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는 이유 한 가지
①창39:3절에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형통하였다고 했는데,
그 형통의 결과라는 것이.. 종살이 상황에서 더 악화되어 옥살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감옥에서도 요셉이 형통하였다’고 합니다. 39:23
우리 생각에는, 전혀 형통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감옥에서 형통해 봤자이지 않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환경의 형통’이 아닙니다.)
②창28장에,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해 주십니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창28:15
그랬다면.. 라반에게 가서 속임을 당하지 않아야죠. (임금 10번 변역, 결혼 속임 등)
그리고 그의 삶이 일평생 평탄해야죠.
그런데 야곱은, 노후에 자기 삶을 회고하면서 '험악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론, 그 험악한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벧엘의 언약대로, 늘 야곱을 지켜 주셨습니다.
③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에 성령에 크게 감동되면서, 동시에 고생길이 시작됩니다.
(남들 못 받는) 기름부음을 받았으면.. 축복/형통/대박의 문이 활짝 열려야 하는데..
대신에, 뜻밖에도, (남들 안 겪는) 고생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④아래 설교본문에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사랑해 주셔서, 그 각각의 이름까지 다 기억하고 계시지만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을 허락하십니다.
⑤나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겪는 고통/환란/괴로움을.. 무조건 면제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꿈 깨십시오!"
오히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심한 고통/환란/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나의 인격 성숙이요, 신앙의 연단이요,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을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만, 내 삶이 계속 괴로운 이유입니다.
요셉은.. 고통 후에.. 용서의 사람이 되고, 애굽을 통치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시련 후에.. 회개하고, 이스라엘 12지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환란을 통과한 후에.. 예수님을 본받은 넓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후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사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구속사history>에서, 자기 시대에, 자기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점점 빚어져 갔던 것입니다.
일평생 고난을 당하면서.. 일평생 변화되어져 갔습니다.
나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나를 형통케 하시지만
환란/시련/역경/고난을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면제가 아닙니다. 꿈 깨세요!)
‘원래 내 수준보다 월등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구속사(구원의 역사)의 주인공으로 써 주십니다.
개인적으로, 제게 주어진 상황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와 전능한 지혜를 믿게 된 것은,
즉 ‘하나님이 나에게 최적의 현재의 상황을 알아서 마련해 주셨다’고 믿게 된 데는
7~8년 이상 수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모든 주어진 상황을 자족/만족하고 살면.. 발전이 없지 않느냐고요?’
(여기서 ‘환경’과 ‘인격’을 구분해야 합니다.)
인격/신앙/믿음은.. 반드시 계속 발전,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환경/여건/상황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자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섭리로, 다 알아서, 가장 좋은 환경을 주셨다고요!
그것을 불평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닐까요?
바꾸어 말하면, 내 환경과 처지가, 내 생각대로, 내 기도응답대로 척척 좋아진다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고 바라시는.. 나의 신앙인격적 성장이 안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요,
결국은 그것이 내게도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 사명도 못 감당하게 되고요...
(이런 사전 지식을 갖고서, 아래 설교문을 읽어봅시다.)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이사야40:26~31 09.02.08.설교스크랩
▲비로소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게 된 사람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잘못되어서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집도 팔고 재산 다 정리해서 빚을 갚고 나서,
변두리 산동네 허름한 판잣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 정리하고 남은 게 없으니, 이사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짐을 다 풀고 나서, 저녁도 거른 채 밖으로 나왔습니다.
참 허망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파트 창밖으로 내려다보던 서울 시내가
이제는 발밑에서 바로 보였습니다. 한숨만 쉬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 별들이 보이더랍니다.
그동안 도무지 볼 일도 없었고, 볼 생각도 하지 않던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있더랍니다.
어릴 때 마당에 누워서 바라보던 그 별,
식구들하고 손잡고 마당에 멍석 깔고 누워서 보던 그 별이,
그때처럼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있더랍니다.
나는 별을 잊고 있었지만, 별은 여전히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 내가 별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잊고 살았었구나.
밤하늘의 별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사실은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내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는지 잊어버리고 살았었구나.
그동안 나는 정말 별 볼 일 없이(이중적 의미) 살았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 한편에,
‘이렇게 된 게 오히려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사40:26,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우리가 살면서 고개를 들어서.. 저 위, 빛나는 별을 볼 생각을 얼마나 할까요?
(요즘은 서울에서는, 과거보다는 별이 잘 보입니다.
특히 초저녁에 푸르스름할 때, 보이는 별이 더 멋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자랄 때,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그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떠올렸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을 하지만,
그런데 막상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저 별들을 창조하신 분이고,
온 우주만물을 손수 지으셨고,
그리고 나를 만드신 분이라는 사실을.. 가슴 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본문 이사야의 말씀이 선포되었던 때는.. 이스라엘이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정복당해서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고,
나라 자체가 폐허가 되고, 존재가 없어진 그런 때였습니다.
이제는 망했고, 모든 게 끝났습니다.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말합니다.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거기 뭐가 있는가? 거기 반짝이는 별들이 보이는가? 누가 이 모든 별들을 창조하였는가?
너희가 그동안 위협을 당하고 고난을 겪는 동안에,
그 별을 만드신 분에 대해 얼마나 생각했었는가?
그분이 너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었던가?
말로는 하나님을 찾고, 입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그러다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막상 하나님 그분 자신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느끼고/ 생각해 보았던가?
온 세상 만물을 만드신 주님,
아무 것도 없는 밤하늘에 별들을 만들어 아름답게 수놓게 하시고,
(우리가 쳐다보건 보지 않건) 한결같이 반짝이게 하시는 그 분,
그 분이 바로 너희의 하나님이심을 기억이나 하고 살았던가?
밤하늘에 별이 있었는지조차 잊고 살지 않았던가?
▲40:26b, 이사야는 계속 말합니다.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하나님은 밤하늘의 별 하나 하나까지, 그 이름을 각각 부르신다는 겁니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별들을.. 어느 것 하나 모르시는 것 없으시고,
빠지는 것 없이.. 다 세고 계신다는 겁니다.
(과학자들은, 하늘의 별의 수효는, 지구의 모래 알갱이의 숫자와 같다고 합니다.
그만큼 많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구도, 우주 전체에서는, 모래 알갱이보다 더 작은 먼지 정도입니다.)
이사야의 표현은 이런 겁니다.
밤하늘의 별은 그냥 저절로 뜨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마치 출석을 부르시듯이
하나하나 그 이름을 불러주시면
마치 학생들이 “예” 하고 대답을 하듯이 반짝이며 밤하늘에 떠오른다는 겁니다.
별들이 그냥 뜨고 그냥 지는 거라면, 거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별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주셔서, 별이 되게 하신다는 거지요.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이사야는 지금 나라가 망해서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밤하늘의 별들을 만드시고, 그 별 하나하나까지 기억하시고 이름을 불러주시는
그 하나님께서 너희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40: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의 이름까지도 하나하나 불러주시는 하나님께서,
왜 나의 이름을 모르시겠습니까?
왜 나의 사정을 외면하시고,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게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한 거지요.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불러주실 때,
우리가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그 음성을 듣지 못한 거지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시는데,
옆에 친구하고 얘기하느라,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 말입니다.
전에 한번은 영화를 보러갔는데, 마침 그 때 무슨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영화가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났는데, 아무 것도 생각나지를 않아요.
줄거리가 뭔지, 무슨 장면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놓고, 무슨 영화가 줄거리도 없고 아무 내용이 없냐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영화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마련해주셨는데,
받아놓고도.. 못 받았다고 하고,
줄 테니까 가지라고 해도.. 못 들은 척 외면하고서, (평소에 불순종하면서)
‘왜 나한테는 좋은 거 안 주시냐고, 왜 나를 무시하시냐?’고 불평하고 원망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27절의 불평이, 바로 이런 상황이라는 겁니다.)
엄마가 볼 일보러 나가면서, 밥 다 차려놓고, 때 되면 밥 먹으라고 하고 나갔는데,
나중에 와서 보니까, 차려놓은 밥상에 손도 대지 않고,
‘엄마가 밥 안줘서 하루 종일 굶었다’고 하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만을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지도 않고,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좋은 것들 다 외면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 사정을 모르시고,
내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40:28,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그냥 막연히 계시는 분, 우리가 예배하는 분, 참 좋으시고 훌륭하신 분, 그 정도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열심히 듣고 계시는 분, 그냥 듣기만 하시는 분, 그 정도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형편을 얼마만큼 아시고, 어디까지 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하나님께서 얼마만큼 나를 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사야는 말합니다. 사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냥 산 몇 개, 강 몇 개 만드신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분은 피곤을 느끼지 않으십니다.
온 천하를 다 만드셨어도, 피곤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서 일곱째 되는 날 안식하신 것은
피곤해서 쉬신 게 아닙니다. 일곱째 날에는 안식을 창조하신 겁니다.
왜요? 우리가 쉬게 하시려고요.
하나님이 쉬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안식을 창조하지 않으셨으면,
세상에 안식이란 없습니다. 쉬고 회복하는 일이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곱째 되는 날 안식하신 것이지
피곤해서 쉬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십니다.
건전지 광고 중에, 건전지가 팔굽혀펴기 하면서, 백만을 넘게 세다가
헷갈린다고 다시 하나부터 다시 세기 시작하는 광고가 있었지요?
그래서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을 ‘백만돌이’라고 부르는데요,
하나님은 그 정도가 아니시라는 겁니다.
아무리 힘이 좋은 건전지라도 언젠가는 탈진해서 못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곤하지도 않으시고 지치지도 않으십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십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 힘이 좋으면 무식하고, 영리하면 허약하지요.
운동선수들 가운데 유난히 힘이 센 선수들이 있는데,
대개 그런 선수들이 뼈대가 통뼈랍니다.
그리고 그런 선수들한테는 머리 쓰는 일은 기대를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만..
하지만 하나님은 피곤하지도 않으시고 지칠 줄도 모르시지만,
그러면서도 그 지혜가 한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그게 다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 아시고, 또 지칠 줄도 모르시고,
지혜도 한이 없으신데, 그게 다라면, 그걸로 끝이라면, 참 허망하지 않겠어요?
▲40:29~30, 우리의 고통에 동참해 주시는 주님
어떤 분이 위암 수술을 받으셨답니다.
평소에 건강하셨고, 또 건강관리를 잘하시던 분이어서
주변에서는 더 놀라고 당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술을 하고 보니까, 위뿐만이 아니라 간과 다른 장기에까지
상당히 전이가 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수술 후 1년 정도는 비교적 건강하게 사셨는데,
갑자기 급속히 악화되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했답니다.
그분은 사위에게(사위는 목사님), 자기가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나한테 무슨 죄가 이리 많아서 이런 거냐고.. 울면서 하소연하시더랍니다.
사위 목사님은 그런 장인에게,
그래도 ‘하나님께서 장인어른을 사랑하신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더랍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사랑’이란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질 않더라는 거지요.
병원에서도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퇴원을 하라고 해서
집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며 보내시는데,
환자가 너무나 아파할 때는.. 온 가족이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그 분이 아파서 울 때는.. 온 가족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말씀을 말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울며 괴로워 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마치 한 가족처럼,
늘 함께 계시면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울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시고, 지치지 않으시고, 지혜가 있으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기쁨과 아픔, 희망과 절망을 함께 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말합니다.
40:29~30,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피곤하다는 거예요. 기운을 잃는다는 거지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도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젊은이라고 피곤하지 않고, 장정이라고 굳게 서있을 수만은 없다는 거지요.
예수를 잘 믿고 교회를 잘 다녀도 그럴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나중에 설명해주시겠지요.
우리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지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잖아요. 지금이야 다 아니까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안 그랬다고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신비, 인생의 비밀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그 모든 일을 함께 겪으신다는 겁니다.
※저/설교자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제가 정말 아프고 힘들었던 시절에,
몇 날 며칠을 밤을 새면서 울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셨던 말씀, 그 음성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왜 저입니까? 왜 하필이면 접니까?’ 라고 하나님께 항의할 때
하나님께서 제게 하시는 말씀이,
‘너니까 그랬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너니까, 너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니까 그랬다’
라고 말씀하시던 그 음성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저는 그 때 하나님도 울고 계셨다고 믿습니다.
저처럼 엉엉 울지는 않으셨을지 몰라도, 분명 하나님도 울고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맏딸을 시집보낸 아버지처럼,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 때문에 우십니다.
운다는 건, 아픔을 같이 느낀다는 거지요. 이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알고만 계신 분이 아니라,
같이 아파하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그 아픔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40:31,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니까, 새 힘을 얻습니다.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힘들고 아픈 시간은 있습니다.
산을 오르려면 비탈길을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야 하듯이,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때로는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어둡고 지루한 시간도 있고,
때로는 계곡을 내려가듯이 하염없이 아래로, 밑바닥으로 내려가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함께 힘들어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그런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게,
그런 아픔들을 이겨낼 수 있게 힘을 주시고 격려해주십니다.
오직 주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어서,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이 올라가게 해주십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냥 둥둥 떠서 날아가는 게 아니라,
독수리처럼 힘차게 날갯짓을 해서 치솟아 오르도록,
날갯짓을 할 힘, 치솟아 오를 용기를 주십니다.
▲마치는 말
우리가 기억하고 있을 때도, 잊고 있을 때도,
밤하늘의 별은 변함없이 한결같이 떠오르고 반짝입니다.
눈앞의 현실만 보고, 땅의 것만 바라보면 보이지 않다가도,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별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과, 하나님이 불러내신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과 아픔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그 주님이 너를 사랑하시며, 네 고통에 동참하시며,
너를 개인적으로 알고 계시고, 네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시니
이런 주님을 자기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영적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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