식에는

항상 미래적인, 미래지향적인 그런 깃발이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자꾸만 가족에 연연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제 내 제자로 따라 나섰으면, 그 미래를 향해서 가자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나라로 삼은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이제 수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거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안 돼요. 떠나는 것은 포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포기는 단순한 희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을 위한 떠남’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로 커다란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천하 만민이 너를 복되다고 일컫게 될 것이다.

즉, 너의 떠남은 축복을 위한 떠남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떠날 때는 아픔이 있습니다. 떠날 때는 포기가 있습니다.

떠남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떠남은 축복에 대한 떠남인 것입니다.                       ▣ 믿음론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