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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스스로 의로운 탕자 2235

LNCK 2009. 12. 17. 22:46

◈스스로 의로운 진짜 탕자                         눅15:25~32                                -출처-

 


한 집안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마을 어귀에서부터 큰 소리로 들렸습니다.

온통 마을이 축제 분위기입니다(25절).

그런데 한 사람은, 그 잔치에 끼어들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하고 있습니다(28절).


이 사람은 충성을 다했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성실했지만, 불평이 가득합니다.

왜 혼자 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을까요?

인생이 성공한 줄 알았는데, 왜 이리 철저한 실패자로 남게 되었을까요?



◑1. 사람보다 재물/일을 중요시함    눅15:27~29


첫째로,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인생 최고의 가치를 재물이나 업적에 두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격분한 순간을 잘 살펴보십시오.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라는 말을 들은 순간입니다. :27

그것을 잡은 이유가 당신의 동생이 돌아 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 것입니다.

동생과 송아지의 가치가 순간적으로 비교된 것입니다.


▲1. 그는 재산상의 손실을 계산하며,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동생에 대한 이미지는 재산을 탕진한 인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  :30

이것이 동생에 대한 생각의 전부였습니다.


어떻게 아끼고 얼마나 노력해서 모은 재산들인데

이것을 저런 탕자를 위해 탕진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의외로 꽤 있습니다.)


▲인도 선교사가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인도에서, 어느 아낙네가 자기 아이를 업고 헐레벌떡 병원으로 들어와서는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습니다.

의사가 아이를 진찰한 결과, 자기 병원에서 치료하기 힘들 정도로 병이 중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대도시의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던 아이의 어머니가

‘우리 집 소는 어떻게 하고 아이를 도시로 데려갑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동행했던) 선교사는

‘아니 아이가 죽느냐/사느냐 하는 판에.. 소가 뭐 그리 중하다고.. 소 걱정입니까?’

하면서 ‘소가 중합니까? 아이가 중요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 대답이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소가 중지요. 아이는 2-3년이면 또 낳을 수 있지만

소는 일평생 일해서 돈을 모아도 한 마리 사기가 어려우니까요.’


사실 우리도 이럴 수 있습니다.

많이 가졌는데도, 텅 빈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돈밖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록펠러)


▲2. 이런 사람은.. 열심히 살았는데, 쉽게 분노하고 인격이 엉망입니다.

아버지께 차마 못할 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와서 권해도, 완강히 버티고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설득에 반항합니다.  :28


재산은 반짝반짝 모았는데, 속이 썩을 대로 썩어 있습니다.

그는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데도, 모르고 밭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 중독자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위해서도 한 푼도 안 쓰고, 부지런히 일만 한 것 같습니다.

무엇을 위해 버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모으고 있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장작더미 속에 집을 열심히 짓는 거미처럼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잔치를 벌인 적도 없습니다. :29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 그는 일을 중요시 했지만, 사람을 중요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아버지의 명을 따라 여러 해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밭의 작물을 열심히 돌보면서도

자기 동생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물을 사랑했지만, 사람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이 즐거워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는 동생이 돌아온 것에 기뻐하며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일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맘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업적과 성과만 중요시 했습니다.

이러면 행복이 없습니다.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적용, 나는 어디에/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자녀를 대할 때, 그들의 마음의 행복을 그려보십니까?

아니면 성적과 대학에 관심이 모아져 있습니까?


지나친 성공지향주의 때문에 짧은 인생 살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러기 아빠들이 많습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공부하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 가족들이 다 헤어져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자녀들과 살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데,

어렸을 때 이미 헤어져서 살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회사의 사원들을 대할 때,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그들의 행복입니까, 아니면 성과입니까?

어디에 근본적인 해결점이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행복해지면 성공한 것일까요?

아니면 소위 성공이라고 평가된 지경에 오르면 행복해질까요?

어떤 것이 맞다고 생각되십니까? 저는 행복해지면 성공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세네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심과 탐욕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라고 생각한 것의 종이 되어,

그것을 섬기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형의 모습이었습니다.

눅15:1~2절에 등장하는 그들의 불평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보다도, ‘율법의 외적 준수’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웃음도 사랑도 감격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로봇처럼 무감각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잔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본문의 형처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세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눅16:14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잔치’하는 마음입니다.

아들이 ‘잃은 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자체만으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시는 눈길이 이렇습니다.

그러니 그분은 우리가 실패했어도, 낭비를 했어도,

그분에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행복하신 것입니다.


살아 있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잔치를 벌일 준비가 되어 있는 분입니다.

이 주님께로 돌아와 생명을 얻고 기쁨을 주는 사람들 되시길 바랍니다.



◑2. 자기 의를 중요시함  :29


둘째로, 사람이 기쁨이 없는 이유는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혀 철저히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기쁨이 없습니다.


▲1. 이 사람의 모든 관심이 철저히 자신에게 있습니다.

29절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첫째 아들의 강조된 단어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한 절에 무려 4번이나 ‘나’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29


이 사람이 자신을 내세우며 항변하는 그 이야기의 핵심은

자기가 얼마나 의롭게 살았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말(:29)을 잘 분석해보면.. 아버지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것 자체가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로움에 스스로 만족하기 위함입니다.


▲2. 이 ‘자기 의’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의로운 탕자인 그 형은

아버지의 마음이나 동생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에 갇혀 있으니..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유아적인 수준의 인격입니다.

자기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둔감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교만해지고 그래서 계산적이 됩니다.

동생을 위해 잡은 송아지와 자기를 위해 잡은 적 없는 염소새끼를 비교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수고에 비하면 대접이 너무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자기가 대단히 희생적이었다고 생각할 때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스스로 의인이 된 타락한 사람입니다.


▲3.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극심한 타락은.. 마음의 교만입니다.

행위가 반듯하고 거룩해도 스스로 마음이 하늘까지 높아져 있으면

이 사람은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가장 더러운 회칠한 무덤입니다.

차라리 죄인으로 드러나 겸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더 복됩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격적인 모가 나서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얼마나 이런 사람들이 위험스럽고 구제불능인지,

예수님께서 이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심한 욕을 퍼부어 댔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마23:13~36


그리고 심지어 독사의 자식들아 라며,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탄의 자식들로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몰라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 무서운 저주의 늪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빠지면 주님께도 버림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기본적인 자세를, 다음과 같이 종의 자세로 피력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눅17:7~9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눅17:10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던 동생은

종의 그런 자세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19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이런 종 의식으로 매사를 바라보는 겸손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고매한 인격을 지닌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속량 받은 감격이 있는

진정한 의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3. 용서보다 정죄에 전문가  :30


셋째, 사람에게 기쁨이 없는 이유는, 용서보다 정죄의 시각이 발달되어 있을 때입니다.


사람이 잘못된 성공을 하게 되면 특히 자기 의에 사로잡히게 되면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에 바쁘게 됩니다.

사람에게 내려진 가장 무서운 저주가 있다면

다른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늘 부정적인 면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마음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름다운 면들과 감격적인 사건 속에서도

집요하게 부정적인 면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사탄의 본업이기 때문입니다. 참소하는 일이 사탄의 일입니다.


본문에 보면 30절에서, 첫째 아들은 자기의 동생이 돌아온 것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기 보다는

그 동생이 저질렀을 과거의 죄에 대해 추궁하기에 바쁩니다.

그는 자기가 목격한 것도 아니면서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다고 (추측해서)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 동생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돌아온 감격스런 현실을 덮어버리고,

오직 잘못한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동생이 살아온 것도 가족이 회복된 것도,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한 것도

깨어진 가족이 회복된 것도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동생이 잘못한 과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형의 눈으로 본다면.. 이 동생은

영원히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죽어 마땅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의 미래는 형에게 있어서 만은 철저하게 닫혀진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개입도 불허합니다.

오직 그 동생은 과거의 그 한 사건 속에서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찍어 가두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인연을 끊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동생을 동생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30절을 보시면

이 아들이 돌아오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동생에게 ‘이 아들’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무서운 인간의 죄성 가득한 눈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둘째 아들에게 현재와 미래를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 형에게 여전히 “이 네 동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2절).

그리고 “그는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사랑의 눈으로 그 아들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오늘의 모습을 보고 거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잔치를 벌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큰 아들을 보는 눈도 한결같은 사랑의 눈길입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1


한 편 생각해 보면 이 큰 아들은 항상 함께 있었지만,

실제 마음은 이미 멀리 떠난 인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서운한 것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이, 백일하에 그의 입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렇게 큰 아들의 좋은 점만 보고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눈길을 거절하고 끝까지 들어오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아들 책임입니다.

진짜 악한 탕자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버티고 있는 바로 이 큰 아들입니다.


▲지금 집 밖에서 이 큰 아들이 정죄하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큰 아들에게 있어서 지금 동생만큼 미운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그 동생이 탕진한 재산이나,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탕진한 재산이나

아까워 미칠 지경입니다.


큰 아들에게 있어서.. 진짜 탕자는 동생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해당되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을 나간 진짜 탕자는 오히려 큰 아들임을 예수님은 밝히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에게까지 서운한 마음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정죄의 눈길 보다는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학식의 높고 낮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업적이 뛰어난 사람이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나이 60 이상이 되면 다 평준화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비록 실수를 했지만 돌이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 줄 알고 겸손해졌습니다.

인품이 겸손해졌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규모 있게 한 푼도 낭비됨이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절약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덜 됐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사랑스런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얼마나 부유하냐/ 성실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의로운 탕자가 되시렵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사기겠습니까?                                                ▣ 크리스천 인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