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못해서라도.. 주로 가톨릭 글 스크랩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성령이 충만해서 자발적으로 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마지못해서라도.. 조금 머뭇거리면서라도..
결국은 신앙적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손해 보는 선택
하나님을 사랑하면 손해 볼 것만 같은데도..
손해를 보고서, 그분을 사랑하기를 선택한 일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계속 어려움에 처할 것만 같은데도..
어려움을 당하고서, 그분을 사랑하기를 계속 선택한 일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죽을 것만 같은데도..
순교하면서까지, 그분을 사랑하기를 선택한 일이 있으신가요?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대우받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혼자 궁궐 속에서 몸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손해되고, 어려움 당하는 쪽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훌륭한 신자들이
‘모세’와 ‘에스더’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훌륭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만하면 충분히 훌륭합니다.
다만, 위기의 순간이 닥칠 때,
손해보고/어려움 당하고/자기가 죽는.. 선택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눈치를 살피면서, 대중이 가는 길에 자기가 편승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어린 신자는.. 주님께 뭘 받음으로써.. 기뻐합니다.
성숙한 신자는.. 주님 때문에 손해/어려움/괴로움 당한 것 때문에.. 기뻐합니다.
금년 사순절에는.. 내 기쁨의 근거가 upgrade되기를 바랍니다. <편>
◑고민 고민하지 마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다.
“순간순간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될 때면
좀 더 힘든 것, 좀 더 어려운 것, 좀 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선택해라.”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늘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편안함을 찾기보다는
남이 하지 않는 일, 새로운 일, 힘든 일에 도전한 적이 여러 번 있었던 것 같다.
성경봉사자를 해보겠느냐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주일학교 교사를 하라는 부름에도,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갈 때도.. 수많은 갈등 속에 용기를 냈다.
때로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가?’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병이 들었을 때도.. 새로 컴퓨터를 배워, 매일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아픈데 그걸 왜 하느냐?’는 핀잔도 들었지만,
그런 침울한 때일수록 생산적인 일을 했기에.. 지금 그 덕을 많이 보고 있다.
(책도 냈다)
예수님도 우리를 힘겹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신다.
당장은 어렵지만 후일에는 좋은 길,
당장은 힘들지만 후일에는 승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작은 목숨을 버려 후일에 큰 목숨을 얻으라고
그 길을 기필코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제는 자식들이 어떤 길을 선택하면 좋겠느냐고 수시로 묻는다.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매번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마다
편안하고 쉬운 쪽보다는 조금은 어려운 길,
조금은 힘든 길,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에 도전해 보길 권한다. <옥>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잃음으로써 얻는 것,
이는 게임(game)과도 같은 것이며 하나의 내기(betting)와도 같다.
말도 안 되는 게임 같지만..
이기면 온 세상을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
누구든지 마지막까지 예수와 연대(連帶)하여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버릴 때,
진실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며,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기쁨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대>
◑사랑의 역심 逆心
저에게는 역심(逆心) 같은 것이 있습니다.
청개구리 심보라는 것은 아니고요.
아주 교만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를 헐값에 팔아넘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데
예를 들면
신문에서 어떤 영화에 대해 좋게 평하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보아도
그까지 것 보러, 나같이 귀한 사람이 행차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무엇이 유행이라도 애써 또는 실제로 무관심합니다.
나는 그런 시류에 편승해 가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전히 교만하기는 하지만 좋은 면의 역심도 제게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한다면 다른 사람 아무도 찾아보지 않아도
나는 찾아가보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만하기는 하지만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끔 이런 역심이 필요합니다.
하는 짓이 고약하지만,
죄를 지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내가 더 필요하다는 사랑의 역심 말입니다.
예전에 가끔 신문에 나오는 얘기,
어느 아가씨가 옥중 죄수와 결혼했다는 얘기가 있지요.
그 죄수의 기구한 인생 사연을 신문이나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고 알게 된 사람일 뿐인데,
그녀는 그런 사람에게 자기가 필요하다면서.. 스스로 찾아가 결혼합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지요.
영화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 본 영화 같은데,
부자 집 도련님이 가난 때문에 몸을 파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결혼한다는 영화를 보고는
너무 감동하여, 저도 그런 사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수사님들을 가르칠 때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가르치는데도
어떤 형제는 말을 잘 듣지만
어떤 형제는 너무 제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밉기도 하고
‘이렇게 말을 안 들으면 자기 손해지!’ 하고
아예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어느 날도
그런 마음으로 잠든 그 형제의 방을 보고 있는데
마음속에서 복음 말씀이 조금 변형되어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만 해도 척척 잘하면 스승이 필요 없지!’
‘스승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스승의 존재 이유가 없는 게지.’
그러므로 가장 말썽꾸러기가 스승/저의 "Raison d'e tre(존재이유)"이지요.
병자에게 의사가 가장 필요하고
공부 못하는 사람에게 스승이 가장 필요합니다.
사랑의 역심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북한 선교를 위해 일하는 저는 이런 이유로
북한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역설하고 다닙니다.
회개할 줄 모르기에 북한 지도자들을 위해 더 기도해야 한다고.
이런 북한 지도자 밑에서 고생하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북한 복음화를 위해 더 기도해야 한다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엇 하러 기도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왜 퍼 주냐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 역설적 사랑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그러니까 더 기도해야 하고
더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선>
◑은총의 때를 헛되게 받지 않게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지금까지의 저를 보면
사순 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늘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사순시기를 기꺼이 잘 맞이하지만
어떤 때는 사순 시기가 다가온 것이 영 부담스럽습니다.
사순 시기를 거룩히 지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친구들하고 노는 것이 너무도 재미있는데
그 지루하고 긴 미사와 교리공부를 하러 가야 하는
그 어린이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미사를 드려도 괴롭고
미사를 드리지 않으면 더 괴롭습니다.
결국 미사를 드리지만, 은총의 시간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은총을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산기슭에서 평생 수도자처럼 혼자 사셨습니다.
사시는 곳이 지대가 높아 물이 솟지 않았습니다.
하여 비가 오면 그 빗물을 받아 아껴 써야 하는데
비가 와도 항아리를 비워놓지도 않고 뚜껑을 열어놓지도 않으면
그 귀한 비를 그냥 흘려보내고 맙니다.
이번 사순절 그렇게 될까봐
저는 어저께 서둘러 고백성사를 봤습니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 은총의 때가 되기 위해
지금 나는 회개를 해야 하는데
이 회개를 미루려는 저의 마음을 족치고 죄기 위해
준비가 덜 되었는데도 서둘러 고백성사를 본 것입니다.
주님, 회개생활을 잘 시작하게 하시고
이 사순절 은총의 때가 되게 하소서! <선>
◑의미 보다는 재미를 찾는 세대
(이 글을 읽고서, 너무 재미만 추구하는 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와 달리 토크쑈가 유행입니다.
토크쑈는 처음에는 사회 저명인사를 불러다가
그로부터 들을 만한 것들을
대담을 통해서 시청자에게, 그 의미나 교훈을 나누려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곧 토크쑈는 재담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두 나와서 낄낄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닌 분들도 있습니다.)
토크쑈 뿐만 아니라, TV에 여러 프로가 있는데
대부분이 낄낄거리는 것들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인데,
그런데 나중에 끝나고 나면.. 아주 한심한 것들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거기 토크쑈에는 누가 나와도
같이 나누는 자기 인생과 존재의 내용 속에.. 진지한 구석이라곤 없습니다.
아니 사회자나 분위기가.. 진지할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다 가볍고 쉽자고만 합니다. 낄낄대면서 재미있으면.. 그만입니다.
누가 나와도 똑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진지함을 잃고 있습니다.
▲삶의 진지함보다는, 화폐가치만 따지는 세대
또 하나.. ‘극단적 실용성’의 문제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용주의는 좋은 것임)
오늘날 모든 것은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화폐가치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성품, 인격 같은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든 게 다 돈으로 환산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운이 좋은 사람과/ 운이 나쁜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이 이분화 되고 말았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운이 없는 사람으로 인정됩니다.
누가 얼마나 성실하고, 정직한가.. 언제부턴가 그런 것 따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성공한 사람도,, 교활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쓰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에 대해 진지함과 성실함을 빼앗기고 사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 무엇보다도, 삶의 진지함과 성실함이 토대가 되는데
하나님이 진실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실용적 가치에 따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재미가 아니라,
화폐가치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삶의 진지함을 회복합시다.. <설교中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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