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간에 오신 이유 - 동병상련 눅2:1~7 06.12.24. 설교 일부 스크랩
▲말구유..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먼저, 누가가 본 예수님의 실제 상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말구유에 누워계신 상황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중고 김치냉장고가 들어 왔는데,
그것을 청소하는 과정에서, 몇 년간 배어 있던 김치냄새가 너무나 지독해서
플라스틱 김치통을 다 버린 적이 있습니다.
냄새라는 것은.. 한 번 배면 잘 빠지지 않습니다.
마구간 축사 자체에서 나는 것은 물론이지만
여물통에 밴 냄새는, 아무리 빡빡 문지르고 닦아도 빠지지 않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지금 거기에 누워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분이 있습니까?
그리고 요람이 없어서, 여물통에 누웠던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아무리 가난해도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구간에 오신 이유 - 동병상련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꼭 그렇게 비천하게 마구간에 오셨어야 될까요?
도대체 그렇게 오신 이유가 뭘까요?
한 마디로,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더 알고 싶어서였던 겁니다.
친히 인간이 되셔서, 사람이 느끼는 희로애락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던 겁니다.
자연과학적으로 말씀드리면, 그 분은 창조자신데,
그렇게 광대하시고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난세포가 될 정도로 작아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친히 시골뜨기 아이가 되셨고,
친히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품꾼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한자성어를 아실 겁니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는, 서로 이해하고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느끼고 싶었던 게 바로 그런 마음이셨던 거예요.
▲동병상련 일화
미국의 한 재혼한 부부가 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딸은 한국전쟁에서 죽은 여자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였는데,
사정이 있어서 12년 전에 고아원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래도 처음 1, 2년까지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 뒤로는 서로 소식이 딱 끊기고 말았습니다.
노래를 잘 해서 성악 레슨을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고,
나름대로 미국의 고아원 생활에 잘 적응해 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그만 연락이 끊어진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딸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자기들 힘으로는 찾지 못하고,
그런 일 – 사람 찾아 주는 일 – 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사서
그 아이를 계속 찾았습니다.
이 일을 맡은 쉐이드란 사람이 미국 전역을 수소문하고 쫓아다녀서
마침내 LA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 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쉐이드는 편지를 쓰고, 어느 날 찾아가겠다고 연락을 하고는 찾아갔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라, 무대 뒤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쉐이드씨, 저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
선생님 편지도 제 매니저가 읽어줘서 내용을 알았습니다”
그러더니 단호하게 말하기를 자기는 엄마를 만나지 않겠다는 겁니다.
자기를 고아원에 버린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 동안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 엄마에 대한 원한과 원망으로 살았었는데,
이제 만나면 그동안 겨우 식힌 그 마음에 오히려 새 불만 지필뿐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런 그녀를 쉐이드가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결국 딸은 엄마를 만나보기로 작정하고 날짜와 장소를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그 날이 되어서, 딸(클라우디아)은 약속한 호텔로 갔고,
방문을 열었을 때 거기는 우아한 중년 부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딸은 앞을 못 보기 때문에 안내를 받았지요.
그런 딸을 쉐이드가 엄마 앞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르다가 딸이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겨우 인사를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어머니가 말합니다.
“목소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이리 가까이 와 주겠니?”
그 말을 듣자 딸은 갑자기 그 동안 꾹 참았던 마음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왜 다시 저를 찾으신 거예요.
버릴 때는 언제고 찾을 때는 또 언제예요.
저는 당신이 싫어요. 당신은 제 어머니가 아니에요.” 막 울부짖으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딸의 모습은 상관없다는 듯이
그 어머니는 딸의 두 어깨를 잡고,
그 손이 머리로, 얼굴로, 볼로 차례차례 만지며 내려가는 겁니다.
“참 많이 컸구나. 이렇게 예뻐졌구나.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그러면서 계속 딸의 몸을 여기저기 더듬는 겁니다.
순간 딸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외칩니다.
“그럼! 엄마도 앞을 못 보는 거예요?”
“그래! 나도 너처럼 앞을 못 본단다.
하지만 네가 세상 어디 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믿었지!”
그러자 그 둘은 서로 와락 부둥켜안고 통곡을 합니다.
그 동안에 엄마에게 품었던 모든 원망과 분노, 증오, 원한
이런 것들이 한 순간에 다 녹아내렸습니다.
엄마도 자기 같은 시각장애인이란 것을 알자,
모든 게 다 용서되고 이해가 됐던 겁니다.
그 어머니는 어느 날 의사로부터
자기가 유전성 시각 질환을 앓고 있고,
얼마 후면 앞을 못 보게 된다는 것을 미리 통보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어린 딸을 보니까, 딸에게도 그 병이 온 거예요.
그래서 그 딸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그래도 고아원에 맡기면 좋은 양부모를 만나서
자기와 사는 것보다는 더 행복하게 살겠지 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고아원에 맡긴 겁니다.
우리도 오늘 아기 예수님이 누우신 구유를 붙잡고,
“하나님도 나처럼 사람이 되셨나요?” 묻는다면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그래, 내가 너를 알고 싶어서 사람이 됐단다.
네가 죄 짐을 지고 고통 할 때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고 싶었단다.
네가 한 평생 겪는 가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나도 알고 싶어서 사람으로 왔단다.
사탄의 시험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싶었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파할 때, 또 네가 고독할 때,
또 네가 겪는 실패와 허무와 불안이 얼마나 혼자 견뎌내기 어려운 일인지
알고 싶어서 나도 사람이 됐단다...”
이 사실을 우리 마음의 창고에 담고 있으면,
세상에 오신 주님은 내게 언제나 큰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필립 얀시가 쓴 글
“창조자가 지구상의 피조물 가운데 한 부분이 되신다는 사실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도 견줄 수 없고 전혀 생소하며 유일무이한 사건이었습니다.
춥고 어두운 날 밤, 베들레헴 굴곡진 언덕 위에서
영계와 물질계가 극적으로 교차되었습니다.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주를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주를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께서 시골뜨기 아이가 되셨습니다.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똑같이 걷는 법, 말하기, 혼자 옷 입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음으로,
의도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결함 속으로, 약점 속으로 들어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전지하심은
당시 통용어였던 아람어 발음 하나하나를 배워야 하는 한정된 두뇌로 바뀌었고,
온 우주에 충만하신 그의 편재하심은
두 발로 걷고, 때로는 나귀를 타야 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전능하심은.. 목수 일을 할 정도의 힘은 가졌지만,
그 분은 전혀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나약한 상태로 변하셨습니다.
한 눈으로 온 우주의 별들을 바라보시던 그 분이
나사렛의 좁은 오솔길과 유대 광야의 바위들과, 예루살렘의 복잡한 거리를 쳐다보셨습니다.
물질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물질의 형태를 취하셨습니다.
화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의 한 점이 되듯,
극작가가 자신이 쓴 연극 대본의 한 등장인물이 되듯이 말입니다.”
▲약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약자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에게 앞으로 가난이 오고, 실패가 오고, 아픔이 오더라도
너무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여러분의 그런 고통 때문에
주님이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을 주목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구간 탄생 말고도, 성탄의 메시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먼저 천대받는 목자들에게 탄생소식을 알린 일이나,
안나와 시므온 같은 노인들에게 예언하신 것이나,
이방인인 저 동방박사들에 별을 보이신 거나...
이런 모든 것을 볼 때 우리 예수님은 확실히 약자 편이십니다.
억압받고, 소외당하고, 아파하고, 고통당하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의 편이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격랑이 닥칠 때,
사실은 그때가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때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동안 들으셨던 모든 간증을 기억해 보세요.
그 간증자들이 언제 주님을 만났던가요?
실패하고, 부도나고, 병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주님을 만나지 않았던가요?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는 안 그렇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실패와 좌절과 어려움이 없었다면
과연 여러분이 예수를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도 그런 일이 없었으면 교회 안 다녔을 사람이 태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물 흘리고 있을 때,
그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우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위로받으시고 용기 내셔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말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알고 참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경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영을 자기 가슴에 모신 사람은
'동병상련'의 정신이 반드시 있게 됩니다. 어떻게 없겠습니까!
▲관련글 : ‘무능함 가운데 함께 해 주는’ 위로
병원 원목으로 있을 때 환자들을 만나기 위해 병실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도 모르게 우울해지고 무기력한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아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이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그들이 겪는 아픔과 처지를
헤아리고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골다공증이 심해 제대로 걷지 못하는 할머니 한 분이 입원했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나으실 거라고,
좋아지실 거라고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할머니의 다리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병원 원목은 병을 치유하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병자와 함께 아파해 주고, 그 무능을 나누어지는 사람임을 체험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참 무능한 분이시지요.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어주는 것이 위로가 되듯,
아픈 사람과 함께 아파해 주는 십자가 위의 그분이.. 우리의 위로가 되어주십니다.
....................................
주1)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한 시점과 장소는 '마구간'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2:10~11
-본문에 박사들은, 마구간이 아니라, 집에 들어가서 경배했다.
(성경에 '마구간'이란 말도 아예 안 나온다. 다만 '구유'에 뉘었다는 말씀에 근거에 '마구간'으로 추론한다.)
-마2:11절에 '아기'로 번역된 헬라어 '파이디온'은 제법 자란 아이를 뜻한다.
그래서 KJV성경은 young child로 번역했는데, 적어도 생후 6개월은 지난 시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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