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으로서 복음을 전파한 바울 고후4:3~6 09.02.22.설교스크랩
*원제목 : 어둠 속에 빛이 비쳐서
▲본문 상황에 어울리는 예화
한 집에 사는 두 엄마가 있었습니다. 각각 갓난 아이 하나씩을 기르고 있었는데,
한 엄마가 자다가, 자기 아기를 깔고 눕는 바람에 그만 아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아기 엄마는 잠결이지만, 자기가 아기를 죽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른 엄마의 아기를 몰래 가져와서.. 자기 아기라고 우기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갓난아기지만, 엄마가 자기 아이 모르겠어요? 결국 이 일로 소송이 붙어서,
솔로몬 왕에게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그 때 솔로몬이 명 판결을 하지요.
두 엄마 모두 아기가 자기 아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차라리 아기를 둘로 잘라서 각각 가져가라고 합니다.
자기 아기를 죽인 엄마는 냉큼 그러자고 합니다.
그러나 아기의 진짜 엄마는 아기를 포기합니다.
아기를 저 엄마에게 주고 제발 아기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서, 아기의 진짜 엄마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아기를 그에게 돌려줍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진짜 엄마의 마음은 온통 자기 아이에게 가 있었던 겁니다.
아기가 혹시 다칠까, 혹시 잘못될까, 아기에게만 관심이 있었고,
아기가 죽는 최악의 경우는 어떻게든 피하려고 한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엄마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기를 포기하지 않은 겁니다.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바울의 마음이.. 바로 이 진짜 아기엄마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하든지 아기를 살리려는 엄마의 마음 말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
당시 고린도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바울 자신도 이 일로 인해서 심하게 타격을 받았습니다.
인격적으로도 모욕을 당했고, 자기가 그동안 해 온 사역, 고린도교회에 쏟은 사랑이
한 순간에 헛된 것이 된 것 같은 충격적인 사태를 맞았습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 때문이었는데,
사실은 그들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미혹되어서 하루아침에 복음을 저버리고
바울을 배척한 고린도교회 교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멀쩡히 아빠가 있는 집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들어와서는, 자기가 아이들의 아빠라고 주장하는데,
아이들이 멀쩡히 살아있는 친아빠를 외면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가서 아빠라고 부르고 매달린단 말이지요.
평소에 가지고 싶어 했던 비교육적인 장난감 사주고,
평소에 먹고 싶어 하던 불량식품 사주고, 그러니까 아이들이,
오늘부터 나는 이 아저씨를 아빠라고 할래, 그런 식이란 말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는 아빠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알지도 못하는 놈에 대해서도 화가 나겠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당장 아빠에게 등 돌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아빠라고 부르고 달려가는 아이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더 크지 않겠습니까?
▲복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 자기 얘기를 하는 거짓 교사들
고린도교회에 들어 온 거짓사도들은 복음을 믿지도 않으면서
마치 자기들이 복음의 수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를 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바울은 고후2:17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표준새번역, 공동번역과 유사)
고후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교회에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바울을 배척하게 만든 자들이 그렇게 하는 목적은,
교회를 지키거나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겁니다.
사실 그러면 일하기는 더 쉽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하자면,
복음에 대한 깊은 묵상과 자신에 대한 성찰,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어도 아무 상관없거든요.
그냥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면 되니까요.
사람들에게도 말씀에 순종해서 살라고 하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순종하지 않아도,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다고 하면 되니까요.
그러면 사람들도 환영하고, 자기들도 더 편해지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도 좋고 사람들도 좋아하는 말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팔아서 먹고 산 것은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었지요.
그냥 자기 얘기,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포기하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끝까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다.
바울은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교회를 개척했고,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공들여서 성도들을 양육했는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니 얼마나 허무했겠습니까?
그것도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짓 사도들에게
교인들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바울이 겪어야 했던 실망과 분노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저런 배은망덕하고 앞뒤 분간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더 이상 미련을 가지고 정성을 쏟을 필요가 없다고
그냥 다 포기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바울은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교회를 거짓 사도들에게 넘겨서 성도들이 복음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싸우기로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싸움은.. 거짓 사도들과 맞붙어 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거짓 사도들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바울을 배신하고 실망시킨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거짓으로부터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이, 바울의 싸움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거짓 사도들과 맞서 싸우는 내용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야단치고 달래고 권면하고 가르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까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에서, 아기의 진짜 엄마의 관심이 아이에게 집중되었고,
무조건 아기를 살리는 데 있었던 것처럼, 바울의 관심은 거짓 사도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미혹되어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집중되어서,
그들이 거짓의 길을 버리고 복음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집중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자기의 자리를 회복하고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에도
별로 관심 없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거짓 사도들과 맞서서 정치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그들을 물리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힘을 빌리려고도 하지 않았고, 용역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만 모든 관심을 쏟았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이 다칠까 염려했고, 혹시라도 그들이 믿음을 버리게 될까 염려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거짓 사도들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더라도
바울은 결코 밀리거나 뒤지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실력으로나 권위로나 영적으로 그들은 바울의 경쟁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도 없고, 성령의 은사도 없고,
그냥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는 약장수 같은 사람들이었으니
그들로서는 바울을 감당할 재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면,
그들은 복음이 아니라, 온갖 거짓과 모략과 술수로 인신공격을 하고
사람들을 동원하고 매수해서 바울을 욕하게 하고,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추하고 험한 꼴은 다 보여줄 터였습니다.
이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요즘도 교회에서 분쟁이 생겨서 서로 싸우면,
결국 그로 인해서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포기하는 모습을
참 많이 보지 않습니까?
바울이 만약 그랬다면.. 고린도교회 역시 성도들만 상처를 입고
신앙까지도 잃어버릴 지경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누가 이겨도.. 결코 이겼다고 할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오로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보호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신앙적으로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복음 안에 거하도록 보호하고,
거짓 사도와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바울의 유일한 관심이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보면, 참 사도/거짓 사도인지 분변한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거짓 사도들이 복음을 올바로 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고후4:3~4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당연히 믿지도 않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바울은 부득이한 경우 말고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논쟁을 벌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그런 식으로 맞붙어 싸우는 것이 결국은 모두에게 상처를 주게 될 뿐이고,
그것이야말로 마귀가 간절하게 바라고 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필요할 때 자기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그가 복음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했던 이야기를 간간히 들려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바울의 이야기에서 중심은 아닙니다.
바울은 시종일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려고 합니다.
고린도교인들에게 복음 안에 거하도록 촉구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고후4:5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후12:12
지금 바울을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자기 얘기를 하고,
자기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복음도, 진리도, 구원도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할 뿐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더 높이고, 인기를 더 얻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종이 되려고 하지 않고,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대접받으려고만 하고, 이익을 챙기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건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요. 선한 목자와 삯꾼은 다르다고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지만,
삯꾼은 그저 자기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요.
목사도 그렇고, 교인들도 그렇고, 교회에서 일할 때,
내가 그 일을 누구를 위해서 했는지.. 결국은 다 알려질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교회를 위한다고 말해도,
결국 자기를 위해서 일한 사람과, 자기를 부인한 사람의 결과는..
엄연히 다르게 드러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났을 때
종교를 불문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도한 것은,
그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의 일생이.. 자기의 부나 명예나 권력을 쌓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의 죽음을 그렇게 아쉬워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참 사도의 마음
바울의 관심은, 오로지 고린도교인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만이
바울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혹시라도 상처받고 낙심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
복음을 떠나게 될까봐 항상 조심스러웠고 늘 염려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의 심경을 표현합니다.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고후11:28~29
자기가 모욕당하고, 자기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모욕당하고 그 복음이 훼손되는 건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떠나서 엉뚱한 것을 쫓아가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서두에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서 아기의 진짜 엄마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내가 희생을 하더라도, 어떻게든 아기만은 살려야겠다는 마음,
이것이 진짜 엄마의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 마땅히 누릴 만한 명예도 다 관심 없고,
오로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지키고 보호하려고 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참 사도의 마음입니다.
▲참 목자 예수님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런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우리를 미혹하는 마귀와
정면으로 대결하셔서 얼마든지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마귀를 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 대항해서 베드로가 칼을 휘두를 때,
그 칼을 도로 넣으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라고 하십니다. 마26:53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물론 마귀는 물리치시고 멸하실 수 있으셨겠지만,
그러면 우리가 다칠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예수님과 마귀의 한판 승부 와중에 상처받고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더구나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와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겁니다.
예수님에게 더 급한 것은 마귀를 물리치시는 것보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제 멋대로 죄짓고 살고 있는
우리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구원받게 하시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요? 우리가 예수님에게 뭐 그리 잘 한 게 있다고요?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들 귀에 달콤한 얘기 해주는 거짓 사도들의 말에 넘어가서
하루아침에 바울에게 등을 돌린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겠다고 하는 소리가 들리면
당장 예수님에게 등 돌리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만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가 던진 돌에 맞고서는 예수님에게 화를 냅니다.
‘아니, 예수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나를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런데 지금 내가 돌에 맞아 이렇게 아픈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주 미안하다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아프겠구나. 내가 미안하다.’
그런데 만화는 다음 장면에서 아주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사람을 향해서 무수히 날아오는 돌들을
예수님이 온 몸으로 고스란히 맞고 계시는 겁니다.
마땅히 내가 맞아야 할 돌들을 예수님이 몸으로 막아서셔서
내가 그 돌에 맞지 않게, 그래서 내가 다치지 않게,
그 돌들을 예수님이 다 대신해서 맞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다가 파편 하나 튀었다고 화내고 비난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은 그래 미안하다, 내가 잘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시는 그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게 되고, 또 나를 보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시려고, 우리가 다치지 않게 하시려고
그 모진 고난과 심지어는 십자가의 죽음까지 고스란히 당하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말해도 듣지 않고 도무지 따르지 않는 우리조차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주님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터무니없는 사람들인가요?
그런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런 놀라운 은혜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뭐 그리 불평하고 원망할 게 많아서 날마다 우리 입에 불만의 소리, 탓하는 말,
헐뜯고 욕하는 말, 미워하고 다투는 말을 담아놓고 삽니까?
왜 사랑할 줄 모르고, 왜 용서할 줄 모르고, 왜 화해할 줄 모릅니까?
한번만 참고, 한번만 넘어가주고, 한번만 이해하면 다 되는데, 왜 그게 그렇게 힘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얼마나 어처구니없으실까요? 얼마나 기가 막히실까요?
그래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주님, 그래도 우리 때문에 안타까워하시고,
우리가 다칠까봐, 우리가 낙심하고 실족할까봐 늘 염려하시고 가슴 태우시는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 크신 사랑, 그 한없으신 은혜를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고후4:6
그 말씀대로, 우리 어두운 마음속에도 빛이 비쳐서, 우리도 환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간직하고 살게 되기를,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더 읽으실 분 ......................................
“주기도문을 드릴 때”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세상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아버지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자기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이 기도문을 진정 자신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말아라.
찔리지 않나요? 이게 바로 우리들 얘기 아닙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우리들,
주님이 하라고 하신 기도와 정반대되는 믿음과 행함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예수님 앞에서 내세울 것도, 떳떳할 것도 없는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은 일생을 그렇게 힘들게 사셨단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단 말입니다.
어제 토요성경공부 시간에 읽었던 말씀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요12장의 말씀인데요,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켜야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게 당연한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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