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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사함 받은 증거 2202

LNCK 2009. 11. 26. 12:45

◈죄사함 받은 증거                            눅7:36~50                   인터넷설교 스크랩, 편집



▲본문 설명

본문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죄 사함’에 대해,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말씀해 주신 내용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기는커녕,

손님 스스로 발을 씻을 물조차 꺼내놓지 않았어요.  눅7:44


이때 (죄인으로 소문난) 한 여자가

시몬이 예수님을 제대로 대접 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과도 같은 예수님이 박대를 당하는 현장에서.. 마음이 아파서 견디지 못합니다.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사람들이 다 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도 이 여자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고, 발에 입 맞추는 등

'못 말릴 일'을 합니다.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예수님이 박대를 당하는 것을 보고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때, 예수님은 이 여인의 못 말리는 행동을 '죄 사함'과 연결시켜 설명하셨어요.

그리고 질문을 하시는데,

500데나리온 탕감 받은 종과 50데나리온 탕감 받은 종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인을 더 사랑하겠느냐고...

집주인 시몬은 당연히 500데나리온 탕감 받은 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내가 죄사함 받은 증거는?

①우리는 간단한 전도지에 나와 있는 대로,

내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님 용서해 주세요!’라고 간단히 기도하면,

내 일생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지는 줄 알고, 또 그렇게 믿으라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걸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실하게 확인해야한다는 것이죠.


②또 어떤 사람은, 약간 신학적으로 ‘죄사함’을 이해합니다.

요한복음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하는 대목을 가지고,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짊어지고 다 해결했다는 말을 해요.


그러니까, 내 마음에 확실히 믿어지거나/ 안 믿어지거나에 관계없이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지고 가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용서를 이미 다 받은 것이라고.. 그것을 확신하라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걸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실하게 확인해야한다는 것이죠.↙


▲죄사함에는 '사랑함의 증거'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47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8


전도지를 통해서 약식으로 심플하게 죄사함을 받든지,

신학적으로 죄사함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든지

진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증거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본문의 여인이 보여준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는 5백데나리온이지만, 다른 비유에 보면 1만 달란트가 나옵니다.

그런 엄청난 죗값을 다 탕감 받았는데, 그것도 공짜로,

어떻게 주인/임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주인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탕감 받은 것이 적거나, 아예 탕감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일상생활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고,

무슨 신성한 종교적인 행사로만/ 또는 기복적 목적으로만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아무리 세례를 받고, 직분을 가졌어도.. 자기 신앙을 심각하게 점검하셔야 합니다.


죄 사함은.. 내가 죄 사함 받았다는 ‘지적 동의’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에는 반드시 현실의 열매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지체 높으신 분이 꼭 교회에 나와서 청소하시는 분이 계세요.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매주 한 번 한나절을 택해서, 10년이 넘도록 그렇게 하신답니다.


또 어떤 분은 만두를 파는데,

220개를 만들어 200개만 팔고, 20개는 어디 시설에 갖다 줘요.

어떤 날은 만두가 일찍 동이 나서, 만두가 모자라요.

그래도 200개 이상은 절대 안 팔아요.

만두를 급하게 새로 만들 시간도 없어요. 20개 갖다 줘야 하니까..


다니엘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사랑 표현은 맨 아래 단락에서 살펴보기로 하고요.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전부 내 ‘문제 해결’에 국한되어있어요. (이게 기독교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죠)


교회를 다니는 목적, 신앙 생활하는 목적이

경제 문제 해결,

자녀 문제 해결,

현실에 복잡하게 꼬인 문제 해결,

건강 문제 해결,

그래서 한참 열심 내다가.. 어느 정도 문제 해결 되면.. 열심이 식었다가.. 합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죽어서 천국은 물론이요, 오늘 현실에서도 ‘천국의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또한 회개는 간단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대개의 경우 가슴을 치고, 눈물과 콧물을 흘리는 통회자복이 동반됩니다.

그걸 거쳐야 ‘죄사함’을 받는 것이죠. 그 후엔 ‘사랑’의 증거가 나타나고요.

아직 통회자복의 체험이 없는 분들은.. 겸손히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간구합시다.


▲죄사함 받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사랑의 교제관계에 들어갑니다.

죄가 뭐가 죄입니까? 하나님과 등진 것이 죄에요.

‘내 죗값을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이 죄 사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등진 내가, 하나님과 다시 화목케 되는 것’이 죄 사함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여전히 내 마음에는 예수님이 좋아지는 마음이 하나도 없고

전부 자식, 명예, 돈, 세상 가치가 좋은 것으로 가득 찼다면,

죄 사함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여인을 보세요.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정식 손님대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전통적으로 귀한 손님이 오면, 머리에 머리 냄새 감추는 향유를 발라주곤 했는데

그것도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의분이 나서, 자기가 나서서, 그런 '못 말릴 행동'을 한 것이지요.


여인에게 <사랑함이 많았기 때문>이고, 

그렇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많았던 이유는 <많이 사함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교에서는 공자를 인격적으로 만나라고 하지 않아요.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를 인격적으로 만나라고 하지 않아요.

공자와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 살아라고 할 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굳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교제하라/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막연하게 믿을 때가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교회 왔다 갔다 하고

추상적으로 예수님 믿는 것 같아가지고는 안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합시다. 참된 믿음을 달라고!



▲다니엘의 하나님 사랑

다니엘이 무엇 때문에, 억지로/무리하게/목숨 걸고

하루 3번씩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을까요?  단6장

무리하게 그러다가 사자 굴에 들어갔다니까요.

 

얼마든지 안 그럴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잠시 일정 기간동안 중단하거나,

아니면 문을 모두 닫아 놓고, 아무도 안 보이게 집 안에서 몰래 기도하거나

그랬으면 평탄했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다니엘이 하루 3번 기도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기에, 저렇게 목숨을 걸고 기도를 강행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칼럼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The destiny of the Jews, exiled in Babylon, was decided by Daniel's prayer.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는 유대인들의 운명은.. 다니엘의 기도에 달려 있었다고요.


그래서 다니엘은, 자기의 목숨까지 걸어가면서까지, 하루 3번 기도한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에, 자기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성경에 복선으로 깔려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니엘이, 자기 먹고사는 문제만 가지고,

그렇게 위험한 기도를 드릴 필요는 없었겠죠.

그를 모함하는 신하들과 ‘단순한 기 싸움’으로 보기에도,

너무나 큰 목숨이 걸린 문제라서, 기 싸움도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너무 사랑하니까

자기의 목숨을 아낌없이 걸었던 것입니다.

자기 기도에, 자기 민족의 운명이 걸려 있으니까.. 기도에 한 발도 뒤로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 사람의 기도사역에..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었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나중에, 포로생활 70년이 차면,

자기 민족이 바벨론에서 유대로 귀환할 것을 깨닫습니다. 단9:2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때로는 ‘못 말릴’ 사람이 됩니다.                          ▣ 죄, 복된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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