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공동체, 은혜 공동체 행6:1~4 2006년 설교(일부)녹취/편집
이 글은 특정 공동체를 비난하는 뜻은 당연히 없습니다.
◑어설픈 은혜보다는, 강력한 율법이 더 낫다는데...
▲만약에 오늘부터 당국에서 교통법규를, 법대로 하지 않고, 은혜로 한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길에 차를 갖고 나갈 것을 겁낼 것이다.
특히 도심지의 혼잡한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끄고, 서로 양보해서 차들이 지나가게 하면,
서로 빨리 지나가겠다는 욕심 때문에.. 거리는 아주 혼잡해질 것이다. 주1)
그러므로 ‘은혜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곳에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차라리 ‘율법의 법칙’이 엄정한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율법의 법칙’이 최선은 아니고 차선이지만, ‘무질서’보다는 더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CIA에서 개도국가들을 분류할 때,
1. 강력한 민주주의국가.. 가장 안전하고,
2. 강력한 독재주의국가.. 허약한 민주주의국가 보다는 체제가 더 안정적이라고 본다.
3. 허약한 민주주의국가.. 가장 불안한 나라로 꼽는다. 독재보다 더 허약하다.
(이것은 정치적인 시각의 분류법임)
▲우리 교회 상황에 적용해 보면,
우리 교회에 <토요일 청소당번>과 <주일 식사당번>을
자발적으로 자원하는 사람이 계획표의 빈칸에 싸인하고,
토요일에 나와서 청소하고, 주일에 식사준비를 하게 했다.
왜냐하면 <은혜의 법>이 <율법>보다 항상 더 좋기 때문이다.
그 청소와 식사당번을, 누가 강압적으로 지정해서 시키는 것보다는
각자가 하고 싶은 날에 봉사하면.. 훨씬 더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토요일 청소당번>이 자꾸 펑크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교회에서 냄새가 나고, 먼지가 날릴 때가 있다.
또한 <주일 식사당번>도 어떤 날은 펑크가 나서, 주일날 아침에 막 허둥대기도 한다.
이때 일부 성도들(특별히 열심파)의 반응은
<강력한 독재/율법>으로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은혜의 법>으로는.. 모양새는 좋지만.. 질서유지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저는, 그런 <율법적>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의 <은혜의 법>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 성도들 모두가, 그것에 적응하고, 그것에 훈련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율법>은 절대로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의 성경적 방식도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적 교회’는 망하고, ‘은혜의 교회’는 승리한 중국교회
제가 어제 밤에 ‘중국 교회’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때, 중국에 당시에 알려진 큰 교회들은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모두 문을 닫았고,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물론 큰 교회의 이름 있는 목회자들은 거의 다 체포되었고,
그런 와중에 교회가 빠른 속도로 와해되었다.
중국에 교회는 이제 씨가 마르는 듯했다.
그런데 이런 핍박의 시기에, 반대로 오히려 살아난 교회들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그 존재의 가치도 알려지지도 않았던
‘작은 양무리 교회’ (小群, little flock, 위치만 니 후예들)
‘예수 가정 교회’ (Jesus family)
이런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중국토착교회들은
그때부터 오히려 급격히 성장해서,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방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이런 교회들은, 중국의 공산화와 뒤이은 문화혁명과 함께 모두가 문을 닫고 말았다.
‘공산주의’라는 강력한 핍박이 있기 전에 평화롭던 시절에는,
이런 <조직/율법>중심의 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에 상대적으로 약했던 교회가
중국에서 크게 부흥했었다.
그런데 ‘공산화’가 되면서
<조직/율법>중심의 교회는.. 공산당에 의해서 급속히/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물론 조직이라서, 이름이 알려져서, 더욱 극심한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별 조직체계가 없었던
‘작은 양무리’와 ‘예수 가정’ 교회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건재하고 있고, 엄청난 무리를 이루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공산화를 통해서, 오히려 더욱 탄력을 받고 부흥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핍박과 투옥, 변절하지 않는 신앙 등이 있었다.
▲오늘날 교회들이 ‘개인주의’라는 사회적 사조에 따라서
급격하게 (개인주의 신앙생활이 편리한) 대형화 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교회의 시스템이나 운영이
<은혜>보다는 <조직, 율법>중심으로 돌아서고 있다.
그래야 큰 조직에서,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교회에서는, 대기업적 경영이론/기법이 도입되는가 하면
남여선교회와 교회기관에서도, 기업적 운영방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방식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필요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만약에,
기독교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오직 <조직/규율>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중국처럼.. 한국에 큰 핍박이 닥칠 때에.. 급속하게 와해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큰 핍박이 혹시 오지 않더라도, 다음 세대가 되면,
<은혜의 법칙>, 즉 기독교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는.. 힘을 잃고서,
앞서 서구의 교회가 걸어갔던 그 길을.. 우리도 답습하게 될 것이다. 다음 세대에!
지금은 조직적으로 잘 운영해서
당회, 각종 위원회를 구성하고,
사회 저명인사 위주로 인사조직을 잘 구성하고,
그러면.. 어쩌면 길면.. 한 세대one generation는 갈 것이다.
사람이 빠져도, 새사람이 자꾸 충원되기 때문이다. 큰 교회에는.
그러나 본질/생명/은혜가 고갈된 교회는
다음 세대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핍박’도 무서운 시련이지만,
‘물질주의, 나태’도 더 무서운 시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교회가 빨리 와해되지 않았던 것은
은혜는 매우 미약했지만, 조직/율법/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조직적 차원에서, 교회가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핍박이 왔을 때.. 그 조직은.. 마치 물거품과 같았다.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 강력한 은혜가, 강력한 율법보다 훨씬 더 낫다.
▲중국교회의 교훈을 본 받아
공산화 이전의 중국의 기성교회들,
조직이 있었고, 시스템이 있었고, 탄탄한 당회/노회가 있었지만,
그런 <외적>인 조직보다도
<내적>인 기독교의 본질인, 은혜/성령/인내가
공산주의라는 외적 핍박을 견딜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외적으로는 강력하게 보였겠지만, 실제로 내적으로 강력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록 우리는 작은 교회이지만
‘외적 조직, 시스템, 율법’에 의해서 운영되는 교회가 아니라
‘은혜의 법칙’에 의해서 운영되는 교회로.. 본질적인 교회로..
처음부터 쉽지는 않겠지만, 연습해 나가자는 것이다.
‘외적 조직, 시스템’은 한 세대 30년을 잘 운영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와해되어버릴 것이다. 인간적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의 법칙’으로 운영되는 교회는
처음에는 시동이 늦게 걸리더라도,
반드시 견고하게 서리라고 .. 제가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복하고, 본 받아야 될 것은 <조직>이 아니라, <은혜>이다.
교회가 조직적 관리에 의해서 커지는 것도.. 부러운 일이긴 하지만,
만약에 그 속에 ‘은혜의 역사’가 없다면..
빨리 성장한 만큼, 빨리 무너질 것이다.
누가 시키고, 지시하고, 규율을 정해서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성도 각 사람이 은혜를 받고서, 자기 스스로 든든히 먼저 서고,
그 자발성에서 나오는 헌신과, 구역모임, 교회봉사로
우리 교회가 비록 늦더라도 은혜로 부흥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세속주의적 가치관을 버리고,
소그룹으로 모일 때에, 부자와 빈자가 복음 안에서 함께 편하게 어울리게 되기 바란다.
구역예배에 나가서도, 아파트 시세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구역이 ‘큰 평수’, ‘작은 평수’로 나눠져서 모이게 되는데..
교회 분위기가 만약 ‘세속주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다면,
그 속에서 구역예배가 잘 운영될 수 없다. 빈부가 나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고액연봉자와 실직자가 서로 ‘형제’로서 만나는 교회 되기 바란다.
▲사도행전 6장에 예루살렘 교회가 커지면서, 구제 문제로 교회내에 다툼이 생겼다.
이때 집사를 세워서, 구제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는 조직적인 정비도 있었지만,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는 교회 본질로의 회귀가 있었다. 행6:4
오늘날 우리 교회에 청소가 안 되고, 식사 당번이 펑크 날 때,
조직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도와 말씀 전하는 본질로 더욱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가 임하고, 구령의 열정이 솟아나야 한다.
그때 성도들은, 율법/조직에 의해서, 억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에 권위authority에 따라서.. 은혜를 받고서... 자발적으로 청소하고, 식사준비 하도록..
그런 식으로 나아가야.. 교회가 본질적으로 든든이 선다는 것이다.
..................................................................
▣관련글 : 개신교의 ‘자유’ 02.03.06.
▶가톨릭과 개신교의 특징적 차이
요사이 개신교는 신도수가 줄어드는데, 가톨릭은 수가 조금씩 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가톨릭이 개신교에 비해 점잖다는 평을 한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관점에서 가톨릭을 호의적으로 후하게 평가한다.
또한 가톨릭은 한국의 전통 및 조상 숭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인다.
이것 역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좋은 인상을 심어주며
가톨릭이 훨씬 더 포용적이고 수준이 높다는 증거로 간주된다.
▶싱가포르와 대한민국의 차이
그러나 이걸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보기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는,
여러 해 전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과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 사이에 벌어졌던
'아시아적 가치 논쟁'으로 비유해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싱가포르, 이거 희한한 나라다. 길에다 침을 뱉어도 벌금, 껌을 버려도 벌금,
오줌 누고 변기 물 내리는 버튼을 안 눌러도 벌금.., 이런 식이다.
매사를 법으로 일일이 단속한다.
그래서 외국 관광객이 처음 도착하면 참 깨끗하고 인상이 좋다.
(이 대목에서 가톨릭을 연상하시는 분, 독해력이 꽤 있는 분이다.)
우리나라도 깨끗한 편이지만, 싱가폴 만큼은 아니다. 싱가폴보다 자유롭기 때문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는 개신교를 연상하셔야 한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싱가포르의 이광요 식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광요는 싱가포르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적 가치'(유교적 강제)에 의거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보기에는 싱가포르의 도시 환경이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침 안 뱉고 껌 안 버리는 일은 시민의식의 향상을 통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자율적이 아니면 오래 못 간다.
그런 세세한 일까지 강제적으로 규제하는 태도를
우리는 박정희 유신 독재 때부터 신물 나게 봐왔다.
(‘한국 놈들은 말로 하면 안 돼. 엽전들은 그저 두들겨 패야 말을 들어먹어.’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요컨대 한국인 또는 아시아인은 자유를 허용하면 안 되고
강압적으로 통제를 해야만 일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강제적으로 규제해서 아시아 각국이 한때 경제적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
‘개발 독재’라나, 뭐라나. <하지만 그게 오래 못 간다!> 벌금 안 매기면.. 다 제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라는 말은.. 시장의 자율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두고 볼 일이지만,
아시아적 가치(강제, 강압)로는 국가 백년대계를 결단코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자유’
가톨릭이 그렇다. 일견 일사불란하고 정돈이 잘 된 것 같지만,
거기에는 계서제(hierarchy, 성직자 계급제도)가 있어서
곁으로 삐져나오는 가지에 대해서는 적시에 통제가 가해진다. 비유하자면 싱가포르 식이다.
(그러나 그런 강력한 통제 안에서, 얼마든지 자율성이 보장된다.)
그러나 개신교는 어떤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강력한 자율(안 좋게 말하면 전횡)
또한 각 개교회의 자유, (안 좋게 보면 무질서)
그래서 개신교엔 장래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고 본다.
'자유/자율'에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민주주의의 시행착오 역사
자유민주주의가 서양에서 어떻게 발전했는가? 그게 하루아침에 정착된 것이 아니다.
서양 근대사 수백 년 동안 무수히 시행착오를 겪고
수많은 피를 흘리면서 고생 고생한 끝에 가까스로 얻어진 것이다.
그들이 서양근대사에서 겪었던 혼란과 무질서는 정말 길고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그것이 오늘의 서구사회를 있게 만들었다.
▶지금의 무질서는 시행착오 과정의 일부분
나는 우리가 거치는 과정(2002년 국민의 정부 당시)도 다 그러한 시행착오의 일부분이라고 본다.
우리는 지금 혼란의 폭풍우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 무질서를 견딜 수 없을 것처럼 지긋지긋하고 심각하게 느끼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무언가 새로운 질서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발전과 성장은, 반드시 자유를 기반으로 해서, 그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강제와 율법은.. 당장은 ‘질서’를 만들더라도.. ‘발전’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서양 사회와 아시아 사회의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자유”의 유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자유는 개신교의 강력한 기반
다시 개신교 문제로 돌아와서, 개신교엔 참 문제가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유>라는 여건 속에서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중이다.
그 속에서 바야흐로 선과 악 사이의 스펙트럼이 조금씩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서 진리의 편에 선 세력이 전면에 확고하게 설 날이 올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장 강력한 기반은 바로 자유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허락하신 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실존적 상황이다.
물론 타락과 일탈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는 복원력도 갖고 있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를 보시라.)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주 천천히 돈다.
무질서와 혼란에 설령 분노는 할지라도, 좌절을 할 필요는 없다.
엄격한 가톨릭에 주눅들 필요 없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비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의 근본이 되는 강령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각을 가져야 한다.
종교개혁이 개신교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것은 바로 '신앙(또는 교권)에서의 자유'이다.
(박상익 님의 글 스크랩, 정리)
주1) 그러나 개도국의 지방도시에서는, 신호등을 설치했다가도 다시 뗀다고 한다.
왜냐하면 혼잡하지 않은 도로에서, 자동차들이 스스로 흐름을 잘 따르면,
신호등이 없는 것이 더 빠르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보행자들도, 차라리 신호등이 없는 것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신호등이 자기들 보행에 지장을 준다고 다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은 혜
차량 대수가 적고, 사고 나지 않고, 서로가 잘 양보하면.. 신호등이 없는 것이 더 낫다.
‘은혜의 법칙’이 잘 통하는 곳에는, ‘은혜의 법’이 율법보다 더 우위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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