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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광야 길'로 인도하신 이유 2231

LNCK 2009. 12. 16. 02:40

◈'홍해 광야 길'로 인도하신 이유                    출13:17~22                   09.07.26.설교스크랩

                                                                                                              *원제목 : 불기둥 구름기둥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출13:18



◑본문 설명


▲출애굽할 때.. 쉽고 편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 인도를 따라서 출애굽 하여

민족 이동을 하는 약 3500년 전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하여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노정에는

우리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소위 ‘블레셋 (해안) 길’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출13: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 중에는

가장 좋은 길이 있습니다.

지중해 해변 가를 따라 상업도로가 잘 마련되어 있어서

항상 그 길로 사람들이 오고 갑니다.


그 길로 가면 한 달도 안가서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일주일 만에 왔다 갔다 하는 그 길입니다.

도로도 아주 좋습니다. 경치도 좋습니다.


▲광야에서 뺑뺑 돌게 하셨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게 생각하고 출애굽을 감행했을 것입니다.

늦어도 1~2달이면, 모두 다 가나안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막에서 40년 동안 살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만약 애굽에서 그 해안 길route을 따라 가나안까지 가면.. 홍해를 건널 필요도 없었습니다.


요단강을 구태여 건너가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쉽게 갈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40년 동안 모래벌판에서 고생할 줄 알았다면, 절대로 애굽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좋은 길로, 한 달 만에 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정 반대 방향의 시나이 반도 사막의 모래벌판을 가게 하셨는가요?

불필요한 수많은 길을 헤매게 하시고, 불필요한 적을 수없이 만나서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서울에서 부산을 갈 때, 고속도로로 쫙 내려가면 쉽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춘천으로 올라가서(북으로).. 파주로 가서(서쪽으로)..

불필요한 인천을 가서(남서쪽).. 수원에 왔다가(동쪽).. 저 목포로 내려갑니다.(남쪽)

그랬다가 다시 대전으로 올라와서.. 광주로 갔다가..

여수, 대구, 마산을 거쳐서 부산에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어려운 길을 택해서 행진한 겁니다.

왜 그렇게 갔는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가라고/인도하신 겁니다. 이상하잖아요?

그러는 도중에 홍해를 만나기도 하고, 요단강을 건너고,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고, 온갖 고생 다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세일 산길로 가데스바네아까지 가는 데는 11일이 걸립니다. 신1:2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까지 질러가는 길이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그러니까 빨리 가면, 11일 + 80킬로(사흘)이면, 가나안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남단까지 약 80키로

                                                                                                     12정탐꾼을 보낸 곳

“(가데스 바네아에) 다 왔다! 여기만 지나가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로 가지 말라.” “아니, 조그만 가면 됩니다.”

그래서 고집부리며 올라갔다가 큰 실패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잖아요?   민14:40~45


“내가 그리로 가지 말라고 했잖느냐?”

“하나님, 그러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민14:25                         *소위 ‘홍해 광야 길’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출13:18



◑선민은 ‘고난’을 통해 단련 받습니다.


▲하나님이 공연히 일을 ‘어렵게’ 만드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 신앙의 갈등이

‘도대체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이 나만도 생각을 못하시나?’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은 지나치게 인색하십니다. 인색한 것은 고사하고

공연히 못살게 구는 취미를 가지신 것 같이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성격 나쁜 아버지가 집안 식구들 달달 볶듯이

한 달만 고생하면 되는 길을 40년이나 시나이 반도를 다 헤매게 하시고

끝없는 피를 흘리게 하시고... 이거, 도대체 왜 이렇게 하시는 거야?

이런 고생 안시키기고도 얼마든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인도하지 않으시고

백성들에게 맡겨버렸다면 ‘한 달 만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길로 못 가게 하셨습니다.


▲제 목회 여정도 출애굽 여정과 같이 ‘어려웠습니다.’

저(설교자)는 첫 번 목회지가 시각장애인 교회였습니다.

인생 중간에 실명되신 분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는데,

그때 그분들과 좋은 추억이 많아서, 44년 전 일인데도 지금도 관계를 끊지 않고,

내일과 모레도 삼척에서 시각장애인협회 여름수련회 주강사로 가게 됩니다.


▲시각장애우들도 상반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아닌 분들이 생각할 때는

‘저 시각장애인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살맛이 날까?’ 이렇게 생각되시죠?

아닙니다. 얼마나 명랑하고 삶이 기쁘고 농담도 얼마나 잘하시는지 모릅니다.

전 그분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연단을 통과해서, 정금 같은 믿음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의적인 시각장애우도 물론 있습니다.

날마다 저한테 와서 ‘목사님, 하나님이 왜 나를 눈멀게 하신 겁니까?’

‘나는 다 좋습니다. 건강도 괜찮고 아이큐도 괜찮은데

앞 못 보는 거 이거 하나만 해결해 주시면 좋을 텐데..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고생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믿음의 사람 모세도.. 괴로워서 죽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모세의 기도에도 나옵니다.

모세가 어느 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를 즉시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나로 보지 않게 하소서.

‘왜 나를 이렇게 곤고하게 만드시나이까? 죽여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악)취미로, 그 민족을 그렇게 고난스럽게 하셨는가요?

이것을 우리가 알 때.. 우리 삶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니까요.


지금 이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선민’ 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똑같이 택함 받은 ‘선민’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초대를 받은 선민들은

한결 같이 고난을 통해서 무엇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류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그냥 지나가게 하옵소서.”

기도했잖아요?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다 그렇고 택한 백성이 그렇습니다.


▲광야 40년을 통과하고.. 강철 같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500년이나 한결 같이 지켜오는 민족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장막절입니다.

출애굽 때 광야에서 받았던 고통을 잊어버리지 말자고 해서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가도 가도 모래 먼지만 날리는 열풍과 사막 생활을

한 살 때 나온 사람이 40살이 되었습니다.

시나이 반도의 모래 먼지 속에서 잔뼈가 굵었고

햇볕만 겨우 가리는 천막에서 40세가 되도록 밥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택한 그 후손들이

이 지상에서 가장 억세고 강인한 종족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설교문의 주제


그들은 어떤 고난의 현장에서도 살아남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민족들은 디아스포라 되었는데

지금 세계 어디를 가든지 유태인이 들어가 사는 나라는

유태인들이 앞서가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강한 훈련을 시키는 유대인의 민족성

저는 유태인들을 많이 만나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유태인이 세계를 지배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그들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 편안치 않다고 생각해서

6백만을 죽여 버린 겁니다.)


그래도 안 죽어요. 다시 살아남아서 튼튼한 민족을 형성합니다.

지금 서구 사회에 가보면 뭐든지 우세한 것은 유태인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620만의 유태인이 살면서 미국에서 좋은 것들은

그 사람들 손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남자들에게 군인의 의무를 줍니다.

이스라엘은 여자도 군인을 나가야 합니다.

군인의 숫자가 모자라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의무입니다.


여러분, 1967년 6일전쟁 때 임신 8개월 된 여자가 낙하산을 타고서

기관총을 가지고 낙하하는 모습이 전 세계 신문에 보도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들을 누가 당합니까?


로스앤젤레스에 포레스토 론이라는 숲속이 있는데 유태인들이 사용하는 사격장입니다.

12살만 되면 유태인들은 누구나 거기에 끌려가야 합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씨에도 12살짜리에게 작은 소총을 주고 사격 연습을 혹독하게 시킵니다.


“우리 유태인은 이렇게 안하면 살아남지 못해. 알았지?”

그래서 회비를 걷어서, 청소년들을 이스라엘 나라로 견학보내고

고국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는 누구든지 자원해서 갈 수 있는 훈련을 해서

만반의 임전 태세를 완벽하게 갖춥니다.


▲유대인이 ‘강인한 민족’으로 키워나가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봅니다.

전쟁이 나면 학교 다니다, 말고 직장 다니다 말고, 이스라엘로 갑니다. 못 당합니다.

‘이렇게 강인한 민족성을 만들어야

이 민족이 디아스포라 되어서 세계 어디에 가서도 살아남아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전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훈련시키신 겁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땅이 귀하다는 훈련을 받았죠? 차지한 땅은 절대로 안 빼앗깁니다.

먹는 식량이 귀하다는 교육을 받았죠?

식량 생산은 키부츠 농장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농업 기술로 발전했습니다.

배가 고픈 훈련을 해서 인내를 배웠죠?

참고 견디는 것으로 유태인들을 당할 길이 없습니다.


유태인들은 얼마나 잘 뭉칩니까? 절대 깨지지 않는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가나안 31 성읍과 전쟁을 하면서 익혀온 그들은

지금 이 세상 어느 군대도 당해낼 수 없는 강한 군대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주변의 10개 나라가 덤벼들어도 절대로 깨지지 않았잖아요?


만약 그들이 해변가의 경치 좋은 무역 도로를 통해서

일주일 만에 쉽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 민족은 벌써 멸종당했을 것입니다.


이 민족을 멸종시키고자 기다리던 가나안 땅의 종족이 있었습니다.

헷/ 아모리/ 브리스/ 히위/ 여부스/ 기르가스 족속이 있었습니다.

‘이 놈들, 오기만 해봐라! 다 없애버리겠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었잖아요?

광야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종족이 다 멸종한다 하여도, 그들은 살아남는 강인성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히틀러가 6백만을 죽일 때 ‘아예 멸종시켜 버려야지 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사야 55: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내가 너희를 이렇게 훈련해야만 너희를 통한 인류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들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된다. 그 땅은 가나안 31성읍이 있는데

너희가 그렇게 강인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결국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그 복음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가 이루어졌잖아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자녀들의 문제가 뭐냐고요?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는 유약한 문화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집집마다 자녀가 하나, 둘이니까 다 왕자같이, 공주같이 길러냅니다.

고난을 못 이깁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뭐든지 필요를 부모가 다 들어줘 버립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여러분, 군대 들어갈 때 20대 초반이 얼마나 강인한 나이입니까?

인생 중에서 가장 강인한 힘과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을 때 군대 나가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군대 자살률이 얼마나 높은지 아십니까? 왜 그래요?

유약한 문화에서 왕자같이 살아왔기 때문에, 군대 훈련을 이겨내지 못해서 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자살률 1위로 매우 높은 것도,

벌써 어릴 적/청소년 때부터 너무 편하게 자라나서 입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돈이 필요하다고만 하면.. “그래, 그래!” 다 들어줍니다.

자기가 사회 나가서 피땀 흘려 노동을 하고

시간당 돈 몇 천원을 받아 들었을 때 “와! 돈이 이렇게 귀중한 거였나?”

그때 비로소 인생을 알게 되잖아요?


미국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쯤 되면, 나가서 그렇게 (알바) 경험을 다 하게 합니다.

‘부모가 주었던 돈의 귀중함이 이런 거였구나!’



▲정리하면..

히브리 민족은 광야의 고난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자라고

민족의 강인한 유산이 물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쉽고 편한 ‘블레셋 해안 길’을 놔두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직진하는 길도 제쳐 놓고

가장 어렵고 힘든 ‘홍해 광야길’을 택하게 하셔서.. 광야에서 40년이나 뺑뺑 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안)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잖아요? 출13:17


①광야에서 물이 없어 갈증을 겪었을 때,

그들은 물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을 배웠기 때문에.. ‘물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사실 애굽에서는 나일 강 삼각주에 살았기 때문에

나일 강 유역의 풍부한 물을 끌어다 쓰면서.. 물이 귀중한지 몰랐거든요.


노예로 살다가 해방은 받았으나 자유를 누리는 값이 얼마나 크다는 사실도

그들은 체험했습니다.

절반의 사람들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 생활을 계속 하자고 소리쳤습니다.


금송아지 만들어놓고 춤추다가 3천명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무참하게 죽지요? 출32:28

이런 역사를 통해서 이들은 신앙 훈련이 되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앙훈련을 받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도 신앙교육 시키시는 겁니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그들은 아무리 정착해서 좋은 조건의 장소라도 떠나야 했습니다.

“여기 이렇게 좋은 장소가 있는데 여기서 좀 오래 살면 안 되겠습니까?”

“구름이 움직이잖아!”


또 구름기둥이 머물면 아무리 살기가 열악한 사막 한 복판일지라도

그곳에 진을 쳐야 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지 않느냐?”


▲설교보다도 ‘고난’을 통해 변화 받습니다.

지금 제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교인들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요?

길잡이 역할입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방향 제시를 합니다.


신앙이 자라는 것은 체험이라야 됩니다. 체험을 통한 신앙만이 굳셉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를 잘하셨어도 내가 꿈쩍도 안했습니다.

이번에 내가 이 사건을 만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체험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께 직접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니까요.

모세의 그 좋은 설교를, 하나님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 모세가 설교했잖아요?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다 금송아지 숭배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설교 듣는 거 신앙에 도움은 줍니다.

그러나 아주 강인한 신앙이 마련되는 것은 고난을 통한 체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들을 지금 광야에서 체험시키시는 겁니다.


▲내게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13:22

하나님의 보호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내 앞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보호인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었다는

성경 말씀을 보면서도

내 앞에 있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앞에는 이 기둥이 항상 서있으며

우리 민족 앞에 그 기둥이 서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데도

보지 못하고 믿지도 않으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돌아가자. 무엇 때문에 우리를 끌고 나와서 이 모래 벌판에서 이 고생을 시키는가?

돌아가자. 모세를 죽이고 돌아가자.” 아니면

“하나님이 꼭 가라는 대로 가야 되느냐? 왜 하나님이 이상한 데로 가게 하느냐? 지름길로 가자.”

그러다가 모두 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움직여!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달라.”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그런 영적 시각으로 볼 수 있을 때.. 사막을 통과하는 겁니다.


아무리 어둡고 비참한 역사가 우리 현실 앞에 있다 하여도

또한 우리 민족의 과제도 놓여있고, 교회 과제도 있고, 나 개인의 과제도 내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만 볼 수 있으면 가나안 땅의 성취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하나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13:22 를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셨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영원히 인도하실 거야! 이 믿음 하나로 이기는 거야!”                   ▣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