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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에 재림을 생각한다 2210

LNCK 2009. 12. 1. 23:13

◈대림절에 재림을 생각한다                  마24:28               칼럼 스크랩, 모음

 


(여러 자료를 성경공부 식으로 그냥 모아보았습니다.)



◑무엇/누구를 기다리는 ‘대림절’인가?                 *대강절待降節이라고도 한다.


대림 시기는 ‘성탄절’ 전의 4주간을 말한다.

‘대림’이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기다릴 대待, 임할 림臨)

영어로는 Advent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어드벤투스’(Adventus)에서 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대림절에 무엇을 기다리는가?

‘주님의 임하심/재림’을 기다리기보다는,

사실은 ‘성탄절이라는 절기’를 기다리는 경향이 강하다.

왜냐하면 주님이 금년 12월에 오실 것 같지 않다는 .. 어떤 기대감 때문이다.


누가 지어낸,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있다.↓


▲‘주님! 왜 오셨어요?’

교회 문이 열리고, 예배를 마친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말쑥한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 아주 허름한 차림의 볼 품 없는 한 남자가 있었다.

어느 누구 한 명, 이 남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예배를 마치고, 신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성직자는

어느덧 어느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던 허름한 차림의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성직자는 그 남자를 자세히 쳐다보더니, 순간 얼굴빛이 하얗게 변한다.

그는 남자에게 다가가 소매를 잡아끌다시피 하여, 사무실로 데리고 간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성직자는 그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애걸하다시피 말한다.

“주님, 지금 여기에 나타나시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우리 식대로 잘 꾸려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평지풍파를 일으키시려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제발 하늘로 돌아가 주십시오. 지금은 우리가 알아서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당분간 오시지 마십시오!”


허름한 차림의 볼 품 없는 한 남자,

세상을 돌아보시고, 흩어진 이들을 모아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세우시려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마디 말을 남기시고 홀연히 사라지신다.

 

“알았네!”


물론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다.

그러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주님, 어서 오십시오!' 라고 들떠서 외치고 있지만


정작 내 마음으로는 주님께서 진짜 오시는 것을,

지금 당장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나의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림이 아니라, 성령으로라도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정말 제대로 오시기만 하면, 주님께서 분명 우리 전 존재를 뒤흔들어 놓으실 것이다.

내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으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현실과 복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고 있다.

이기심과 집착으로 물든 현세적 삶에 안주하려는 우리들을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이끄시고자.. 주님이 오시면.. 복음이라는 채찍으로 내리치실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제대로 임하시면.. 우리는 맞아서 아프게 된다.

이 아픔에서 벗어나는 길은.. 삶을 주님의 뜻에 따라 완전히 바꾸는 것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복음과/ 하나님 나라와/ 주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현실에 타협하는 길을 걸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까 막상 진짜로 주님이 오시면.. 우리가 난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기 보다는, 성탄절이란 절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오실지 모른다.

“알았네!”



◑대림절(주님의 도착을 기다리는 절기)에 ‘재림’을 생각해 봅시다.


▲1.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마24:28


재림의 징조들이 나타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한다.


군대에서 복무하는 사병들은..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교도소에서 복역하는 분들은.. 출소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결혼을 앞둔 신부는.. 결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해외근무를 하는 아빠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렇듯 우리는, ‘머리를 들고’ 저편 하늘을 쳐다보면서

주님이 오시는 날을 손꼽아(기간을 어림잡아 가며 실감나게)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가늠해보며,

그래서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그 날이 얼마나 더 가까워졌는지’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신가?


우리가 평소에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특별히 대림절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주님의 임함/도착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구름타고 오실 하늘을 쳐다보며.. 정말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마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요?

여러분, 말세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다.

아무도 홍수를 기다리지 않았지만, 노아만 하늘을 쳐다보며 다가올 홍수를 기다렸고,

그 홍수는 정말 일어났다.


※어떤 분은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는 말씀을  마24:37

노아의 홍수처럼, 말세 때 ‘거대한 쓰나미’가 있을 것으로 예측하기도 한다.

<영화 2012>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영상을 보니

거대한 쓰나미에 의해 대도시가 파괴되는 장면이.. 정말 섬찟한 장면이었다.


▲2. 만물이 회복되는 때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3:21

  

주님이 언제 재림하시는가?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그 회복을 마치실 때까지’기다리셨다가, 마침내 재림하신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냥 개인적 관찰이다.)

최근 들어 ‘회복’이란 말을 이상하리만큼 많이 쓰고 있다.

  

그 이전에는 ‘개혁’ 이란 말을 많이 썼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개혁 보다는) ‘회복 restoration’이란 말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이다. 


저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다’라고 본다.

(위 행3:21절에 근거, 재림의 시기가 찼다는 일종의 징조가 아닐까? .. 라고 생각해 본다.)


요즘 신학은 ‘창조 질서의 회복’ .. 이런 신학용어가 유행이다.

목회도 ‘회복의 목회’,

찬양팀도 그 이름이 ‘회복’

무슨 집회 주제어에도 ‘회복’이란 말이 종종 등장한다.

(물론 제가 ‘회복’이란 단어에 민감하니까, 그런 말만 보인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도 2천 년간 방랑하던 유대민족이 팔레스틴에서 ‘회복’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그 ‘땅’도 날이 갈수록 점점 ‘회복’되고 있다.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팔 문제에 일방적으로 한 쪽 편을 드는 것은 아님)


물론 자연과 생태계가 너무 파괴되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자연과 생태계 종사자들도 한 목소리로 ‘회복’을 부르짖고 있다.


성령운동도 ‘이른 비와 늦은 비’가 회복/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註1)


교계에서 가장 잘 쓰는 말은 ‘초대교회를 회복하자’이다.

그래서 요즘은 개신교계에서도 ‘사도 apostle’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사도적 교회, 사도 직분 등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로 회복/돌아가겠다’는 몸부림으로 이해된다.


위 행3:21절은,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는 모든 만물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안 쓰던 ‘회복’이란 말이 요즘 부쩍 유행하는 것을 보면,

‘지금이 바로 회복의 시기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든다.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 단락 녹취)

                                          

▲3. 완성의 시기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눅21:25~26


이런 말을 들으면, 죄 많은 우리들은 오금이 저리고, 무서운 생각부터 들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참 신앙인이라면

세상 끝(世末)이라는 말만 들으면 무조건 자지러지기부터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세말의 진정한 의미는 '비극적인 파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 끝의 대 재난은 완성을 위한 진통이요, 정화의 과정일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구속(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 눅21:28 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종말을 겁내라는 뜻이 아니라, 기대하고 기다리라는 뜻이다.



◑재림 때 나타나는 2가지 다른 양상               (이 단락 녹취)


▲1. 도적같이/ 도적 안 같이


살전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살전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종말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에게는 ‘도적같이’ = 당황스럽게 임한다.

그러나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에게는 ‘도적같이’ = 당황스럽게 임하지 않는다.


만약 나에게 종말이 ‘도적같이’ 임하면 .. 구원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반대로 나에게 ‘도적같이 임하지 않으면’ .. 나는 구원 받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종말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 사람’은 .. 그 날을 늘 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이다.


"매일의 삶에 철저할 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이라는 말이 있다.


▲2. 순교자/핍박 받은 성도의 기도가 달라진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식으로 기도했다. 행7:60


그런데 천국의 보좌 앞에서, 순교자들이 드리는 기도는.. 순교자 스데반과 정반대다.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계6:10

 

세상에서 순교할 때는 ‘용서의 기도’를,

순교 후에 천국에 가서는 ‘공의를 구하는 기도’로 바뀐다.

왜 바뀔까? (여기에는 각자의 묵상이 필요하다)


아마,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면서 때를 재촉하고 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는 ‘사랑의 주/용서의 주’이셨지만,

재림하실 때는 ‘심판의 주’로 바뀌신다.

재림은 ‘심판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교자들도, 천국에 가서는, 지상에서와 정반대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3. 다른 바울서신서에는 종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데,

왜 데살로니가서전후서에만, 사도바울은 종말을 언급하는가?


데살로니가서의 종말론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구름 속에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케 하시리니 살전4:17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살후1:7등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형제 사랑’이 많으니까..

종말에 관해 많이 가르쳐 준 것이라고 본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살전4:9


그리고 뒤이어서 살전4:13절부터 본격적으로 ‘종말론’을.. 사도바울은 가르친다.

‘형제 사랑’이란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벧후1:7참조

비로소 ‘종말론’ (단단한 음식)을 강론한 것이다.


※데살로니가서의 종말론은, 복음서 종말론과 달리 별로 무섭지 않다.

복음서는 표현이 아주 무섭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는 등..


그 차이가 무엇일까?

복음서 종말론은.. 불신자적 관점에서 서술할 때.. 대체로 두렵고 무섭다.

데살로니가서의 종말론은.. 교인들 관점에서 서술하니까.. 대체로 ‘복된 소망’이 된다.



註1) 오순절 운동은, 20세기에 들어서, 초대교회 이후 사라졌던

성령운동이 다시 ‘회복’되었다고 말한다.

‘이른 비(초대교회)와 늦은 비’(20세기 성령)가 회복/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고 나면, 이스라엘에서는 추수를 한다고 한다.

여기서 ‘추수’는 종말을 의미한다.


야고보서도 이른 비와 늦은 비 후에 종말의 추수를 예언한다.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5:7~8


 

▲손양원 목사님이 지은 복음성가 중에 '주님 고대가'라는 복음 성가가 있습니다.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5. 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6.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고난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손양원 목사님은 항상 진리이신 주님을 갈망하셨기 때문에


그의 인생의 가장 긴박한 상황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따름으로


한국 교회를 살렸고, 이 민족을 살렸습니다.                                                               ▣ 종말, 내세,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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