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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칫집에서 나와서 산과 언덕으로 2356

LNCK 2010. 3. 16. 12:36

◈잔칫집에서 나와서 산과 언덕으로                     아가서2:1~7                     08.09.06.설교녹취



술람미 여인은 처음에는 바로의 준마였다.


▲1:9a 내 사랑,

이 구절은, 여인에 대한 주님의 최초의 묘사이다.

여기서는 ‘어여쁜 자야 my beloved’라는 묘사를 아직 하지 않는다.   2:10 

그냥 ‘내 사랑: my love’이라고만 한다.


주님이 그 여인을, 무조건적인 은혜로 선택하여 사랑하신다.

그러나 아직 여인에게 변화가 시작되지 않았다.


이 여인은, 점점 성숙되면서, 2장에서

복음 전하러 산과 들을 달리는 곳으로 초대 받으면서

비로소 ‘어여쁜 자 my beloved’로 한층 승격되어 불리게 된다.  2:10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주님께 ‘내 사랑하는 자여 my love’로 불리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심지어는 불신자까지도!


    그러므로 우리는 ‘내 어여쁜 자 my beloved’로까지 불리어야 한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우리가 ‘산과 들을 넘는 그 분을 따를 때’ 그렇게 불리어 질 것이다.

    (나중에 2:10절에서 자세히 설명함)


▲1:9b 그대는 바로 왕의 병거를 끄는 준마(빠른 말)와 같소.               *駿馬 : '준'은 빠르다, 높다의 뜻/ 준수하다는 뜻과 다름

처음에 여인은, 바로 왕(세상 신)의 마차를 끌던 준마였다.            

세상에서 바로 왕의 준마처럼 화려하게 또한 열심히 달려가지만,

결국 그가 봉사하는 대상은.. 애굽의 바로 왕/세상 신이었다.


아직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힘을 다해, 마차를 끌고 간다면서, 애를 써서 봉사하지만,

어쩌면 거기에 바로 왕을 태우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왕의 마차.. 얼마나 화려하고 멋있겠는가?

이 ‘바로 왕의 마차’는.. 3:7절의 ‘솔로몬의 가마’에 비교되는데,

여기서 가마는.. 1인승의 볼품없는 들것이다. 바로 왕의 마차에 비교하면 특히 그렇다. 

그러나 여인은 ‘바로의 마차를 끄는 준마’에서 → ‘솔로몬을 태우는 가마’로 변화된다.

마차의 재질과 가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누가 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바로의 준마.. 자기 육신과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

성경에 보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강함이 문제였다.

더 연약해지지 않아서가 문제였다. (우리의 '약함'은 사실 별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바로 왕의 병거를 끌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우리의 힘이(사실은 약한 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할 정도로 연약해 지기를 (사실은 진짜 강한 힘) 바란다.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가마가 되기를 바란다.



◑잔칫집의 주님을 만나서 기쁨을 만끽하는 술람미 여인    2:1~7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가시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신랑 되실 주님은, 우리들을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가시는데,

그 주님의 사랑이, 자기 위에 깃발처럼 즐겁게 나부낀다고 여인은 말한다.


주님이 우리를, 잔칫집으로 인도하신다.

교회 가는 것이 즐겁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마치 잔칫집 분위기와 같다.


그 주의 사랑으로 너무 기뻐서

그가 나를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이어지는 2:5절에서 말한다.


▲2:6 그대의 왼팔에 나를 눕혀, 오른팔로 나를 안아주네.

사랑 때문에 병이 난 술람미 여인을, 신랑은 더욱 사랑해 주신다.


▲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당신들에게 부탁한다.

‘노루와 들사슴’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가리킨다고 설교자는 본다.①

왜냐하면 노루와 들사슴은, 산과 언덕을 넘어 다니는 짐승이고,

성경에 ‘아름답도다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이여’ 라는 구절을 참조하면 그렇다.  사52:7

 

‘노루와 들사슴’은

2:8, 신랑이 노루처럼 ‘산과 언덕을 넘어서’ 오신다고 했고,

2:9, 나의 연인은 ‘노루와도 같고 수사슴과 같다’고 했다.

2:17, 나의 연인이 저 거친 언덕에서 뛰노는 ‘노루와 수사슴 같다’고 했다.

이 구절들은 ‘노루와 수사슴’을.. 신랑에 비유하고 있다.②


‘노루와 수사슴’이 신랑이든지/복음전파자이든지

그들은 산과 언덕을 넘어 다니고, 뛰어다니는.. 활동적인 복음전파자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2:7b 예루살렘 여자들이여, 노루와 들사슴으로(과 더불어) 당신들에게 부탁합니다.

제발 내 사랑이 원할 때까지 깨우지 마세요. 제발 내 사랑을 깨우지 마세요.


지금 아가서2:1~7절 상황은, 잔칫집이다.

2:4절에서 보듯이, 신랑이 여자를 잔칫집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여자가 병이 났는데, 신랑이 자기를 잠들도록 눕혀주었다. 2:6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사람들에게, 깨우지 말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2장 상황은, 여인이 잔칫집에서 만족하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가 처음에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나면.. 이런 잔칫집의 기쁨을 경험한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기쁘고 행복한 것이다.

    누가 제발 방해하지 않았으면(깨우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 든다.



◑산과 언덕에서 주님을 만나는 술람미 여인    2:8~17


(2:8절부터 장면이 잔칫집에서 → 산과 언덕으로 바뀐다.)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 분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이 여인이, 자기를 구원할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하기를

산을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는구나.. 라고 했는데,

이사야서의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사52:7

구절을 연상하게 된다.


이 이사야서의 구절은, 복음전파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진짜 복음전파자이신 그리스도(신랑)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높은 산과 들판을 마치 노루/사슴처럼 가볍고 즐겁게 뛰어넘을 수 있도록.. 기도드리자.


▲2:9 나의 연인은 노루와도 같고 어린 수사슴과도 같네.

아 저기 벽 뒤에 서서,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보시네, 창살을 통해 엿보시네.


지금 이 장면은,

집안에 갇혀있는 술람미 여인을.. (2:8에서 산과 언덕을 넘어오신) 신랑이 들여다보고 계신다.


신자가 처음 예수를 만나면, 그 기쁨, 그 누림에 오래 머물기 원하지만,

주님은, 신자가.. 잔칫집을 빠져나오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복음전하는 발걸음으로, 노루와 사슴처럼, 산과 언덕을

주님과 함께 신부가 누비기를 원하시는데...


그래서 앞 단락에서 잔칫집에 계시던 신랑은

그 집을 빠져나와 산과 언덕을 (복음 전하며) 누비시다가

다시 잔칫집에 돌아와서

아직 잔칫집의 누림에만 계속 머물러있는 여인을.. 이제 밖으로/산과 언덕으로 불러내신다.  2:10~17


지금 여인은 신랑을 볼 수 있지만,

창살로 그 사이가 가로막혀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주님이 주신 누림(잔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잔칫집안에 머물면서, 주님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여러분, 처음에는 누림(잔치)에 머물러 있다가도

거기서 빠져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신랑이 산과 언덕을 다니시기 때문에,

그 신랑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누림(잔치)의 행복에 너무 빠져서

산과 언덕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을

놓쳐버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로막힌 창살 사이로, 주님만 바라보는 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주님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창살로 가로막혀 있다. 그 분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잔칫집을 나와서 산과 언억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


다행히도 여인은, 신랑을 따라서 산과 언덕으로 나서는데... ↙

 

▲2:10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2:4에서, 처음에 잔칫집으로 인도하신 주님은

2:10에서, 이제 신부를 산과 들판으로 인도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의 길로.. 인도하신다. 동행을 요구하신다.



산과 언덕을 넘어서  → 바위틈 낭떠러지로 인도하신다.


▲2:14 바위틈 낭떠러지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여러분, 잔칫집의 기쁨을 주시는 주님,

또는 내 개인적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 이 정도로만 신앙생활하면.. 수준이 낮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주님의 초대를 받아, 주님과 함께 (일어나 함께 가자, 2:10) 

산과 언덕을 지나면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이르게 된다.   2:14

이곳은 다름 아닌 골고다 언덕, 십자가를 지는 위험한/은밀한 곳이다.


그러나 이런 바위틈 은밀한 곳에 이를수록, 주님의 더 깊은 사랑을 받는다.

‘나의 비둘기’라는 표현이 .. 벌써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


    ‘나의 비둘기’에서 또 하나 살펴볼 대목은,

    여러분, 비둘기는 절대로 강하지 않다. 연약하다.

    주님의 사역은, 강한 내 육신적 자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의 준마 수준이다.


    주님의 사역은, 바위틈 낭떠러지의 비둘기같이

    연약한/깨어진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의지해서 수행한다.

   

▲2:14b, 그대 얼굴을 보여주오, 그대 목소리를 들려주오, 그대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 얼굴은 아름다워..

이제 신랑이, 여인에게, 거의 사랑을 구걸하는 수준이다.

그만큼 여인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인이, 십자가를 지러, 바위틈 은밀한 곳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모세도 바위틈, 은밀한 곳에서 지나가시는 하나님을 뵈었다.

이곳은 십자가임과 동시에 부활의 무덤이다.

이 여인은,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면서, 놀랍게 변화되는데...  ↙



◑솔로몬의 가마輦가 된 술람미 여인                    *輦 : 가마 연


▲3:7 보세요. 이것은 솔로몬이 타고 오는 가마랍니다.

십자가와 부활, 바위틈 은밀한 곳의 위험에서 승리한 여인은,

이제 솔로몬(신랑)을 태우고 다니는 가마로서.. 주님을 만난다.

완전히 주님께 쓰임 받는 성숙한 종이 된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쉴 수 있는

주님을 태우고 다니는 가마가 되기를 축원 드린다.


이제는 내가 쉬는 신앙이 아니라,

잔칫집의 기쁨만 만끽하는 신앙이 아니라,

신랑되신 주님을 쉬게 하는 신앙이다.


내가 산을 넘고 언덕을 지나지만,

‘주님을 나의 가마에 모시고/태우고 간다’...

이렇게 내 기쁨의 수준이 달라져야 한다. upgrade되어져야 한다.

이제는 주님을 섬기는데서 오는 기쁨,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서 오는 기쁨이다.

(축복 받고, 잔치하는 기쁨을 넘어서..)


이런 여인이 4:8절에 이르러서 비로소/최초로 ‘신부’로 불리운다.

 

    참고로, 마16장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자

    베드로는 ‘그리마옵소서’ 하면서 예수님을 돌려세우고는 막 혼냈다. rebuked

    예수님은 산과 들판의 언덕을 지나서, 바위틈 은밀한 곳까지 다니시려 하는데,

    베드로는 잔칫집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베드로야, 너는 바로의 병거처럼, 지금 너무 네 자아가 강하구나!’

    얼마나 강했던지, 예수님을 꾸짖고 훈계할 만큼 그 자아가 강했다.



*관련글 솔로몬의 가마가 된 신부                                                                            영적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