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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원수의 파괴력은 나에게서 나온다

LNCK 2010. 2. 23. 11:20

                                                                                                          

 

◈원수의 파괴력은 나에게서 나온다             시25:1~22    09.03.31.스크랩, 출처

 

▲항상 내부의 적이 위험합니다.

김영수 선생께서「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이라는 책을 써내셨습니다.

19명의 중국의 역사 속에서 유명한 간신들을

풍부한 자료와 함께 소개하는 그런 책을 썼는데,

 

①예를 들어 진시황이 결정적으로 제국을 상실하게 되는 이유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외부의 적을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그 외부의 적이 아니라, 조호라는 내부의 적에 기인한바 크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제국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그 제국 주변에 있는 모든 이웃나라들,

원수들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나라가 상실되어지는 이유는 내부의 적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②위생적이고 의학적 차원으로 설명해 봅니다.

에이즈, 후천성 면역결핍증 등의 질병을 볼 때

지금도 우리 몸속에는, 우리에게 해를 줄 수 있는 수많은 병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병균들이 힘을 발휘하게 되고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이유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에요.

 

나 자신에게 면역성이 없음으로 인해서

내 속에 들어와 있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그런 병균들이

나를 죽음으로까지 이끌어 갈 수 있는 파워를 발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 안에 있는 원수 

여러분 영적으로 볼 때 ‘원수’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얘기할 때는

우리가 일반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원수,

내게 돈의 피해를 준다든지, 내 명예에 피해를 준다든지

가정에 피해를 준다든지, 하는 그런 원수를 뜻합니다.

 

그러나 진짜 우리에게 영적인 의미에서의 원수는, 어떤 자가 그런 원수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우리 집안 식구가 우리의 원수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하나님하고 나하고 둘과의 관계가 돈독할 때

내 마음속에 일어날 수 있는 평강과 행복감,

여기에 침해를 주고 파고들어오는 모든 존재가.. 다 원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하고 나하고 둘이서 이룰 수 있는 행복과 평강에

방해를 주는 것이 자식이라면 자식이 원수요, 남편이라면 남편이 원수요,

아내라면 아내가 원수고, 부모라면 부모가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 원수는?

결정적으로 기독교는 <돈>을 상실한 것을 피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몸>이 아프게 된 것을 치명적인 피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상실하면서 다가오는 내 마음의 평화와 샬롬, 행복이 깨어지는 그것,

그것을 결정적인 피해라고 보는 것이고

 

그런데 이 <하나님을 상실>하는 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집안 식구가 나의 원수라고 했지만, 그것은 작은 원수고,

진짜 큰 원수는, 내 내부에 있는데, 바로 내 죄라는 것이지요!)

 

◑본론

 

시25편은 비탄시로 분류 됩니다.

그런데 이 비탄의 이유가 (내 죄 때문인지, 내 원수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원수의 핍박 때문에 이러한 비탄할 수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이 주어진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의 불의와 죄로 인해서 이러한 곤고함이 주어진 건지,

얼핏보면, 도대체 명확하게 구분이 가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원수가 나를 이김으로 개가를 부르지 않게 해달라고  시25:2

원수로 인해서 수치를 당치 않게 해달라는 간구가 나옵니다.  :3

 

그러면서 동시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죄의 사유하심에 대한 간구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7. 11, 18

 

그 다음에 19절을 보면,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라고 했는데

곧바로 또 18절 앞에 나의 곤고와 환란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도대체 원수 때문에 괴로운 건지,

내 죄 때문에 괴로운 건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정답은, 내 죄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죄를 내가 회개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원수를 동원/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눌려야.. 사람은 비로소 회개하고, 자기를 돌아보게 되거든요. (특히 사사기의 반복 역사)

 

 

죄사함의 확신이 (아직) 없는 상태에서 지은 비탄시

시편의 대부분  모든 비탄시에는

그 결말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와, 평강을 회복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전반부는 비탄하더라도, 후반부는 감사와 찬송으로 끝납니다. 대부분 그런 구조입니다.)

 

그런데 시25편은 마지막 구절이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란에서 속량하소서. 여전히 탄식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25:22

 

시25편에서는 원수들이 많아서 괴롭습니다. 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동시에 ‘내 죄에 대한 사유하심’에 대한 간청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여호와를 우러러보나이다. 라는 말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25:1, 5

 

결국 전체적으로 이 (상당히 불안한) 시편의 분위기를 보면,

죄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에요. 죄.

 

자기 죄가 아직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는 마음의 생각과 느낌

자기가 하나님과 멀어져있다는 느낌을 주며

동시에 끝없는 불안과 걱정과 근심을 내게 안겨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보시면 '근심이 많아졌다'는 얘기를 합니다. 

왜 그래요? 죄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에요.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분명한 사유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하나님과 가까이 갈 수가 없고

하나님과 하나 된 느낌과 확신을 가질 수가 없고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확신이 없는 한,

너무너무 작은 원수들의 책동에도

내 마음과 내 삶이 다 뒤집혀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사유하심의 확신이 분명하고,

‘나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마음이 분명하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원수도 나를 해롭게 할 수가 없고

내 마음의 평강을 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시25편 설교(원래)제목을

‘원수의 파괴력은 나에게서 나온다’ 라고 잡았습니다.

 

내가 외부적 환경/원수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 내부적인 문제이며,

다시 적나라하게 말하면, 내 죄 문제인데,

특별히 시25편처럼, 내 죄가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없을 때..

 

나는 매일을 삶을 불안하게 살면서,

그 원인을 자꾸 ‘외부/원수’에게로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속에 죄가 있는 한 평강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내 스스로 면역성이 없을 때

너무너무 아무것도 아닌 병균들, 세균들조차도

그것이 나를 죽음에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미약한 원수라도 미약한 책동이라도

내 속에 죄가 있는 한, 그 죄가 용서받지 못하고 있는 한,

그래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지 않는 한,

사소한 것들이라도, 아주 강력한 파워를 가지고

내 마음과 내 생애를 다 파괴시켜나간다는 겁니다.

 

내 마음이 파괴되면서

내 마음의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파괴되면서

그 파장이 모든 내 옆에 있는 사람들, 가족에게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미치면서

내 삶의 주변환경까지도 다 파괴해 갈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 결과, 자살이라든지,

뭐 그리고 아내를 때린다든지,

아니면 자식들을 강압적으로 끌고 갑니다.

 

이런 식으로 나타나면서 온 가정의 평화가 다 깨지고

내가 하는 모든 직장일도 다 깨져버리고 만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한 가지 기억합시다.

‘죄를 잊어버리고 살기’와 ‘죄를 용서받는 것’은 다른 것이에요.

 

‘죄사함의 확신’과 ‘죄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의 차이가 뭡니까?

 

죄가 용서받았다면.. 반드시 성령이 선물로 주어지고

성령이 선물로 주어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환경은 서서히 회복되더라도) 내 마음에는 평화와 평강이 먼저 회복됩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평강하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서서히 안정/회복을 찾아나갑니다.

 

여러분, 제 경우를 보면요, 많은 경우에 죄를 잊어버리고 살아요.

그런데 죄 용서 받으려면.. 내 죄를 깊이깊이 들여다봐야 됩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봐야 되고

그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며, 내 스스로에게 좌절해야 됩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고들 말합니다. 사람 힘으로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깊이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시겠죠)

 

그 내 스스로에게 좌절하는 깊고 깊은 좌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유하심이 임하고

그리고 그때 하나님이 내게 임하시게 될 때

이제는 이 천지가 요동을 하고 진동을 해도

내 마음에 평화와 기쁨과 감사를 빼앗아 갈 수가 없어요. 나를 해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죄의 확신이 없으면.. 원수가 크게 보입니다.

시25편은 아마 그런 ‘사죄의 확신’이 아직 못 가졌나 봅니다.

여기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우러러보나이다(1), 바라나이다(5), 앙망합니다(15),

긍휼히 여기소서(16, 17), 내 죄를 사하소서(18),

젊은 시절의 죄를 기억하지 마소서(7),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20)   이런 표현들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에 하나님이 안 보이고 있는 거예요. 멀리 떨어져 계신 거예요.

그 하나님이 안 보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원수가 등장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원수의 힘이 아주 강력한 거예요.

내 곁에 하나님이 안 보이는 상태가 되다 보니까요.

 

너무너무 아무것도 아닌 그 원수들이

내 곁에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강력하게 나를 해치고 들어오는 것은..

 

내 죄가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지금 다윗이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꾸 자기 죄를 용서해달라는 거예요. 시25편에서.

 

왜 작은 일에도 신경질이 나는 겁니까? 왜 대적이 그리 밉습니까?

왜 사소한 일에도 발끈발끈 화가 납니까?

 

내 속에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난 자꾸 이유를

‘아, 환경이 열리지를 않네.

직장에서 이렇게 자꾸 내 승진이 막힌다. 왜 이렇게 사업이 힘들지?

왜 우리 자식은 옆집 애들처럼 공부를 못할까?

왜 내 몸은 건강이 이 모양일까?’ 자꾸 이런(다른) 데로 이유를 돌리는 거예요.

 

내 죄 때문이에요.

내가 내 죄를 보고, 그 죄의 사유하심을 받으면, 내가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러면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나와 동행하시고,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기만 하고,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무슨 이유로도 내 마음의 평강이 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땅만 보고 사는 사람/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

그렇게 주님의 평강이 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5절 보면 여러분.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하늘을)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2절을 보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다 같은 맥락의 말입니다.

이게 삶의 비결이라는 것이에요.

 

죄사함을 못 받으면 우리는 땅만 보고 걸어요.

‘이 사업을 어떻게 잘할까? 우리 자식을 어떻게 잘 키울까?’

그래서 땅만 쳐다보면서, 이 학원 찾아다니고, 저 학원 찾아다니고.

 

‘어떤 결혼상대자를 만나야 내가 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키가 커야 된다. 아니 중간이면 좋다. 수입이 얼마정도는 돼야 된다.

다 땅만 보고 사는 거예요. 땅만 보고 다녀요.

 

그래가지고 내 발이 함정에서 벗어나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추구할 때

돈에 욕심내지 않고, 애인에 욕심내지 않고,

자식 좋은 대학 들여보내려고 너무 안달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데

이상하게 내 발걸음이, 세상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잘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에요.

 

▲마치는 말

죄가 뭡니까?

하나님과 단절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만한 작은 원수들이 책동을 하고 쳐들어와도

내 마음의 평화가 와장창 다 깨져버리고

살고 싶은 마음이 아예 안 생겨버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내 마음이 나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대신에

돈을 우러러보고/ 직장을 우러러보고/ 직업을 우러러보고/

애인을 우러러보고/ 자식을 우러러보고/

내 마음이 지금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우러러 보고 있는 게.. 우상숭배의 죄란 말입니다.

 

그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동안, 내 발이 함정에 빠지게 되고

아주 눈곱만한 원수의 책동이 일어나도..

내 삶 전체가 다 뒤집혀지고 만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을 자극하는 것들이 있어요.

-자식이 자극하지요.

-사업이 안돼서 마음이 불안하지요.

-뭐 여러 가지 건강이 여러분의 마음에 근심을 주지요.

-노후에는 내가 어떻게 먹고 사나 걱정 되지요.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여러분의 마음을 공격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실은 그것들 때문에 불안한 게 아닌데, 

여러분의 죄가 완전히 사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리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삶이 늘 불안한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기 죄를 인식조차하지 못하고

우리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회개도 안 나오고, 사태가 반전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수/대적을 일으키십니다. 내가 그 고통을 통해서라도 회개하라고요!)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묵상합시다. 회개합시다.

그 죄를 보고,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로 나아갑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또 내 죄를 깨닫습니다.

‘내가 저렇게 매달려 죽어야만 마땅한 죄인이다. 내가 무슨 사업을 하냐?’

‘내가 무슨 애를 키우냐? 너무너무 죄인이라서’

 

‘시장에 가서 장보는 것도 난 내 마음대로 못한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나는 죽어야 된다.’

‘십자가에 매달려 저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되는 저 모습이 바로 내게 제일 합당한 모습이다.’

‘내가 목사? 아, 불가능하다!’ 이것을 깨닫는 겁니다.

 

이걸 알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음을 통하여

사유하심이 일어나고/성령이 임하시고/하나님이 내 곁에(안에) 보이게 될 때,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계속 걸어갑니다.

매일 이렇게 하늘을 보고 걸어가는 거예요. 땅(세상)을 보고 걷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늘보고 걷는데, 땅이 결코 내 발을 집어삼키지를 못합니다.

집어삼키지를 못하는 거예요.

 

원수도 나를 해롭게 하는 상황도

나의 행복을 앗아가는 실패도

이 세상에서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요?

내 죄를 보고/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내 죄를 깨닫고

그 깊이에 좌절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주님의 그 죽으심을 힘입어서 죄가 씻음 받고/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임하신 자들에게는.. 이 세상이 쥐뿔이에요. 

 

    ※참고로, 쥐뿔은 쥐불(불알)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네요. 콩알만큼 작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평강을 회복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