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과 한일 관계 눅10:30~37 09.11.17. 다끼모도 쥰 목사님 설교 녹취
◑적을 도왔던 사마리아인
선한 사마리아인이, 길에 강도만나 쓰러져 있던 유대인을 도운 것은
자기에게 ‘적과 마찬가지인 사람’을 도운 것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대적이 있다.
나에 대해서 뒤에서 소곤대거나,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
마치 나에게 대적과 다름없는 사람이
하루는 강도만나 길에 쓰러진 것 같은.. 큰 환란을 당한 것을.. 내가 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말로는 ‘거 참 안 되었군요’ 하지만
속으로는 ‘거봐라, 내 욕하고 다니더니만 꼴좋다. 속이 시원하구나!’ 이런 마음이 든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하리라고 본다.
▲그렇지만 일단 쓰러진 사람은 살리고 볼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 그를 도와주게 된다.
본문의 사마리아인을 ‘선한 ~인’ 또는 ‘착한 ~인’ 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자기 동족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자기들과 원수지간인,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대인을 도와준 것이었다.
앞서 제사장과 레위인.. 그들은 강도만난 사람과 같은 동족/유대인들이었다.
같은 동족이면서도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서, 도움 주기를 회피했는데..
사마리아인은, 전혀 도울 의무가 없고..
오히려 강도만난 유대인을 보고서 ‘거 참 잘 됐다’며 고소하게 여길 처지인데
그런 인간의 본능적 복수심을 물리치고.. 일단 위기에 처한 적을 돕고 본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가 내 친구이든지/내 대적이든지/나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든지
어떤 위기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위기에 처한 사람은, 일단 돕고 볼 일이다.
◑일본의 저희 교회 이야기
▲일본에는, 한국과 달리, 교회가 많지 않다. (설교자는 일본 목회자)
교회도 많지 않은데, 교회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제가 살고 있는 마을은, 인구가 3만5천명인데,
교회는.. 저희 교회 하나 뿐이다.
저희 이웃 교회는, 저희와 (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다.
▲한국에는 교회가 따닥따닥 붙어있어서, 어쩌면 서로 부대끼기가 필연적이다.
제가 얼마 전에, 성남의 어느 교회에 강사로 초빙되어 갔는데,
주소를 들고 찾아가서, 바로 그 교회인줄 알고 들어가서 앉아있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옆에 붙은) 이웃 교회에 제가 찾아갔던 것이다.
그 교회 목회자는, 새신자가 찾아온 줄 알고, 저를 반겨주셨지만,
제가 ‘오늘 강사인데요’ 하니까,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두 교회가 바로 붙어있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일본에는 교회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까,
제가 일본처럼 '이 근처면, 이 교회가 맞겠지'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국에는, 교회들이 이렇게 서로 가깝게 위치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선의의 경쟁에서 오는 서로간의 갈등과 대결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일본은
교회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서로 교회끼리 갈등하는 것을 보면
참 이상하다. 아마 마귀가 그런 것을 더욱 부추기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에, 저도, 이웃 교회 목회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한 시간이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 그 목회자는
저와 저희교회에 대해, 안 좋게 말하고 다닌다는 말을.. 제가 전해 듣게 되었다.
일본에는 ‘말을 전달하는 새’ 같은 것이 날아다닌다.
새처럼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면서, (헛)소문을 퍼뜨리는 일이 일본에 성행한다.
하루는 제게도 그 ‘새’가 날아와서
이웃교회 목회자가, 저와 저희교회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고 다닌다는데,
들어보니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전도에 특별히 열심인 교회였다.
그래서 1시간이나 떨어진 우리 동네까지 와서, 어느 고등학교 앞에서 정기적으로 전도하는데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오세요. 그런데 저기 십자가가 보이죠?
그 교회는 가지 마세요. 좀 안 좋은 교회입니다’ 라고 전도한다는 것이다.
아마 저와 우리교회가 오순절적인 분위기라서
그런 오순절 신학/신앙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진 목회자인 것 같았다.
(아마 신학교에서 그렇게 비판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저는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 몹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리 동네까지 와서 전도하는 것도, (다른 지역도 많은데)
별로 내가 환영할만한 일이 못 되었다.
▲그런데 그 이웃교회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하루는 또 ‘새’가 날아와서, 제게 이렇게 말을 전해 주었다.
“목사님, 들으셨습니까? 쥰 목사님을 나쁘게 말했던 그 목회자가
자기 교회에 큰 문제가 생겨서, 교인들이 절반이나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병이 나서 드러누워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서, 저는 표정관리를 하면서 ‘그 참, 안 되었군요!’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떤 시원하고 후련함을 느꼈다.
‘나를 비방하고 다니더니.. 거 봐라..’
▲시일이 더 지나서, 그 이웃교회 목회자 부부가, 하루는 우리 교회로 나를 찾아왔다.
그들 부부의 눈빛을 보니, ‘저희를 좀 도와주세요!’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들과 교제하고 싶은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때 갑자기 ‘선한 사마리아인’ 성경말씀이 생각났다.
사실 그는, 나에게 ‘적과 다름없는 형제’였다.
그 ‘적 같은 형제’가, 지금 자기 교회에 강도 만난 것 같은 큰 문제가 생겨서,
뭔가 도움을 구하러 내게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저 인사치레로 차 한 잔 대접하고는, 돌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을 생각하면서, 그 ‘적 같은 형제’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 목회자와 대면해서, 그의 말을 들으면서 교제해 보니,
‘새’(말 퍼뜨리는 사람)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그에 대해 들었던 말의 상당부분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오해한 것을’ 반성했다.
또한 그도, 나를 오해한 것이 있었다며, 내게 용서를 구했다.
◑도시와 교회는 영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는, 도시를 위해서 중보기도해야 한다.
▲그는, 자기 교회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저도 목회를 하고 있어서, 다 이해되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들이었다.
제 아버지가 목회자여서, 저는 어려서부터 목회 현장을 지켜보면서 자랐다.
그런데 목회는 참 이상한 것이어서,
교회가 사람이 좀 많아지면, 꼭 문제가 생기면서, 분열되었다.
그 결과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 상처를 받고, 크게 실망하게 된다.
그래서 몇 년 동안 힘든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교회에 성도가 많아지는 때가 온다.
그러면 ‘이제 회복되었다’며 모두가 기뻐하며,
‘이제 다시 재도약을 기회를 맞았다’고 흥분하는데.. 그때 또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면서 또 상처를 입고, 실망해서, 인내해야 하는 시기를 거친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을.. 저는 어려서부터 쭉 지켜보면서 자랐다.
그의 실패담을 듣다보니,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서 겪었던 비슷한 일이 생각났다.
우리도 비슷한 ‘영적 전쟁’을 겪었는데,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제가 한 가지 배운 영적 경험이 있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와 나누었다. ↙
▲교회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영적 전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교회 안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그것을 자연히 ‘인간적인 원인’으로 돌린다.
그러나 교회 문제는, 표면은 인간적인 갈등이지만, 그 이면에는 영적 전쟁이 있다.
그렇지 않고, 교회 문제를 인간적 갈등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천이 되는 그 사람이, 교회를 떠나면.. 다 해결될 줄 기대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A가 사라지면, 교회가 잠잠해 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얌전했던) B가 새롭게 나타난다. 그는 A보다 한 술 더 떤다.
이제는 제발 B가 사라져주기를 간절히 ‘기도’까지 한다.
그래서 B가 사라지면, 잠잠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이제 C가 나타나서 악역을 담당한다.
(이런 갈등의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교회 지도자의 성장/변화이다.
지도자가 성장/변화가 빨리 빨리 안 되니까.. 같은 문제가 계속 불거지는 것이다.)
한국에도 있겠지만, 일본에 ‘두더지 잡기’ 놀이가 있다.
망치를 들고, 올라오는 두더지를 때리는데,
두더지가 어디서 올라올지 몰라서.. 당황한다.
마치 목회 중에 발생하는 문제는 ‘두더지 잡기’와 같다고 본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두더지가 올라오며,
하나를 때려잡으면 또 올라오고.., 또 때려잡아도 또 올라오기 때문이다.
▲교회 내 갈등을 영적 전쟁으로 보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마귀를 대적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친다.
그 사람을 대적하고, 그 형제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배후에 역사하는 마귀를 대적하고, 영적 권세를 물리치는 것이다.
이런 영적전쟁은 .. 깨어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게 특별한 깨우침을 주셨는데,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중보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편안하려면.. 지역사회가 편안해야 하고,
지역사회가 편안하면.. 교회도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갈등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먼저 지역사회의 갈등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노력을
(기도를 통해서 지역을 중보하는 영적전쟁으로)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에 다니는 성도, 또는 교회에 새로 전입해 들어오는 사람은
결국 지역사회에 사는 주민들이다.
지역주민이 교회에 들어올 때, 그 지역의 영적 영향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가만히 뜯어보면,
그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과.. 거의 비슷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신자나, 특히 새신자는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듯이) 지역의 영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교회 안에 성령의 지배가 약화되면, ‘세상 영/그 지역의 영’이 활개 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세상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령이 충만해서, 그 세상 영을 지배하지 않으면
도리어 시기, 분열, 다툼, 거짓, 당 짓기, 음란, 물질 욕심 등,
강력한 세상 신spirit이 교회에 들어온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 분위기와 엇비슷하게 돌아간다. 아니 세상 분위기와 똑같이 돌아간다.
- 이것이 교회가 강력한 영적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이유이다.
▲일본에서는 새신자가 오면 크게 환영한다.
너무 새신자가 안 오는데, 가끔씩 새신자가 오면 얼마나 반가운가!
그런데 너무 좋아라 할 일만은 아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새신자가 들어올 때, 그를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었던 ‘세상 영’이 따라 들어온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그 새신자를 통해서/ 이면적으로는 세상 영을 통해서
교회가 한 번 홍역을 치를 수도 있다.
물론 기(이미 旣)신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교회는, 아예 그 도시의 영적 분위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 도시에 교인들도 살고 있기 때문이고,
교인들은, 성령의 영향도 받지만,
그 도시의 (악한) 영적인 기운도 동시에 받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렘29:7
그래서 저희는, 저희가 사는 도시를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이 도시에 모든 마귀(악령)들의 역사를 대적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서부터, 교회 안에 문제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교회가 굉장히 평화로워지는 것이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사람의 영적 상태와, 그 지역의 영적 상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우리 교회가 겪었던 영적 전쟁의 경험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 교회도, 그 지역을 위해 중보기도하며 영적전쟁을 싸울 때
교회의 문제가 줄어들 것이라고.. 나는 일러 주었다.
(이것이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나중에 그 교회 사정을 듣고는,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 도시에 있는 산은, 특별히 ‘신령한 산’으로 불리었고,
그 지역은 특별히 절temple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 목회자는, 예전에는 ‘절은 절이고, 교회는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나의 조언을 듣고, 그는 성도들과 함께 도시를 위해 중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문제가 생길 때도,
적이 ‘사람’이 아니라, 마귀와 악령임을 분변하고,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치는 기도를 계속 해 나갔다.
그런 와중에, 교인들 가운데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원래 이 목회자는, 오순절/은사주의 신앙에 대해 문외한이었으나,
거듭되는 교회 문제를 통해서 마음이 겸손해져 있어서, 이런 신앙을 겸허히 수용하였다.)
그렇게 교회와 성도들이 그 지역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사이에
어느 절에 있는 주지승의 딸이, 먼저 그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딸은 자기 아버지(주지승려)가 좋은 일을 한다고 이제까지 믿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게 귀신의 역사(굿 같은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그의 아버지 주지승려도 너무 머리가 아프게 되었고,
교회 와서 기도 받으면, 신기하게 두통이 사라지는 일을 몇 차례 반복해서 경험하고는
그 주지승려도 자기 승려신분증을 찢어버리고,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의 일가족 4명(부,모,자,녀) 모두가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 주지승려는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자기 간증문을 인쇄물로 만들어서
자기 절에 다니던 모든 신도들의 집에 우편으로 발송했다고 한다. 전도를 위해서!
◑유대와 사마리아는.. 한국과 일본 사이와 매우 비슷하다.
▲성경적 배경
솔로몬 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왕국이 시작되었는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면서, 그들이 혼혈되면서.. 사마리아인이 생겼다.
그러니까 원래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같은 조상/같은 혈통/같은 12지파였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전에 서로 같은 민족이었는데,
앗수르의 혼혈정책 이후로,
유대와 사마리아가 서로 견원지간으로 멀어졌다.
▲비슷하게, 일본과 한국은 뿌리가 같은 민족이었다.
일본인의 DNA를 조사하면, 70%가 한국인의 DNA와 일치/유사하다고 한다.
원래 일본 원주민은 수렵을 해서 먹고 살았다.
그런데 4세기 경, 규슈 지방부터, 농경문화, 철기문화, 고분 매장법이 차츰 시작되었다.
그것은 가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전래한 문화였다.
예전에 일본은, 가야문화와 일본문화가 ‘서로 섞였다’는 주장을 해왔으나,
학문적 정직성으로 말하면, 가야문화가 일본에 ‘건너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년에 NHK(일본방송)가 이 사실을 시리즈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를 계기로)
한국-일본이.. 마치 유대인-사마리아인처럼 .. 서로 멀어져버렸다.
원래는 같은 뿌리root이었는데 말이다.
▲한국과 일본이 연합하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예언자적 음성)
한국과 일본이 혈통적으로 ‘같은 뿌리’라는 동질성을 회복해서
영적인 영역을 넘어서.. 모든 면에서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북통일에도 좋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통일한국’과 ‘일본’이 서로 연합하면
앞으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본다.
정말 영적인 영역은 물론이요, 다른 모든 영역에 있어서도
한-일 두 나라의 연합을 통해서.. 세계의 지도자 나라로 부상할 것이다.
(그래서 한-일 월드컵이 2002년에 치러졌는가?)
나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교회적 차원에서부터, 한-일 두 나라의 연합이 ▣ 영적전쟁
지금보다 몇 배 더 친밀해 지기를 바란다. 이것은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긴요한 '전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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