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자의 길 요1:20~21 가톨릭 글 스크랩, 편집
◑3번의 ‘아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모세)냐.. 대답하되 아니라 요1:20~21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겸손했던 세례요한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을 찾아와서 ‘너는 누구냐?’ 라고 물었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가끔 ‘내가 성경 속의 누구와 비슷한가?’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해 볼 때가 있다.
‘내가 엘리야와 비슷할까?’
‘내가 모세와 비슷할까?’
그런데 위대한 그 세례요한 선지자는
자기는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모세)도 아니’란다.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교만한 상상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해 본다.
▲물질에 대해 겸손했던 세례요한
세례요한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도 겸손했지만,
입고 다니던 옷도 겸손했고... 낙타털옷
먹고 살았던 음식도 겸손했다... 메뚜기와 석청
그가 살았던 동네도 겸손했다... 광야, 시골 한 구석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입은 옷이나 먹는 음식이.. 세례요한처럼 겸손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사는 집이나 동네도 마찬가지로 겸손하다.
그런데 이런 ‘겸손’이 자부심이 되지 못하고
‘자기 비하’가 된다면.. 적어도 나에게 ‘세례요한의 영성’은 없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사람들을 책망하는 구절이 눅3:10~14에 나온다.
무리들/세리들/군인들에게 책망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부류에 대한 책망이 공통적으로 ‘물질’에 관한 것이다.
모두 물질에 대한 회개를 촉구했던 것이다.
세례요한이 물질에 대해 겸손했기 때문에.. 그는 강하게 물질에 대해 책망할 수 있었다.
▲겸손히 자신을 부인할 때, 그리스도를 더 잘 드러내게 된다.
이 3번의 부정 ‘나는 ......아니다’ 는 요한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드러낸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이다’ 라고 당신을 여러 번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주목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주목하라’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포도나무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목자이다.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유명한 교회를 찾아다니고,
유명한 주의 종에게 몰려다니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예수님이 아닐 수도 있다....
세례요한이 ‘나는 ... 아니다’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를 잘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자기를 유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옛날 로마제국 때의 일이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전한 개선장군들이 로마로 입성하면
백성들이 모두 몰려나와 연도에 늘어서서 환호성을 지르며 맞이했다.
그때 로마로 입성하는 장군들은 노예 한명을 마차의 뒤에 숨겨 들어왔다.
그 노예는 백성들이 환호할 때마다 장군의 뒤에서
"너는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역할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잠시 도취되어있는 사이에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치던 대중은 언제라도 변하여 돌을 던질 수 있고
개선장군의 공로를 치하하던 황제도
바로 그를 경계 1호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았기 때문이다. <옥>
◑바닥이 바탕이다
어제는 인천에 있는 양로원 신년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전철.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고,
이러저러한 사람이 마주쳐졌습니다.
한동안 그들을 보고 있다가
‘수도자가 뭐 이사람 저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시선을 깔고 바닥을 보았습니다.
평생 처음 바닥을 바닥으로 바라봤습니다.
‘이것이 바닥이구나’ 하고 처음 느꼈습니다.
지저분한 발자국들이 우선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무시당하거나
적어도 관심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심지어는 짓밟히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닥을 이렇게 무시하고 짓밟는데
이 바닥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서 있을 것이며
이 바닥이 없으면 어떻게 편안하게 노닥거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바닥이 바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닥과 바탕.
바닥이.. 우리 삶의 바탕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닥이 싫습니다.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바닥이 좋을 리 없지요.
그래서 바닥이 되려고 하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닥으로 내려가도
마치 주식이나 경기가 바닥을 쳐야 올라가듯이
바닥을 치고 올라가기를 희망하며.. 바닥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바닥에 머물지 못하면 바탕이 되지 못합니다.
바닥을 치고 올라갈 것으로 임시적이고 기회적으로만 받아들이면
바닥은 바탕이 되지 못합니다.
바닥은 바닥이어야 함을 받아들여야 하고
바닥이 바닥임을 사랑해야만
바닥이 바탕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신발의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한 세례자 요한은
바닥으로 내려가고 바닥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았기에
주님께서 구원사업을 펴실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늘 위에서 놀기만 원했고
한 번도 바닥다운 바닥까지 내려간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사랑하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형제들 삶의 바탕이 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를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제 스스로 정말 바닥까지 내려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프지만 주님께서 바닥으로 내려가게 하셔야 내려갈 것 같습니다.
올해 그 아픈 은총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선>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런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요1:26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찾아서 "당신은 누구요?"하고 묻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바로 우리가 찾는 그리스도요?"라는 질문이다.
무자년(2008) 올 한해
또 다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바로 요한을 찾아온 사람들처럼
<그분>을 찾아 헤매는 길이다.
지난 해,
나는 그분을 찾았던가?
그분을 어디에서 찾았던가?
혹 그분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계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가?
▲우리들 가운데 계신다. 요1:26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며,
우리가 그분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잘 말해준다.
그분은 분명 우리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다. 요1:26
다른 데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장,
내가 만나게 될 모든 인연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헛된 데서 그분을 찾는 우를.. 올해는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분이시다. 요1:26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계시는 그분인데도
왜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
그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 가운데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잘 아는 사람과 친분을 맺고 산다.
가족, 친지, 친구, 동료들과 붙어 다닌다.
그러나 우리의 폭을 넓혀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의 친교에
우리 자신을 열어 놓지 않으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분을 놓쳐버리게 된다.
금년에는 내가 잘 아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로 눈을 좀더 돌리자.
그래야만 <그분>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로 우리가 잘 모르는 그 사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 누군지를 한번 둘러보자.
그냥 무시하는 눈으로
그냥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으로
그냥 귀찮은 사람으로 바라보지 말고
예민한 눈으로 한번 바라보자.
그들 가운데서
숨어 계시는 <그분>을 느껴보자.
'아, 주님!
거기 계셨군요...' <상>
◑사람들이 나를 몰라줘도 괜찮다
예수님이 한 번 물어보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막8:27~30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한 명이라 하더이다.’
"뭐 내가 고작 '선지자 중의 한 명'이라고?"
만약 내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런 무시당함을 참지 못하고, 화를 벌컥 내었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8:29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자기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사람이 극소수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은 내면이 평온했다.
▲한 번은 병원에 갔는데, 30대 후반의 창구 직원이
40대 후반인 나를 보고 “아버님, 이리 저리 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님’이란 호칭을, 그 날 난생 처음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내가 벌써 그렇게 늙었나? 이제는 아버님 소리를 다 듣네?’
나는 그 창구 직원에게 어필(이의 제기)했다.
“나랑 연배 차이가 별로 안 나는 것 같은데, 나를 보고 ‘아버님’이라뇨?”
“저희 병원 방침이, 그렇게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좀 들어 보이면,
무조건 ‘아버님!’하고 불러줘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선생님!’ 하고 불러줘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대신에 ‘사장님’은 너무 경박스럽고,
‘여보슈, 저기요, 아저씨’ 이런 어투는 모두 존경어는 아니다.
사람이 점점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가
자기를 ‘~님’ (아버님, 선생님, 어르신, 여사님) 하고 불러줘야 기분이 괜찮아지며,
그렇지 못하면.. 자기가 무시당하는 것 같아.. 속에서 막 성질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줘도.. 전혀 화를 내시지 않으셨다.’ 막8:27~30
분명히 자기가 그리스도가 맞는데도.. 오직 소수의 제자들만 그 사실을 인정해 준다.
세상 사람들은 전혀 예수님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있었다. 고작 '선지자 중의 한 명'.. 이것은 무시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화를 벌컥 내지 않으셨다.
그런데 나는, 누가 나를 ‘~님’ 하고 불러주지 않으면,
내색은 안 해도, 속에서 부글부글 할 때가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도리어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라는 인정/칭송을 받기 보다는’
그리스도로서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굳게 결심하셨다. 막8:31
즉 ‘그리스도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고
실제로 ‘그리스도의 사역’, 즉 거부를 당하시고 십자가 지시는 것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셨고, 정말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다.
오늘날 나는 ‘~님’ 이라고 불리는 것만 좋아하고,
실제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 님’으로 불리는 데는 관심이 없으셨고,
‘그리스도’로서 걸어가야 할 그 길에는.. 관심이 많으셨다.
나랑 어떻게 그렇게 정반대인지... <편집자 글> ▣ 꿈, 비전,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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