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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가 아니라 요한으로! 2319

LNCK 2010. 2. 19. 21:35

◈사가랴가 아니라 요한으로!                        눅1:5~25                    08.02.24.설교스크랩


(끝까지 읽어보세요!)


◑본문의 배경


▲제사장이 타락한 시절에..

본문은 이야기가 유대왕 헤롯 때라고 밝히고 있고,

오늘의 주인공이 제사장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모세의 형 아론의 직계 자손입니다.

그 혈통 외에 다른 피가 섞이면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의 부인들 역시 순수 유대 혈통을 가진 여성이어야만

제사장과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질고 험한 세월 속에서 이미 혼잡해질 대로 혼잡해진 역사 가운데

유대의 피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기란 보통 엄격한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사장과 그 가족은

흠 없고 거룩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피는 이 세상에는 순수 이스라엘 족속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거룩해야 할 제사장들이

헤롯 때에 와서는 가장 타락한 부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미 그들은 영생이나 하나님 나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이 땅에서의 삶과 이 땅에서의 천국이 다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겐 부활도 이미 옛날 얘기가 될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정치권과 야합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노선을 방해하는 자들은 그 누구라도 적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이들의 작당으로 시작되고 마무리 되었던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사가랴 부부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먼저 그 내외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성경의 평가를 보십시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눅1:6


이 두 사람, 사라갸와 엘리사벳은 흙 속의 진주였습니다.

어두운 시대 가운데도 반짝이던 작은 빛이었고,

세상보다 하늘에 소망을 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생에서의 이들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이들에겐 자식이 없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파문 당하는 유형을 예 든 적이 있는데,

그 첫째가 “유대인으로서 아내가 없는 자, 또는 아내가 있는데도 자식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여자로서 자식을 못 낳는 것은.. 이혼당하는 첫 번째 결격사유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오랜 통념으로 보면

이들 부부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요, 뭔가 내세울 것이 없는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사건은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면서 시작됐습니다.

당시의 전체 제사장 수는 2만 명 정도였는데,

사가랴는 아론의 자손 중에 아비야 반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성전 일이란 늘 정해져 있었고, 거기에 비해서 제사장 수는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이제는 할 일도 제비 뽑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거기에 사가랴가 뽑힌 것이고, 그는 향단에서 분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분향은 백성들이 제물을 드리기 전에 행해졌는데,

이것은 희생제물이 향 내음에 쌓여서.. 하나님 앞에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자기 전 생애에

단 한번이라도 분향하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면

그날은 본인에겐 가장 영광스런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가랴 역시 그 일이 자기에게 떨어지자 마음 속 깊이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분)향단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사장의 뜰’과 ‘백성의 뜰’ 사이에는 난간이 있었는데

분향이 끝나면, 제사장은 거기에 올라와 백성을 축복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만의 특권이었고, 백성들 역시 그 시간을 몹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사가랴 제사장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가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같이 성소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사가랴는 성소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의 자기는 아주 작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전 백성의 대표자로 성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거룩한 곳에서, 바로 그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언젠가 제가 기도하고 있는데, 한 자매가 제게 급한 용무가 있었는지

제 앞에 서성이고 있는 것을 모르고 눈을 떴다가,

눈앞이 빨강으로 확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그 자매는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가랴 역시 얼마나 놀랬는지는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천사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 엘리사벳을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임신을 하고, 할아버지가 아들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아들은.. 모두에게 기쁨을 주고, 모태로부터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서

장차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메시야를 예비하는 인물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가랴의 성소에서 기도 내용은?


오늘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게 이것입니다.

성소 안에서 사가랴는 도대체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간절했기에,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일까요?

아울러 그 기도응답으로 파급되는 영향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과연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여러분께 물어 보겠습니다.

사가랴의 처지를 본다면, 그는 지금 뭐가 가장 시급하고 간절한 기도꺼리입니까?

아들을 달라는 간구겠지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그는 ‘백성의 대표자’로 성소에 들어와 있습니다.

분향하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온 백성을 대표해서 드리는 기도인데, 과연 거기서 그는 자기에게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그렇게 공적인 자리, 그렇게 거룩한 자리에서.. 자기 사사로운 것을 위해 기도했을까요?

성경은 그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흠 없이 지킨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런 그가 과연 개인적인 것을 위해 간구했을까요?


이쯤에서.. <메시야의 오심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성경의 예언과 징조>를 상기해 봅시다.

그것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지금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서는, 이렇게 마칩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말4:5~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겠다는 것이고,

그 전에 사람들을 메시야께로 안내할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미리 보내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눅1:17절에 보면,

천사가 말라기 선지자가 했던 말씀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물론 구절 전체가 다 똑같지는 않지만.. 내용은 같은 내용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제 때가 돼서 그 말씀, 말라기의 예언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약속했던 메시야를 이제는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씀이 그러하다면

사가랴가 성소에서 기도한 내용은 과연 무엇이겠냐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보내달라고 기도했겠죠. 백성의 대표로, 제사장으로서 말입니다.


지난 4백년 동안 메시야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메시야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얼마이고 선지자들의 예언한 것은 또 얼마입니까?

지금 눈앞엔 울 일과 한숨 쉴 일 밖에 없지만,

그 분이 오시면 다시는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으리라 약속하셔서

그 희망으로 버텨왔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포로로 잡혀가면서도 참았고, 한없는 낙망 가운데서도 기도했고,

객지 생활 가운데도 예루살렘을 잊지 않았으며, 바벨론 강가에서도 기도하고,

수산 궁에서도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모인 곳 어디서든 예배드리기를 쉬지 않았고

하나님 백성이란 동질감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메시야는 오시지 않았고, 그런 시간이 더 지나가자

이제 사람들의 입에서는 절망 어린 한탄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왜 아직도 침묵하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살아 계시기나 한 것입니까?”

그렇게 울부짖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약속을 믿지 못하게 됐습니다. 

메시야 오심의 희망도 점점 잊혀져 갔습니다. 

그리고 이생의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배부른 게 좋았고 지금의 안락함이 좋았습니다.

제사를 가벼이 여기기 시작했고, 지도자들은 고리대금업을 시작했고,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것을 탈취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영적 세계에 관심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었고,

무엇보다 제사장들은 제사보다 자기들 배부른 일이 먼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당신의 일을 위해 도구로 쓸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바야흐로 때는 왔고, 이제는 메시야를 보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몸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action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가운데 의인이 어디 없나 찾으셨고,

그렇게 메시야 오심을 포기한 가운데도

‘그 기도를 잊지 않은 사람이 어디 없나?’ 찾으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그 기도의 주인공은 어디 있나 찾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묵상 가운데.. 사가랴가 한 기도는

자기 아들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음을 확신합니다.

사가랴는 의인이었고, 백성의 대표자로 하나님 앞에 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드리는 기도는

모든 백성들에게 절실하고도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주님! 메시야를 보내 주십시오. 도탄에 빠져 있고 성실이 무너진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세울 메시야를 보내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무너진 우리들 마음의 성전을 다시 세워 주소서!

그래서 다시금 우리들의 눈을 영원으로 돌리게 하옵소서!’ 


천사는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그랬는데,

그 간구는 아들 달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메시야를 보내 달라는 기도의 응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단순히 한 노인에게 아들을 주기 위해 천사를 보낼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천사의 가장 큰 메시지는

너희가 기다리던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언대로 먼저 엘리야가 와야 했고,

그 엘리야는 어느 가문에서든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찾았던 것인데,

그렇게 현세적 풍요를 누리고 인기에 영합하는 제사장 그룹 가운데서도

의로운 제사장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도구로 삼으셨고,

그에게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막중한 사명을 맡기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엘리야’(주님 오심을 예비하는 자, 세례요한)는 마땅히 그 집으로 보내져야 했습니다.


사가랴는 공적인 기도를 드리다가.. 사적인 기도까지 응답 받은 것입니다.

그는 중보기도를 드리다가..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 받았습니다.

그는 큰 기도를 응답 받는 와중에.. 작은 문제까지 응답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중에.. 땅의 것까지 응답 받았습니다.


▲적용1: 사가랴처럼 큰 그림을 그리십시오!

여러분은 요즘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어떤 뜨거운 심령으로 기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아이/돈/학벌/배우자가 없습니다. 하나 주세요!”

우리는 여전히 현실적인 기도제목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관심은 여전히 돈이고, 건강이고, 지위고, 성공입니다.

그래요!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문제입니까?


사가랴도 당대에 다른 제사장처럼 현실에 시퍼렇게 눈 뜨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그 구닥다리 계명과 규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키는 것을 바보로 여기는 그 때에, 그는 흠이 없이 행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왜 그런 기도를 드렸을까요?


이 시간 저는 단순히 기도의 문제를 꺼낸 게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살아가는 이유가 뭔지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땅에 우리 교회가 서 있다면.. 그 존재 이유는 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큰 그림을 그리십시오!

늘 작은 그림을 그리려다 보니

제대로 그림을 그려보지도 못한 체 그림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가랴 당대의 의인은 메시야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우리 주님은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가랴처럼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일도 힘들고 희망을 한결같이 품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길은 힘들고 외롭고 고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대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머지 문제들은 별 게 아닌 게 됩니다.

 

그 길은 필연적으로 고난의 길이지만 그 길만이 진짜 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세계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역시 본질을 놓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길을 확고하게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 시대의, 의롭고 당당한 길을 주저하지 않고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들의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이 이름을 사가랴가 아니라 요한으로!


사가랴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자기가 이 나이에 애 아빠가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실컷 기도해 놓고 막상 기도가 응답되면 깜짝 놀랍니다.

사가랴는 그 응답을 받아들일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그 증거로 아이가 나올 때까지 그를 벙어리로 만들어 놓습니다.

사가랴는 성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들의 기쁨은 컸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친족들 모두의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기 이름을 뭘로 지을까?

아시다시피 유대 민족은 지독한 혈연공동체입니다.

같은 핏줄끼리의 유대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 모릅니다.

아이가 태어났으니 그보다 더한 경사가 없었고, 해서 가문의 중진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유대인 아이의 이름은 난 지 8일 만에, 즉 할례를 받기 전까지는 지어야 했는데

대개 유력한 친족의 대표가 이름 짓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말씀 제목을 보고 오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사가랴가 아니라 요한으로’라는 말은 자칫하면

‘사가랴는 나쁘고 요한은 좋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오늘 이 시각은 친족들의 시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사가랴 자체도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그만큼만 돼도 하나님은 더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유대인들이 사내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는

자기들 친족 가운데 탁월한 조상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오래된 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이의 이름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사가랴 친족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지시한 이름 그대로!

친족들의 생각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평소 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 것만 빼놓고는

사가랴를 꽤 괜찮은 인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인품, 그의 신앙, 그의 제사장이라는 사회적 지위,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한 후 그들은 결론 내렸습니다.


“뭐 다른 이름으로 할 것 있나? 애 아버지의 이름을 그냥 갖다 붙이자. 사가랴 2세로 하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엄마인 엘리사벳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거기에 엘리사벳이 반대합니다.


그녀는 전혀 낯선 이름, ‘요한’이란 이름을 들고 나왔습니다.  눅1:60

친족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기들 가문에는 그런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말 못하는 사가랴에게 가서, 다시 이름을 뭐라 할까 물었더니

그 역시 서판을 달라고 해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써 준 것입니다. 눅1:13


‘요한’이란 이름은 천사가 지명하신 이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곧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아이 이름을 사가랴로 하자는 친족들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친족들은.. 그 아이가 또 하나의 가문의 영광이 되길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제사장이니까.. 이 아이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망 있는 대제사장이 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대로 키울 게 아니라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부모와 친족들에게 기쁨을 주는 아이로 양육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는 이름(요한) 뜻대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전하면서 살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목적대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족과 가문의 영광이 되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의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되는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 작정하신 뜻대로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요한이라는 이름이 가진 뜻입니다.  

     

▲적용2.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 역시 친족들의 시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먼저 우리들 자신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사가랴로 살기를 원합니까, 요한으로 살기를 원합니까?

사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우리가 ‘사가랴’(가문의 영광)로 살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마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세대가 먼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고,

우리 자녀들 세대 역시 그렇게 ‘요한처럼’ 키워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기들의 못 다한 꿈을 이루기위해

자녀들을 ‘사가랴’로 키우는지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아이는 나의 영광이 되어야 해, 내 아이는 기필코 대제사장이 되어야 해!

내 아이는 길이 가문의 영광이 되어야만 해, 내 아이 때문에 우리들이 빛을 봐야 해!’

이게 사가랴로 키우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 부모에 의해 조종되어지고 강압되어지는

이 세대의 사가랴가 얼마나 많은 지 는 셀 수조차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렇게 강요당하는 당사자일 수 있고, 아니면 부모일 수 있고,

아니면 거기에 동조하는 친족일 수 있습니다.

모두들 어떻게 하면 ‘사가랴’가 되느냐, 아니면 ‘사가랴’로 키울 것이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제 성경말씀대로 말세가 돼서 대환란의 날이 오면,

그때를 살아가는 세대는 엄청난 영적 전쟁을 치뤄야 될 텐데

과연 거기에 버틸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는 그런 세대를 살고 있는데,

앞으로 여러분 세대나 우리들 손자 손녀 세대에는

그 영적 전쟁의 강도가 훨씬 심해질 것입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좋은 계승은, 경건한 기성세대가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나는 엉터리로 살았지만 너희는 건강한 세대가 되어야 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의로웠기 때문에

그들의 아들 요한도 의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 어디서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어떻게 살았는지 압니다.

그는 엘리야의 성정을 품고 철들자마자 집을 떠나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사역을 시작할 때까지 그 빈들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고독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외쳤고

암담한 이스라엘에 한 줄기 빛을 비춰 주었습니다.


한때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알 만큼 인기 있었고 제자들도 많이 생겼지만

그것은 잠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사람들은 그에게로 몰려갔고,

제자들도 그에게로 갔으며 그는 결국 홀로 남았습니다.


말년에 그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어느 날 목이 잘린 채

그 머리가 소반에 담겨지는 굴욕 가운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단 한 번도 몸 편히, 맘 편하게 산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지금까지 이 땅에 온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하고 고결한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여러분!

아직 여러분 중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얘기할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들 다음 세대에 뭔가를 물려줘야 할 당사자들입니다.

그것은 아직 나이 어리거나 나이 많이 들었거나 관계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주님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가랴로 살 것이냐, 요한으로 살 것이냐?

사가랴로 키울 것이냐, 요한으로 키울 것이냐?


아기 예수님을 낳았던 마리아의 얘기로 설교를 끝내고자 합니다.

그녀는 애초부터 메시야의 어머니가 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서 그녀의 몸을 빌려야겠다고 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하게 되면 돌 맞아 죽습니다.

하지만 메시야는 오셔야만 했습니다.


천사는 재차 그녀를 설득했습니다.

늙어 수태한 그녀의 친족 엘리사벳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며 순종했습니다.


지금 마리아의 이 선택은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선택했습니다.


이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결국 복된 선택이었지만 목숨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 모습 그대로부터 대가를 지불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과 교회와 여러분의 자녀 세대와 조국과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준비가 덜 되었어도 부름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예”하고 응답하는 것은,

어디서든, 어느 때든, 어떤 일에서든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부디 주의 길을 가면서 큰 그림을 그리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성을 더 강건하게 추스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경건은 우리 다음 세대에 흐를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지금 있는 그대로 주의 일에 나서십시오.

준비가 덜 됐더라도 주님은 여러분을 채우시면서 쓰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세계 어디에 있든지 요한처럼 하나님을 위해

자기 길을 확고하게 걸어가는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세상 끝날까지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이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행복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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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다음에는 의무가 따른다 2285  (0) 2010.01.28
세상에 미련이 없는 욥 2279  (0) 2010.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